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45화 (145/201)

#145 분노의 정령이 사는 산에서

제국군은 어느새 디코콰리아의 반을 훌쩍 넘어 진군하고 있었다.

특별히 한 성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 할 만큼 적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이나 근무지에서 이탈한 카니아 병사들을 추적하고, 곳곳에 출몰하는 도적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이쪽이 더 성가시다.

눈에 띄게 한 곳에 자리 잡는 것도 아니고, 도적이 된 카니아 병은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떠돌았다.

오늘 어디에 있다고 정보를 들었는데, 열흘 뒤에 가보면 이미 그곳에는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기를 들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수색은 생쥐들도 가능하다는 점이었으려나.

눈이 녹기 시작해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생쥐들이 대활약을 했다.

*

루디는 말을 탄 채 마을 입구로 들어갔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사방에서 제국군 대장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서 도적이 도망치다 칼에 맞아 쓰러지고, 제국군 병사가 집안으로 뛰어들어 무기를 휘둘렀다.

루디는 말을 몰아 천천히 큰 길을 지나갔다.

우당탕, 건물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도적 몇 명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눈이 반쯤 풀렸다.

한 놈은 바지도 벗고 있었는지 한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있었다. 다른 놈들도 옷차림이 단정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무기를 들고 루디를 보았다.

한 녀석은 엉뚱하게 루디 옆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 안 보이는지 눈을 부릅뜨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쳤다.

"어느으으 노옴이느으냐아!"

"비러머그을."

"주거!"

'이놈들이 대장급인가.'

루디의 흑마가 가볍게 도약해 도적떼를 스치면서 빙글 돌았다.

칼을 내리치자, 도적들은 맥없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가, 몸과 반대 방향에서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술에 취하면 자신의 죽음까지 느리게 깨닫는 건가.

썩은 동태같은 눈동자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끔벅거렸다.

루디는 힐끔 머리에 시선을 준 뒤 말을 몰았다.

마을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는데, 벌써 여기저기서 정리가 끝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은 크고, 이리저리 복잡한 골목 사이로 집도 많다.

하지만 일사불란하게 구획을 나누어 움직이는 병사들의 솜씨는 상당히 빠른 것이었다.

도적떼 정리는 순식간에 끝나갔다.

루디는 언덕진 곳으로 올라가 피바다가 된 마을을 바라보았다.

"...."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마을 전체에 지저분한 물감을 부어놓은 것 같다.

도적의 침입을 받은 다른 마을도 그다지 사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곳은 그중에서도 심각했다. 처참하다.

도적떼가 계속해서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던 탓이다. 마을이 커서, 처음에는 카니아 군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확인해 보니,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떠돌다 모인 탈주병들이 모여 만든 도적떼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놈들은 많아진다. 마음이 급해졌다.

"봄이 올 무렵에는 끝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더디구나."

루디가 중얼거리자, 곁을 지키던 보좌관이 빙긋 웃었다.

"폐하, 지금도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릅니다. 이제 겨우 몇 달, 이 정도로 타국을 빨리 정복한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하지만 여름이 시작되면 밀 수확이야. 그전에 나라를 안정시켜야지, 잘못하면 안 그래도 헐벗은 나라가 그야말로 아귀 지옥이 될 거다."

봄이 되면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어린 밀에 이삭이 달린다.

전쟁이 계속되어 군마와 병사가 그 밭을 망치게 되면 그야말로 올겨울에는 너도나도 굶어죽을 것이다.

전쟁이 이어져 죽어나가는 남자의 수가 늘어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카니아 병사를 몰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그 뒤가 문제였다.

농기구를 보급하고 농사지을 남자를 확보해야 한다. 병이 돌지 않게 시체를 처리하고 백성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늦어도 봄에는 끝내야지."

어떻게 해서든 수확기인 여름이 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뺨을 스쳤다.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봄이라.'

피비린내 나는 이 전쟁터에도 봄이 오는구나.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마을 입구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병사들을 이끌고 온 대장이 서둘러 언덕을 올라왔다.

아는 얼굴이다. 한창 추울 때, 점령한 도시에 남겨두고 왔던 군인이었다.

대장은 언덕 위로 올라오자 피곤이 베인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띠었다.

