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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48화 (148/201)

#148 이번 전쟁에서 몸값은 필요 없다

가슴이 벌컥벌컥 뛰었다.

서쪽마녀는 목을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에 은은한 마력의 기운이 흐른다.

'노예 목걸이.'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딱 이런 시기에 약기운이 돌다니,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것보다는 조금 더 이르게 약이 돌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요. 모르셨나요? 마녀님이 먹는 식사에는 계속 적은 양의 약이 들어있었는데."

호위가 웃는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는 내용이 저런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까마귀를 의식한 말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긴, 눈이 안 보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보였다면 식사의 색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았을 텐데."

서쪽마녀는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돌멩이를 밟은 것 같다. 몸이 기우뚱하며 넘어갔다.

"어이쿠, 마녀님, 조심하세요."

호위가 서쪽마녀의 팔을 잡았다. 뿌리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굳었다.

노예 목걸이는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세계에 오고 성녀라고 불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목을 통과하는 뜨거운 기운, 피가 끓는듯한 고통, 오물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던 기억이 모두 되살아났다.

무섭다. 숨이 가빠졌다. 헐떡거리며 서쪽마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토할 것 같아.

호위가 친절한 음성으로 서쪽마녀의 귓가에서 중얼거렸다.

"이 약은 마녀님의 마력이 밖으로 새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요."

'이 남자, 알고 있구나.'

서쪽마녀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까마귀는 마생물과는 다르다.

시조가 만든 마생물은 인간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만, 까마귀는 본래 동물이다. 인간의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까마귀는 단지 서쪽마녀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까마귀는 마력에 실린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거기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은 거의 모르는 일이다. 극소수 동물을 부리는 마녀만이 알고 있었다.

호위가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국왕 폐하께서 많은 돈을 주고 마녀에게 약을 사서 보냈답니다. 이 세상의 마녀는 당신뿐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참으로 마녀는 신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력을 가두고 차단하다니, 보통 사람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지요."

잔뜩 굳어있는 서쪽마녀의 겨드랑이에, 호위가 부축하듯 손을 넣어 잡았다.

"서쪽마녀님은 다른 마녀에게 상당히 미움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질투했던 걸까요. 마녀들도 의외로 속이 좁아요."

호위가 마녀를 붙잡은 팔에 힘을 넣었다.

"마녀님의 능력은 지금 쓸 수 없으니 여기는 위험해요. 안전한 곳으로 갑시다. 아, 반항하지 말고 조용히 오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일개 호위가 아니라 왕족이죠. 마력소유입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목걸이는 내 마력으로 작동하죠."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가 부리로 그녀의 뺨을 콕콕 건드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주는 걸까.

도와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까마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어디에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의 목소리였다.

"생쥐다! 빛으로 만들어진 생쥐가!"

"으아, 다리가 무너져!"

"마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맙소사, 까마귀가 죽는다!"

호위가 몸을 급하게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생쥐라고 하면, 황제의 것을 말하는 걸 거다.

다른 때는 까마귀가 알려주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방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쪽마녀는 호위에게 잡힌 채 헛되이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벼운 그녀의 몸은 땅에 질질 끌리며 손쉽게 남자에게 잡혀갔다.

그때, 왕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건지, 아니면 뛰어온 건지 목소리가 거칠다.

"마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저 생쥐들을 처리해라!"

호위가 달래듯이 말했다.

"전하! 약기운이 방금 막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은 까마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며칠은 기다려야 합니다."

"뭐? 그렇다면 전쟁은 어쩌란 말이냐!"

왕세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하, 지금은 피할 때입니다. 마녀를 우리 손에 넣으면 기회는 또 있습니다. 마녀가 우리의 말을 듣도록 조련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약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폐하께서도 이미 그렇게 허락하신 일이니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느냔 말이야! 설마 이 일은 2왕자의 짓이냐! 아니면 3왕자? 나를 누르고 아버님 눈에 들려는 짓거리냐! 너는 대체 누구 편인 거야!"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싸운다. 서쪽마녀는 그 틈에 몸을 빼내려고 온 힘을 다해 호위의 몸을 밀었다.

