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46화 (146/201)

#146 드래곤의 이름

눈이 녹고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제국군의 진군 속도도 빨라졌다.

그것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카니아 병사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을 가두고 있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카니아 병사들의 공포는 그들 전체로 퍼져 갔다.

누구도 제국군의 앞을 막지 않는다. 그저 등을 보인 채 도망만 칠뿐이다.

허깨비처럼 말라 도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백성의 모습을 뒤로하면서, 루디는 진군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어느새 전쟁의 끝이 보인다. 와토린구가 바로 코앞이었다.

*

횃불이 여기저기 밝혀지고, 제국군 진지에는 수많은 천막이 세워졌다.

이제 며칠이면 와토린구의 경계에 닿는다.

루디는 더러워진 몸을 욕조에 담근 채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그동안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서 여러 번 자신이 붙일 법한 이름을 불러보았다.

용가리, 투명 드래곤, 투드, 흑염룡, 흑염소, 레드 드래곤, 연쇄 살인마, 잭 더 리퍼....

어떤 것에도 드래곤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라고 하면 그 정도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데.'

루디는 먼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는 정말, 기억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심각하게 병을 앓았다.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냥 자살하고 싶어질 뿐이다. 영원히 암흑 속에 파묻어 버리고 싶어.

굳이 예를 들면, 구급상자에 있던 붕대를 풀어 팔목에 감고 거울을 보면서 대사를 읊는다던가, 무서워 부들부들 떨면서도 옥상 난간에 서서 아래를 보고 자작시를 읊는 정도.

아니, 아니, 지금 뭔가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을 떠올린 것 같다.

루디는 느긋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나, 심각하기는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설마, 그런 바보 같은.'

루디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따뜻한 물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나이가 돼서 그걸 해야 하는 건가.'

어쩔 수 없다. 부끄러워도 해보는 수밖에.

루디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어릴 때 거울 보고 하던 대사를 읊었다.

"훗, 너희들 앞에서 이런 꼴로 미안하다. 하지만 이건 그대들을 위해서야. 내 왼팔에는 흑염룡이 잠들고 있어서 말이지."

아무 일도 없다.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여를 보지 마라. 내 안에서 날뛰는 메두사의 피가 너희 눈을 멀게 할 것이니."

아닌가 보다.

"지금 당장 네 숨을 앗아갈 수도 있지만, 인간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는 건 금지되어 있다. 다행으로 여기면 좋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말해보았지만 드래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대사가 이름이 아니라서 안심한 건지, 아니면 불러내지 못해 아쉬워하는 건지 모를 감정이 잠시 생겼다 사라졌다.

'뭐, 당연한 거지. 아무리 내가 바보 같았어도 그런 대사를 이름으로 붙였을 리는 없지. 정말 멍청한 생각을 했네.'

그 뒤에는 평상시와 같았다.

보좌관이 정리를 하고, 따뜻한 물을 가죽 수통에 가득 부어 천으로 한 번 감은 걸 침구 속에 넣어준다.

겨울이 아니니 이제 그런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보좌관은 이곳에서 사용하는 모포는 얇다며 여전히 뜨거운 수통을 준비했다.

모포를 덮고 누우면, 수통 덕분에 금세 몸이 따끈해졌다.

눈을 감자, 두꺼운 천막을 사이에 두고 병사들이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목소리, 발소리, 무기 쩔렁이는 소리.

몇 달 사이 익숙해진 소음을 들으며, 루디는 이내 잠이 들었다.

한참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의식이 물에 잠긴 것처럼 고요한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주인이 돌아온 것은 아닐진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쁜 듯, 슬픈 듯, 마음을 뒤흔드는구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확 정신이 깨어났다.

눈을 뜨자, 드래곤이 바로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래곤."

[그대는 주인의 마력을 두르고, 주인이 했던 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주인이 알고 있던 것을 알고, 내 주인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한다.]

드래곤이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야.]

루디는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하지만 드래곤이 앞발로 누르듯이 올라타고 있어서 움직이기 어렵다.

"일단 좀 비켜줄래? 무거워."

[아, 미안하다.]

드래곤이 당황하면서 몸을 약간 비켰다.