"폐하! 제국에서 관리들과 도시를 방어할 병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아, 드디어 왔구나."

루디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디코콰리아를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이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도시를 운영할 수 있는 관리가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시급히.

현재 이 나라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제국에서도 유능한 관리는 항상 부족하다. 현재 일하고 있는 관리를 빼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루디는 두 종류의 관리를 디코콰리아로 불러들였다.

경험은 많지만 나이가 많아 은퇴한 사람과, 젊고 아이디어는 좋은데 아직 경험이 없는 신참들이다.

그들은 제국에서 면접을 통해 각자의 성향과 능력을 적절히 조합해 함께 일할 사람들이 정해진 상태였다.

앞으로는 경험 많은 자와 없는 자가 적절히 섞여 각 도시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소 실험적인 운영도 허락되어 있다. 이곳에서 성공하면 그 제도는 제국에서도 쓰이게 될 예정이었다.

새 관리들과 함께 온 병사들은 루디가 이끌고 있는 노예병과 달리 제대로 월급을 받는 병사들이다.

다만 은퇴를 앞둔 자들이었다.

처음 일 년 정도는 제국에서 그들의 월급을 지급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쪽 도시에서 나오는 것으로 충당하게 된다.

'그들이 잘 해주면 좋겠는데.'

마을 곳곳으로 퍼져 숨어있는 도적떼를 처리하던 대장들이 속속 언덕 위로 올라왔다. 이제 대부분의 도적이 정리된 것 같다.

대장들의 보고에 따르면, 마을 남자들이 많이 죽은 모양이다. 제국군이 떠나면 또다시 도적의 침입을 받을지 모른다.

루디는 우울한 마음을 감추며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모두 수고했다."

일일이 병사들에게 한 마디씩 건네 수고를 치하하며, 루디는 제국군을 이끌고 다시 마을을 떠났다.

동으로, 동으로, 전쟁의 끝을 향해, 병사들이 고린내 나는 신발을 절그럭절그럭거리며 걷는다.

봄 오는 향기에 섞인 고약한 냄새가 서둘러 전쟁을 끝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윌리엄은 왕국군을 떠난 뒤 서둘러 기습군과 약속이 되어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와토린구와 그레데 경계에 있는 지점이다.

그곳은 국경이 와토린구 안쪽으로 치우쳐 있다. 산을 타고 가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와토린구 본성으로 갈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약속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윌리엄은 연락병에게서 산 밑에 마을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습군을 안내하기로 했다는 사냥꾼이 사는 마을이다.

그곳으로 가서 산을 안내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모두 머리를 저었다. 사냥꾼이 아닌 이상은 눈 덮인 산은 힘들다는 것이다.

노인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 산은 아주 높지도 않은데 봄이 되어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분노의 정령님이 사시는 곳이라 나쁜 사람이 들어가면 천벌을 받습지요. 때로 아무도 모르는 죄를 분노의 정령님이 알려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산에는 사냥꾼이 드나드는 것이 아닌가?"

노인이 두려운 듯 눈을 내렸다.

"그 사냥꾼 가족은 허락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몇 년 전 아무도 모르게 남의 집 여자와 정을 통한 적이 있지요. 정령께서 그것을 아시고 벌을 내려 죽어버렸습니다. 건강하던 사람이었는데."

노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고 말했다.

"아무도 몰랐던 일이라 그 사람이 덜컥 죽고 촌장이 마을 사람을 쥐잡듯이 뒤지며 캐물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그 사람의 죄를 알게 되었지요.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정령님의 분노를 삽니다."

노인의 말에는 왠지 기묘한 현실감이 있었다. 정령이 분노할 때는 산이 울린다는 것이다. 때로 지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착한 사람, 혹은 회개하거나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에게 분노의 정령은 과일을 내린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보기 어려운, 산속 깊은 곳에서만 나는 과일이 모르는 사이 근처에 놓여 있으면 그것이 정령의 선물이라고 했다.

실제로도 과일을 받은 산적이 마음을 고쳐먹고 이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약간 꺼림칙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윌리엄은 제법 많은 돈을 내놓았지만, 마을 사람은 아무도 산을 안내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윌리엄은 장비만 돈을 주고 빌려서 혼자 산에 올라갔다.

장비라고 해봐야 별것 아니다.

