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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53화 (153/201)

#153 절대로 지지 않아. 와라, 마녀!

연회장 전체가 조용하다. 모두가 숨죽인 채 서쪽마녀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서쪽마녀는 연회장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처럼 똑바로 루디 만을 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아.'

안 돼! 그렇게 보지 마. 그 사람은 내 남편이야.

잘못하면 서쪽마녀를 향해 그렇게 소리치면서 발을 굴릴 것 같아서, 리리샤는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표정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갈고닦은 덕분이다. 남작 부인의 맹훈련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서쪽마녀가 루디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손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다. 항상 그렇게 해온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설마, 디코콰리아에서 이곳에 오는 길에도 여러 번 저렇게 손을 내밀고, 루디는 그걸 잡아준 걸까. 습관처럼 되어버릴 정도로 자주?

심장이 아프다. 누군가가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서쪽마녀가 루디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섰다. 그녀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루디는 잡아주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서쪽마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엇!"

"마녀가 왜 황제에게?"

"이런 외부에 마녀가 나오는 일도 드문데, 무릎을 꿇다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놀란 것 같다.

서쪽마녀가 두 손을 내밀자, 루디가 황제의 인장이 끼워져 있는 손을 내밀었다. 마녀가 루디의 손을 감싸잡았다.

"제국의 황제시여, 마녀의 신성한 맹세를 받아주소서. 서쪽마녀 오현아는 이 자리에서 제국의 황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서쪽마녀가 말하며 루디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신에게 하는 것처럼 경건한 태도였다. 붉은 입술이 하얀 피부에 닿자, 손등이 붉은 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

마녀가 한 나라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은 없었다. 적어도 리리샤가 들어본 적은 없다. 주변의 귀족들이 다들 놀라는 걸 보면 아마 보통은 없는 일일 것이다.

리리샤의 마음이 조금씩 흉포한 괴물처럼 부풀었다.

화가 난다. 너무 화가 나고 슬퍼졌다.

서쪽마녀의 행동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저 정도의 파급력이 없다는 사실이 분하고 괴로워졌다.

지금 마녀가 한 행동은 국내 귀족뿐 아니라, 후일 다른 나라에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마녀가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은 제국과 루디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정치를 모르는 리리샤조차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리샤에게는, 지금 당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해도 마녀가 방금 한 것 정도의 파괴력은 없다. 열 번 무릎을 꿇는다 할지라도, 분명히 턱도 없을 거다.

'내가 루디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그녀는 루디의 대단함을 깎아먹기만 하는게 아닐까.

남작 부인한테 한 번 물어봤더니, 다른 황녀들은 말을 배우기 전부터 매너를 몸에 익힌다고 대답했다. 황녀는 선생님을 부르기 전부터 어머니와 귀족 출신 시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리리샤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익힌 거라고 하면 염소젖을 짜고 토끼와 닭오리를 쫓아다니며 잡는 방법이려나. 그러고 보니 어릴 때는 벌레도 잘 잡았다.

출신 나라가 대단한 것도 아니다.

리리샤가 루디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펴고 있던 리리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조금씩 작아지는 리리샤와 달리, 서쪽마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데도 당당해 보였다.

서쪽마녀는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 것처럼 황제의 손가락에 잠시 입술을 묻고 있더니, 손을 잡은 그대로 몸을 아래로 내렸다.

루디의 손을 이마에 댄 채 깊숙이 몸을 숙인다. 서쪽마녀의 등이 우아하게 휘어졌다. 아름다운 여성의 선이라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걸 거다. 머리카락 하나, 척추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우아했다.

여전히 신경쓰지 않으면 매너를 잊어버리고,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통통 움직이는 자신과는 천양지차다.

더욱더 자신이 초라해졌다. 사라지고 싶어. 이 자리에서 작은 쥐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작게 만드는데, 루디가 고개를 돌렸다.

루디의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잡는다. 루디의 검은 눈동자에 유난히 강한 힘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초라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루디의 강한 시선이 허락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눈동자가 당겨지는 것 같다.

리리샤는 들리지 않는 말에 명령받은 것처럼 멍하니 루디를 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황후는 이리로."

루디의 목소리가 조용히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루디가 손을 내밀자 손가락 끝이 빛에 감기더니, 봉황 두 마리가 스르르 모습을 나타냈다.