그 순간, 어깨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짧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깍,깍,깍,깍,깍,깍,깍. 마치 경고하는 것 같다.

그녀의 지시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스스로 판단하고 도와주려는 걸까. 역시, 시조의 새는 특별하다.

주위에 있던 다른 까마귀들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허공을 메웠다.

"뭐, 뭐야! 당장 멈추게 해! 멈추게 해라!"

왕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세자의 비명소리가 뒤를 잇는다. 다른 사람들도 공격받는지,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쳤다.

호위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까마귀를 멈춰라. 안 그러면."

호위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목걸이가 뜨거워진다.

시작됐다, 시작됐다, 시작됐다, 시작됐다.

공포가 머리를 채웠다.

***

새까만 까마귀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분명히 저것이 마녀의 새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까마귀는 와토린구의 병사들이 아니라 그레데 왕국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자중지란이냐. 마녀도 저놈들도, 대체 전쟁 중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한겨울에 쳐들어오는 미친 짓을 하더니, 이제는 저희들끼리 싸운다.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루디의 시선이 성벽을 향했다.

'저것이 마녀가 만든다는 까마귀 다리인가.'

신기하다. 견우와 직녀가 만날 때 만든다는 오작교처럼, 까마귀가 땅에서부터 성벽까지 긴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고 있다.

루디는 미리 빛의 생쥐들을 와토린구 본성에 보내 놓았다.

그 생쥐들이 스스로 상황을 알고 달려온 건지, 아니면 보리스가 탐지하고 보낸 건지, 그들은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

빛의 생쥐들이 바닥을 이루는 까마귀를 공격해, 단단하게 서로의 몸을 이어 만들었던 다리 군데군데가 비어갔다.

썩은 나무다리처럼 구멍 난 까마귀다리 밑으로 그레데 병사들이 떨어졌다.

게다가 한 마리, 두 마리, 까마귀가 점점 다리에서 벗어나 날아가 버린다. 덕분에 까마귀 다리는 계속해서 구멍이 숭숭 생겼다.

다리를 떠난 새들은 곧바로 한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까마귀가 잔뜩 몰려 있는 곳이다.

까마귀가 점점 더 많이 모이면서 그곳에만 새까만 안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저기에 마녀가 있는 걸까.'

새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루디는 말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제국군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까마귀 안개에 가까이 다가가자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것이다.

[그만! 그만! 그만! 제발 그만!]

한국어다.

여자는 지구의 언어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고삐를 낚아 채자 흑마가 크게 울며 허공 높이 발을 굴렀다.

"가자!"

루디의 명령에, 말이 훌쩍 달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루디의 등장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레데 병사 몇 명이 흑마의 발에 차였다.

비명과 함께 고꾸라지는 적병을 무시하고 흑마가 도망치는 적병 사이를 달렸다.

까마귀 안갯속으로 뛰어들자, 새들이 두 명의 남자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남자 가까이에 은빛 머리의 여자가 쓰러져 있다.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여자의 목에는 노예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발동하고 있구나.'

이미 작동하는 목걸이는 해제가 불가능하다. 시전자를 다그쳐 푸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까마귀가 공격하는 남자 둘 중 한 명이 시전자일 것이다.

여자 가까이로 가자, 루디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두 명의 남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까마귀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으며 루디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루디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루디는 단칼에 그들을 베어넘겼다.

저격병이 루디 주변에 있는 적병을 하나씩 맞춰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루디의 근처로 제국군이 몰리자, 까마귀 공격을 받는 두 명 외의 적병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썰물처럼 적병이 물러간다.

"어느 놈이 시전자냐!"

루디가 벼락처럼 소리친 순간이었다.

마녀 가까이에서 날며 다른 까마귀에게 깍깍 소리를 지르던 새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곧바로 남자의 머리를 쫀다.