하지만 여전히 움켜쥐는 것처럼 루디 몸에 걸쳐진 모포를 잡고 있었다. 마치 루디에게서 떠나기 싫어 그러는 것 같아 보였다.

왠지 첫인상과 다르다.

처음 봤을 때는 어른스럽고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조금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루디가 빤히 보고 있으니 드래곤이 고개를 약간 외면했다.

[주인과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마라.]

"미안. 내가 예전에 이렇게 보곤 했어?"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주인이 아니야.]

드래곤의 말은 이상하다. 같은 사람이면 주인인 거지, 뭐가 아니라는 걸까.

그렇게 묻자, 드래곤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꺼풀을 여러 번 껌벅였다.

[우리는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과는 다르다. 실체도, 영혼도 없다. 파괴되어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이야.]

드래곤이 약간 슬픈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억이 다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지 않으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우리의 누군가가 죽어도 주인이 기억하고만 있다면 살려낼 수 있지.]

드래곤이 루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대가 주인과 같은 기억을 가지고 같은 마력을 두르고 있다 한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속에 내 주인은 없는 거다. 우리에게는 기억이 바로 영혼이요, 몸이니까. 기억이 없는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야.]

"...."

드래곤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아기 코끼리 점보는 그런 생각 따위는 손톱의 때만큼도 하지 않고 루디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말은 번드르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단순하게 드래곤이 받아들이기 싫은 것뿐이다. 자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어린애 같은 이유 하나로.

'한마디로 삐진 거잖아.'

이름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자신이 붙인 이름을 의식하고 드래곤을 보니, 하는 말마다 행동마다 왠지 어리게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역시.'

처음 마생물을 만들 때 붙이는 이름은 의미가 있다. 봉황이 우아하고 의젓한 성품을 지니고, 점보가 아이 같은 성격인 걸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싫어하겠지.'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로 앉았다.

드래곤이 흐흥, 하고 웃으며 긴 꼬리를 앞으로 감아 탁탁, 바닥을 쳤다.

[그대의 마생물이 모두 몰려와 있군.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경계한다. 주인이 위험해지면 몸을 아끼지 않고 덤빌 생각인가. 그렇게 해 봐야 나를 이길 수 없을진대.]

봉황과 생쥐들이 모두 루디의 몸 주변에 있는 모양이다. 기색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인지, 루디로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잔뜩 멋을 부리는 드래곤의 말투가 웃긴다.

'역시 이 녀석 어려. 중2병인 것 같아. 이름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드래곤을 보자,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외면하며 말했다.

[주인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구나. 웃지 마라.]

하하. 예전의 자신도 드래곤을 볼 때마다 중2병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웃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드래곤은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는다고 화를 냈다고 했지.

기억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드래곤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엉거주춤 허공에 앉아있지 말고 이리 와."

루디가 침대를 탕탕 치자, 드래곤이 약간 주저하다 살짝 걸터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을 잘 듣는다. 주인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름 불렸다고 쫄랑쫄랑 달려왔고.

"마녀에 대해 좀 알려 줘. 그 여자가 내 부인이라고 들었는데, 진짜야?"

[그녀가 인간 세상에서 부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죽은 뒤 그녀가 있을 곳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주인은 한 번도 마녀를 진정한 아내로 삼은 적이 없어.]

마생물은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그것은 오래 살아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드래곤도 마찬가지여서, 몸의 관계가 전혀 없었던 마녀는 주인의 아내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드래곤의 말에 따르면, 마녀가 부인이 된 것은 겨우 죽기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힘든 상황에 빠져 있던 그녀를 구해 보호하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주인이 마녀를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그저 불쌍히 여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마녀가 나를 미워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왜 죽이려고 해?"

[죽이려 한다고?]

드래곤이 놀란 듯 루디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마녀는 주인을 사랑했다. 그대를 죽이려 할 리 없어. 그녀는 나와 달리 그대의 기억이 없어도, 아!]

드래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왜?"

[마녀는 그대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어, 어째서?"

[우리의 목소리는 마녀에게 닿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을 뿐이야.]

마녀가 드래곤에게 뭔가 물으면,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드는 것으로 대답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마녀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주인의 진짜 부인도 아니면서 부인이라고 자신을 말하는 마녀가, 드래곤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원에서 그대를 떠난 뒤 마녀를 만났지. 그녀가 내게 주인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다.]

