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마녀의 목에 걸린 것
드래곤과 만나고 이틀 뒤, 제국군은 와토린구 땅에 들어섰다.
와토린구는 여러 개의 도시와 산 강을 포함하고 있다. 광대한 땅이다. 보리스가 있는 본성까지는 아직도 며칠이나 더 진군해야만 했다.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는 오후가 되면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비가 내리면 진군하기 어렵다.
제국군은 무리하지 않고 일찍 자리를 잡아 천막을 쳤다.
'이제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와토린구를 넘어가면 암염이 있는 몬테스다. 그 주변에는 소규모의 영지가 약간 있을 뿐, 사실상 와토린구와 몬테스가 디코콰리아의 끝이었다.
루디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직 동도 트기 전의 일이다.
병사들이 깨어나 이른 아침 준비를 하고 천막을 치우기 시작할 무렵, 한 마리의 말이 제국군 진지를 향해 달려왔다.
말에는 먼지투성이가 된 병사가 타고 있었다.
병사는 며칠간 말만 바꾼 채 쉬지 않고 달렸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와토린구에서의 전언이오! 와토린구에서 보리스님이 보낸 전언이오!"
전령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목소리가 바짝 메말라 있다.
루디도 막 천막에서 나온 참이라, 멀리서 먼지와 함께 달려오는 전령을 보았다.
낯익은 병사였다. 여러 해 전, 와토린구에서 전 황제와 함께 있을 때 본 사람이다.
제국군 병사 중에도 그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지, 전령이 제국군 진지를 가로질러 들어와도 막지 않았다.
루디는 전령에게 달려갔다.
전령은 루디 근처까지 오자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마녀가 와토린구 경계를 넘었습니다."
전령은 갈라진 목소리로 한 마디만 하고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물! 물을 조금 먹여 줘라."
루디가 외치자, 한 병사가 허리춤에 있던 수통을 전령의 입에 댔다.
전령이 와락 가죽 수통에 달려들었다.
"조금씩, 천천히 먹여."
루디의 말에 수통을 들고 있던 병사가 입구를 조금 밑으로 내렸다. 전령이 다시 기침을 하며 몸을 구부렸다.
루디는 전령의 등을 툭툭 쳐주고 웃었다.
"수고했다."
기다리던 소식이다.
휘익, 휘파람을 불자 군데군데 말만 따로 묶어 두었던 곳에서 루디의 흑마가 달려왔다.
눈치 빠르게 보좌관이 루디의 칼과 망토를 가져와 내밀었다.
그것을 몸에 걸치고 훌쩍 말 등에 오른다.
"지금 당장 말에 오를 수 있는 병사만 쫓아와라. 나머지는 천천히 오면 돼. 나는 먼저 그레데 쥐새끼들을 잡으러 간다."
루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병사들이 서둘러 창칼을 잡으며 전장에 나갈 준비를 했다.
벌써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두 빠르다.
하지만 가장 빠른 것은 역시 루디의 호위병과, 함께 보리스에게 훈련받았던 마도병들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장하고 말에 올랐다.
루디는 힐끔 출전준비에 바쁜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흑마의 고삐를 당겼다.
흑마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위로 치켜들었다. 허공에서 발을 구른 뒤 냅다 달린다.
루디는 납작하게 말 등에 엎드렸다. 바람이 뺨을 치고, 긴 머리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날렸다.
'서쪽마녀.'
그녀는 루디처럼 지구에서 왔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루디만이 알고 있는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녀니 전부인이니 그런 걸 모두 떠나서, 루디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다시는 나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지구의 일상을 알고 있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어쩌면 먼 과거의 자신도 그래서 서쪽마녀를 계속 신경썼는지 모른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이 지구에 살았던 것이 단순한 망상이나 꿈이 아니라는 증거니까.
심장이 망둥이 뛰듯 세차게 움직였다.
***
그레데 왕국군은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몬테스의 영주성에서 떠나는 것도 늦었지만, 영주성에서 와토린구의 경계까지 가는 것도 매우 느렸다.
보이는 마을마다 들리고, 도착하는 도시마다 잔치를 벌였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서쪽마녀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황제가 너무 힘을 키우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빈둥빈둥하는 동안에도, 그의 힘은 계속 강해지고 있을 것이다.