"그놈인가."

루디는 곧바로 달려가 시전자의 팔 하나를 잘라냈다. 시전자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일부 까마귀가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루디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공격하지 않는다.

새들이 빠르게 루디 주변을 돌면서 울기 시작했다. 마치 까마귀들이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일 처음 루디의 말에 반응해 시전자를 알려주었던 까마귀가 긴 부리를 딱딱 움직이더니 훌쩍 날아 그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접한 부위를 통해 마력이 전해진다. 마생물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루디의 마력과 거의 흡사했다.

루디는 다시 칼을 올렸다.

남자들을 공격하던 까마귀가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루디와 남자들 주변을 둘러싸고 푸드득 날갯짓하며 날아다닌다.

몸을 둥글게 말아 까마귀를 피하고 있던 다른 남자가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려 했다.

옷차림이 훌륭한 걸 보면 그레데 군의 총대장일지도 모르겠다.

루디는 칼의 방향을 바꾸어 거꾸로 쥐었다.

훌쩍 날듯이 총대장 앞으로 다가가, 날을 아래로 한 뒤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렸다.

죽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시전자가 이 남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칼은 남자의 허벅지를 찌르고 바닥에 박혔다.

검이 총대장의 살을 파고들어 단숨에 박히면서 뼈가 부러진 것 같다. 단단한 것을 끊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져왔다.

루디의 검은 가느다랗고 얇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무기를 치고 두드리는 유형의 두꺼운 검이었다.

찌르면 아프다. 물론 안 아픈 검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이건 강제로 몸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것과 마찬가지다. 찌르기 용의 얇은 검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총대장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루디의 시선이 총대장을 향해 있는 동안, 시전자가 잘린 팔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몸을 돌렸다.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까마귀를 통해 언뜻 영상이 보였다.

과연, 이런 식으로 마녀는 세상을 보고 있었나.

루디는 시전자를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칼을 그었다.

서걱, 뼈가 잘리는 감촉과 함께 시전자의 무릎 아래가 사라졌다.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루디는 남자의 앞에 우뚝 섰다.

다시 칼을 높이 든다.

"말을, 뭘 원하는지 말을 하십시오. 제발 말을 해 줘요!"

시전자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루디의 등 뒤에서는 계속해서 마녀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목걸이의 고통을 그치게 하라."

"그, 그렇게 하면 살려줄 겁니까."

루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전자를 내려보았다.

"너를 살려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고통 없이 단칼에 죽여줄 수는 있지."

"...."

대답이 없다.

그렇다면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루디가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남자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외쳤다.

"으아아! 아, 알았어요. 알았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해요."

남자는 흐느껴 울며 그레데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뒤를 돌아보자, 목걸이에 흐르던 마력의 빛은 사라져있었다.

하지만 마녀의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정신이 혼란해진 상태인지도 모른다.

마녀는 헛소리처럼 싫다든가 제발이라는 애원의 말을 중얼거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흐느꼈다. 축 처진 몸이 약하게 떨린다.

루디가 가까이 다가가 앞에 앉았지만,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마녀의 목에서 목걸이를 제거한 뒤, 루디는 다시 시전자의 앞에 섰다.

"...우...으...제발, 살려 주세요."

남자가 울면서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며, 약속대로 단칼에 목을 쳤다.

그 모습을 본 총대장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나, 나, 나는 그레데의 왕세자다! 우리나라에 요구하면 얼마든지 몸값을 지불할."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루디는 칼을 휘둘렀다.

이번 전쟁에서 몸값은 필요 없다.

제국은 침략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와토린구는 일시적이지만 제국의 땅이었다. 그곳을 넘어와 성을 공격했으니, 이것은 더 이상 카니아와 그레데 사이의 일이 아니다.

제국과 그레데의 전쟁이 되었다.

여름이 되어 밀 수확이 끝나면 전쟁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번에는 디코콰리아가 아닌 그레데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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