드래곤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뒤, 마녀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둘 다 너무 실망해서 뭔가 더 물어보거나 더듬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아,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죽을 뻔한 건가.'

한숨이 나온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혹시 노예 목걸이를 해제하는 방법 알아?"

[그것은 할 수 없다. 이미 작동하기 시작한 목걸이는 주인도 해제할 수 없었다.]

드래곤은 조용히 말하고 힐끔 루디의 주변을 보았다.

[내가 더 머물면 그대의 마생물이 괴로울 것 같군. 한껏 나를 경계하느라 힘을 너무 사용하고 있어. 이만 가봐야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드래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떠나기 싫은 건지, 힐끔힐끔 루디를 보았다.

루디는 손을 뻗어 드래곤의 몸을 건드렸다.

[....]

드래곤이 움찔한다. 몸을 피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쓰다듬듯 피부를 만지며 내려간다. 확실히 뭔가가 만져졌다.

간지러운 듯 드래곤이 몸을 약간씩 움찔거렸다. 그래도 루디의 손길을 피하려는 행동은 없었다.

"너의 몸은 무엇으로 만들었어? 그냥 마잉크로 쓴 게 아닌 것 같은데."

[주인은 마석을 부수어 그 가루 위에 글자를 썼다. 글자를 이루던 가루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확실히 그렇게 하면 적은 양의 가루 덕분에 실체를 가지면서도 투명해 보일 수 있겠다. 글자에 들어가는 마석 가루의 양은 매우 적을 테니까.

[그대의 마생물도 그렇게 만들고 싶다면 하면 된다. 주인의 기억이 있는 한, 마생물은 어디에 그 몸을 옮겨도 여전히 똑같이 되살아나니까.]

드래곤의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들렸다. 루디의 곁에 있는 마생물이 부러운 건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함께 웃고 즐거워하던 주인이 없으니까.

"내가 죽어서 미안해. 아마 너희들을 만들 때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

드래곤이 가만히 루디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도 없는데 왠지 그의 얼굴이 울고 있는 것 같다.

살짝 코를 만지자, 드래곤이 말했다.

[어째서 주인과 똑같은 말을 하느냐.]

"미안."

[우리는 괜찮다. 우리는 망각하지 않는다. 천 년 전 일도 어제처럼 기억할 수 있어. 그러니 괜찮아. 그대가 어제 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인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건 좀 슬픈 일이 아닐까.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건.

"미안해."

[...정말, 주인과 똑같은 말만.]

드래곤은 잠시 가만히 루디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나려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드래곤의 이름은 뭐였을까? 너무 많이 불렀기 때문에 뭐가 이름인지 모르겠다.

루디는 드래곤이 막 날갯짓을 시작할 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느 게 이름이었어?"

[...말해주지 않는다. 분명히 그대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을 테니까.]

하하.

루디가 웃자, 약간 토라진 것처럼 드래곤이 고개를 외면했다.

드래곤이 가고 난 뒤, 천막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밖으로 나가면서 몸을 투명하게 했는지, 드래곤을 눈치챈 병사는 없는 것 같다. 바깥은 조용했다.

지금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마생물을 만들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이 없어진 세상에서 외롭게 기억만으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어두운 천막 안에 작은 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봉황과 생쥐들이 볼록볼록 허공에서 빛을 뿌리며 톡톡 얼굴을 디밀었다.

이 아이들도 드래곤이나 점보처럼 그를 그리워하게 될까.

"미안해."

루디가 중얼거리자, 빛의 생물들이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리며 주변을 둘러쌌다.

'힘내서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해야겠다.'

자신이 시조였던 당시에는 아마 환생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 대책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알고 있는 지금은 이 아이들을 두고 무책임하게 그냥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너희들이 나를 찾아 줘. 내가 너희들을 찾는 건 힘들지도 모르니까."

네, 네, 마생물의 빛이 깜박깜박 점멸하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역시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면 좋겠다. 이 아이들이 외롭지 않도록.

"...."

앞으로 며칠 뒤면 마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만나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날은 새벽이 깊어지도록 다시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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