너무 느리다고 왕세자를 한 번 다그쳤지만, 그는 원래 군대는 모두 이런 식으로 진군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진행하는 길마다 물자와 음식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병사들이 지쳐서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말했다.
정말 그런 걸까. 의심이 갔지만 군대나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다. 윌리엄이 있었다면 조금 나았으려나. 그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은 임무를 맡아 어디론가 떠나고, 그의 부하들도 서쪽마녀의 곁에서 사라졌다.
윌리엄 대신 호위를 맡은 사람과는 말을 섞기도 꺼려졌다.
무슨 영주의 부하라는데, 만날 때마다 몸을 더듬는 것처럼 끈적한 시선이 전신을 기어 다녔다. 마치 뱀 같다.
거리도 너무 가까웠다. 식사를 가지고 오거나 뭔가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더러운 숨이 얼굴에 부딪쳤다.
역시 바깥세상은 어렵다. 숲에서 혼자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알맞다.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져도, 시조가 없다면 그편이 좋다.
"하아."
자기도 모르게 나약한 숨이 나왔다. 신경이 곤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피곤했다.
그래도 어제 오후 와토린구의 경계를 넘어섰다.
거기부터는 까마귀가 돌아다니며 만든 결계가 있다. 마음은 여전히 초조하지만 겨우 홈그라운드에 들어간 셈이다.
'황제는 어디까지 온 걸까.'
궁금하지만 서쪽마녀에게 들어오는 정보는 적다.
윌리엄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에게 신경을 써서 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후우, 후우, 크게 숨을 쉬었다. 초조해하면 안 된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야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황제를 만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전에 급습했을 때 위치를 확정해서 실을 붙여놓았다.
'잘 될 거야.'
그녀에게 충실한 까마귀들이 곳곳에 마력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황제가 한 번이라도 그물에 닿으면, 붙어있던 실은 스스로 마력을 자아내 그물에 달라붙는다.
황제가 모르는 사이 마력의 그물은 서서히 그자의 몸을 얽어매고, 거미줄처럼 끈적하게 칭칭 그의 주변을 둘러싸며 고치를 만든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마생물과 황제는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잠깐 동안이겠지만, 서쪽마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서쪽마녀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둔하다. 생각이 저 멀리에서 혼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을 너무 썼나 봐.'
황제를 옭아맬 그물을 짜고, 까마귀로 성벽을 공격하는 데 마력을 너무 소모했다. 정신이 멍하다.
문득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밖에서 들렸다.
"마녀님, 잠시 뒤면 와토린구의 도시에 닿습니다. 이번에 도착하는 곳이 본성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조심해 주세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요 며칠, 그녀를 전담하는 호위는 계속해서 몸이 괜찮은지 물었다. 어쩌면 피곤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걸까.
"괜찮습니다."
"그래요. 혹시 몸이 안 좋아지면 곧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걸까.
하지만 생각하기가 어렵다. 너무 피곤할 때처럼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많이 지친 것 같아.'
조금 쉬면 괜찮을 거다. 마녀는 눈을 감았다. 어깨 위의 까마귀가 걱정스러운 듯 뺨에 부리를 대었다.
'괜찮아. 조금 피곤할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멍하다. 잠은 자지 않은 것 같은데 깜빡 졸았던 걸까. 밖에서 호위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와토린구의 성은 몬테스와는 분위기부터 다른 것 같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성벽 위에서 와토린구의 병사들이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그레데의 영주나 병사들도 술을 먹거나 흐트러진 자가 없다.
심지어 왕세자도 다른 때와 달리 멀쩡한 모습으로 전장에 나와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것 같다.
서쪽마녀는 평상시와 같이 약간 떨어진 장소에 서서 까마귀를 불러들였다.
마력의 감소 때문에 다소 적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까마귀의 수는 많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을 정도의 새떼가 성을 향해 긴 다리를 놓았다.
오늘은 어깨에 앉은 까마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영상이 유난히 또렷하다.
마치 이 지역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어 까마귀의 능력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성벽 위의 와토린구 병사들이 놀란 듯 웅성거리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몇몇 병사들의 머리에 작은 뿔 같은 것이 달려있다. 반짝반짝 빛난다. 어쩌면 그들은 다른 병사보다 월등하게 강한 사람일 거다.
까마귀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아마라고 생각하지만,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색상이나 모습이 조금 다른 것 같다. 피카소가 현실에 뭔가를 약간 더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분위기도 그들의 동작도 모두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거니까.