봉황이 아름다운 빛을 떨구며 허공을 날아와 리리샤 근처에서 날개를 펼쳤다. 빛이 사방으로 뿌려지면서 리리샤 주변이 밝아졌다.

리리샤가 일어서자 봉황이 따라오라는 것처럼 그녀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봉황 두 마리가 번갈아가며 리리샤의 앞을 밝혔다.

조금씩 루디에게 새들이 빛을 뿌리며 다가가고, 리리샤도 이끌리듯이 그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가자, 루디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리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가락을 살짝 걸치자, 루디가 자신의 입가로 끌어올렸다. 리리샤의 손가락에 입술을 대며 루디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아, 역시 나는 이 남자가 정말 좋다.

루디가 살짝 리리샤를 당기더니 허리에 손을 감는다.

그대로 서쪽마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루디가 말했다.

"서쪽마녀여, 나의 황후에게도 충성의 맹세를."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루디의 즉흥적인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위한 연출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리리샤를 위해서, 루디가 귀족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서쪽마녀가 무릎을 접은 채 리리샤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루디가 시선을 보내자, 곁에 있던 레빈이 마녀의 손을 잡아 일어나는 걸 도왔다.

루디는 끝까지 서쪽마녀에게 닿지 않았다. 만일 리리샤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앞에 섰다면 더 큰 반응이 있었을 텐데, 먼지 한 톨 만큼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모두 다 리리샤 때문일 거다.

'미안해, 루.'

리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루디를 올려다보았지만 마음속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심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정말 미안해요. 볼품없는 나라서 정말 미안해.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미안해요. 나, 언젠가는 반드시 뭔가 도움이 될게.'

진심이다. 리리샤도 언젠가는 루디를 위해서 뭔가 할 거야.

'하지만 바람은 용서 안 하니까.'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만, 정말 마음이 괴롭지만, 그것과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리리샤는 루디의 팔에 허리를 안긴 채 마녀를 보았다.

절대로 당신한테 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마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뒤에야, 리리샤는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 대신인 것처럼, 마녀의 어깨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가만히 리리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움찔하자, 봉황 두 마리가 그녀를 지키는 것처럼 부드러운 날개로 리리샤의 몸을 감쌌다.

문득 발목이 따끈해서 밑을 내려다보자, 드레스 치마 여기저기에서 생쥐 제리와 마생물들의 얼굴이 쏙쏙 올라왔다.

너희들, 치마 속에 다 숨어있는 거야?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모두 그녀를 위해 몰려온 것 같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당신한테 까마귀가 있다면, 내게는 제리와 그 친구들이 있다구. 절대로 지지 않아. 와라, 마녀!

리리샤는 강한 눈빛으로 마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 서쪽마녀가 슬픈 표정을 지은 것 같다.

그 뒤 마녀는 조용히 연회장에서 물러갔다.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리리샤는 뒤에 서 있는 타이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거 있잖아, 유혹의 색, 남작부인이 버린 거. 그 입술연지가 혹시 남아있는 건 아닌지 방을 찾아봐 줘. 만일 시녀들 중에 가진 사람이 있다면 모두 버려. 반드시야."

"알겠습니다, 마마."

타이라가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잠시 뒤 연회장을 몰래 빠져나가는 시녀 몇 명이 보였다.

그 연지는 정말 재수 없는 물건이었다. 남작부인이 미리 버렸기에 망정이지, 아직 모두 가지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몰라.

***

마녀가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은 각국의 대사를 통해 빠른 속도로 다른 나라까지 퍼져나갔다.

그 이후, 왜인지 마녀와 관련된 문의가 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밀이 갑자기 시들기 시작했는데 마녀의 저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동물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일이 여러 번 발생하고 있습니다. 마녀의 저주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견을 부탁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죽은 벌레가 수십만 마리씩 떨어졌습니다. 마녀의 저주인 것 같은데...이하 동문.

처음에는 각국의 대사들이 이런 질문들을 모아서 은근슬쩍 물어보았는데, 점차 공식적인 문서로 오기 시작했다고 집무실 관리들이 푸념을 했다.

"이런 사소한 일은 본래 이쪽으로 건너오지 않는 건데 말입니다."

"다른 부서에서도 곤란한 거죠. 마녀와 관련이 되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가끔은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지 라든가, 일 년 뒤에 일어날 일을 가르쳐달라는 요청도 있습니다. 정말, 마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기가 막혀요."

관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쪽마녀가 사람들 앞에 나오는 일은 없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제국의 마녀다. 당연히 급여를 받고 거기에 상응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일이라고 해야 당분간은 거의 없지만.

처음 루디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관리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마녀를 관리처럼 부린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가 무섭다. 공연히 '나는 전생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급여와 제국의 공식 마녀라는 지위를 준다고 말했을 때 묘하게 우울해한 마녀의 반응을 생각하고, 루디는 문득 등이 서늘해졌다. 역시 제대로 급여를 주고 사무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 좋다.

현재 마녀에게는 전담 사무관이 한 명 배정되어 있었다. 마녀와 그들 사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조금 전 관리들이 말한 것들은 사무관이 먼저 확인한 뒤 정말로 마녀와 관련된 일이라고 판단하면 그제야 전달한다. 아직까지는 한 건도 전달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차를 마실 시간입니다."

시종장이 살짝 귀띔했다.

그 소리를 들은 근처 관리들이 능글맞은 얼굴로 싱글싱글 웃었다.

"이런, 폐하! 벌써 그런 시간이군요."

"마마께서 요맘때만 되면 황궁 복도를 뛰어다니신다고 합니다. 여기 오기 위해서지요."

"두 분이 화목하시니 우리 제국도 만만세입니다."

"하루빨리 후계자님이 태어나셔야 할 텐데요."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활짝 열리고 리리샤가 들어왔다. 새침한 얼굴의 리리샤 뒤에는 시녀 두 명이 차 수레를 끌고 서 있었다.

"모두 수고가 많군요."

리리샤가 의젓하게 말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이다. 축승 연회가 있은 후부터, 리리샤는 거의 매일 차를 가지고 집무실을 찾아왔다.

'나는 분명히 가끔이라고 말했는데.'

시종장도 아마 그렇게 전했을 것이다. 가끔 차를 가지고 집무실에 찾아오시면 좋겠다고. 그게 어째서 매일이 된 건지 원.

집무 책상 옆에 놓인 작은 원형 테이블에 찻잔 세트가 놓이고, 가운데에는 꽃과 종류를 알 수 없는 풀로 장식된 과자가 놓였다.

리리샤가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시녀들이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녀들이 알맞은 온도의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를 내밀었다.

리리샤가 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주전자에 든 물을 찻잔에 붓는 거.

리리샤가 신중한 태도로 작은 주전자를 들어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 뒤에 생긋 웃으며 말한다.

"폐하, 차 준비가 되었습니다. 드셔 보세요."

단지 그것뿐인데, 왜인지 리리샤도 시녀들도 굉장히 뿌듯해했다. 어쩌면 루디가 알지 못하는 것뿐으로, 차 우리는 데에는 큰 기술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주전자 기울이는 속도라든가, 각도라든가.

'그럴 리가 없잖아.'

루디는 쓴웃음을 짓고 찻잔에 손을 댔다. 리리샤가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 매일 똑같이 맛있다고 말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기쁜 건지....

생각하며 시선을 리리샤에게 주었던 루디의 동작이 멈췄다.

리리샤의 가슴은 어제보다 미묘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정작 루디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가슴이 아니라 허리였다. 왠지 처음 봤을 때보다 허리가 가늘어져 있지 않아?

고개를 들어 리리샤의 얼굴을 쳐다보자, 평상시보다 하얀 것 같다. 느낌 탓인지 숨도 약간 괴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함께 차도, 과자도 먹었지만 근래에는 루디 혼자만 먹는다. 리리샤는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리리샤가.

루디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리리샤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폐하, 맛이 이상했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리리샤의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잡았다.

"핫!"

리리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굳었다.

"폐, 폐하!"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폐하! 마마의 입장을 생각해 주세요."

뭘 착각했는지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루디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가느다란 허리를 더듬었다. 조금쯤 난폭할지도 모른다. 약간은 화가 나있었으니까.

"아, 루, 그건, 여기는 싫어, 루! 루!"

리리샤도 뭔가 착각한 것 같다. 집무실 안은 괴이한 침묵 속에 휩싸였다.

루디는 고개를 들어 리리샤의 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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