와토린구의 병사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몬테스의 병사들과는 달랐다. 겁먹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이며 까마귀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성벽을 위에서부터 내려다보았다.
성벽의 난간 가까이에 원통형의 커다란 나무통이 죽 늘어서 있다.
안에는 끓는 몰이나 기름이 들어있는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성벽 들쑥날쑥한 난간에는 나무통을 손쉽게 움직여 내용물을 부을 수 있도록, 통을 매다는 대가 줄을 지어 설치되어 있었다.
대에는 빠짐없이 나무통이 달리고, 그 뒤에는 여분의 나무통이 놓여있다.
까마귀가 만드는 다리에 대해 듣고 미리 준비를 한 모양이다.
일부 병사는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용히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어디에도 도망치거나 두려움에 떠는 병사는 없었다.
'디코콰리아와 제국의 군대는 이렇게 다른가.'
오래전, 시조는 제국의 황제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시조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주변 국가를 움직여 시조를 괴롭혔다.
시조가 진정한 위험에 빠진 적은 없었지만, 제국은 그를 죽이려 했던 적이다.
마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 없는 적의 모습이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아라, 마녀야. 네가 제국의 부름을 거절하고 제국을 미워해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너의 까마귀 따위, 우리 제국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제국의 병사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
마녀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후우, 후우, 깊은 곳에 있는 마력을 끌어올리자,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가 작은 몸에 가득 빨아들였다.
까마귀가 받아들인 마력은 곧바로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마녀에게만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이, 서로 몸을 뭉쳐 긴 다리를 이루고 있는 까마귀들의 몸을 감싸갔다.
얼핏 보면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마녀의 힘은 별것 아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오직 까마귀에게 마력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력을 띠고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시조가 마석가루로 주문을 써준 덕분이다.
온전한 마녀 자신의 힘은 하나도 없었다.
서쪽마녀가 알고 있는 문자는 점자뿐이지만, 그것은 이 세계에서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그녀 자신보다 유용한 것은 지구에서 들고 온 사탕 한 봉지였다.
그 사탕에 자신의 피를 묻히면 방금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만병통치약이 된다. 하지만 사탕을 모두 사용해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건 스스로는 사용하지도 못할 엄청난 마력뿐. 지구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그녀 자신은 여전히 쓸모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혼자 살아갈 힘을 주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시조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
그의 주변을 괴롭게 해 고통을 주고, 시조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제국이 밉다.
"까마귀들아, 내 말을 들어다오. 저 성벽 위의 병사를 죽여라. 그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두려워 떨게 만들어라."
서쪽마녀가 말하자, 다리를 만들지 않은 까마귀들이 모두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까악, 까악, 귀청이 떨어질 듯이 운다.
까마귀들이 성벽으로 몰려가 적병을 향해 떨어지듯 몸을 내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마녀가 우리를 돕는다!"
"적을 몰아버려라!"
그레데 왕국군 측에서 요란한 함성이 올랐다.
주저하던 그레데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 잡고 앞다퉈 까마귀 다리에 올라섰다.
병사들은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까마귀를 밟고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성벽 위에 있는 와토린구의 병사들이 커다란 방패를 들어 하늘에서 덮쳐오는 까마귀를 막는다.
나무통과 나무통 사이에서 활을 들고 있던 와토린구 병사들은 연이어 화살을 쏘았다.
그 틈에 양옆에서 나무통을 맡고 있는 병사는 대에 걸린 통을 앞으로 기울였다.
뜨거운 물과 기름이 쏟아져 까마귀와 그레데 병사들을 덮쳤다.
그것은 까마귀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데 병사들은 평범한 인간이다.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레데 병사들이 주춤하자, 몇몇 대장이 무기로 그들을 때리며 외쳤다.
"앞으로 가! 성벽을 넘어라! 도망치는 자는 죽이겠다."
그레데 병사들은 다시 성벽에 달려들어 일부는 떨어지고, 일부는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이 집요하게 제국의 병사를 노리며 방패 사이로 부리를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허공을 날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치 정신이 작은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까마귀와 의사를 소통할 수 없었다.
'어, 이게 뭐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호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마녀님, 괜찮으신가요? 몸이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자, 이리로. 이리 기대세요."
순간 눈앞을 비추던 영상이 끊어지고, 목에 뭔가가 찰칵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