나무를 휘어 만든 커다란 신발을 발밑에 끈으로 묶어 신고, 물과 약간의 음식이 든 가방과 짐승의 털로 만든 조끼를 챙겼을 뿐이다.

산을 오른 뒤에는 마을 사람에게 들은 경로를 더듬어 갔다.

두꺼운 짐승 털 조끼를 걸쳤는데도 춥다. 뼈가 얼어 덜그럭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쉬는 것보다 계속 걸어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편했다. 멈추면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습군의 흔적을 처음 발견한 것은 산에 들어간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바로 이웃한 곳이 나무라 땅이라고 생각했는데, 밟고 보니 살짝 눈만 덮여 있었다. 눈이 허공을 덮고 있었던 거다.

간신히 나무뿌리를 잡고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그때 눈 속에 묻혀 있는 물건을 보았다.

병사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짧은 칼이었다.

자신도 안간힘을 쓰고 올라가는 중이라 뭔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겨우 칼이 있는 것만 확인했다.

그 이후 더욱 주의깊게 살폈다.

다음 날에는 나무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얼어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그레데 병사였다.

그리고 다시 한 명, 또 세 명.

낙오되어 길을 잃고 헤맨 건지, 본대에서 도망치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윌리엄은 더 깊이 들어갔다.

다음 날 눈으로 덮인 길목 한쪽이 이상하게 낮은 것을 발견했다.

조심조심 눈을 밟아보니 이곳 역시 낭떠러지였다. 낭떠러지 위에 눈이 쌓여 길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데 그 근처에 병사들의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불길하게 가슴이 뛰었다.

몇 시간에 걸쳐 눈을 헤치고 털어 아주 조금이지만 낭떠러지 밑을 볼 수 있었다.

바닥까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저 밑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래로 깊어지는 비탈 곳곳에 시체가 있었다.

안내인이 있었는데도, 기습군은 이상한 길로 접어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설마, 모두 죽었나.'

그래도 누군가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전부 죽었을리는....

생각하던 윌리엄은 여기 오는 길에 본 시체를 떠올렸다.

그들은 한 명, 혹은 서너 명씩 이곳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바로 윌리엄이 올라오던 길목으로.

'생존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들이 살아남은 병사들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본대가 거의 전멸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산을 내려가려고 했던 거다.

'어쩌면 여기 떨어진 병사들도 도망치는 중이었던 건지 몰라.'

하지만 오랜 산행으로 음식이 떨어졌을지 모른다. 동상에 걸렸거나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걷지 못했던 걸 수도 있었다.

'며칠만 더 걸으면 되는데. 그러면 산을 내려갈 수 있었을 텐데.'

윌리엄은 몸을 돌렸다.

조용하기만 한 산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허둥지둥 걷다 미끄러진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발이 맞물리지 않고 헛돌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밤이다.

마을 사람이 밤에는 움직이지 말고 반드시 불을 피우라고 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고 하늘을 보니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서둘러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렸다. 부싯돌을 꺼내야 한다.

'서둘러야 해.'

어디에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하다 팔꿈치로 짐을 건드렸다. 짐이 넘어지면서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런."

가방 안에 부싯돌이 없다. 쏟아진 물건에 부싯돌도 있었던 모양이다. 눈이 두껍게 쌓여 부싯돌을 찾기가 어려웠다.

바닥을 더듬거리는 동안,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산에서는 해가 지는가 보다 생각하면 곧바로 캄캄한 밤이 된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 없었다. 낮과 밤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 울음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아무리 단련한 사람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늑대를 당해낼 수는 없다.

마치 자신이 어느 만큼 왔는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늑대 울음소리가 바로 뒤편에서 들려왔다.

한 마리가 아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많다.

울음소리는 어느새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아,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다면.

윌리엄은 보이지 않는 늑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쩌면 자신은 마녀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약간의 호감은 있었다.

그렇다면 한 마디쯤 그녀에게 그런 마음을 전해볼 걸 그랬다.

싸울 태세를 갖추는데, 늑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바로 앞에 닥쳐왔다.

다음 순간, 소리가 나는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커다란 짐승이 덤볐다.

윌리엄은 날카로운 이빨에 몸을 뜯겨 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앞에서, 뒤에서, 사나운 짐승이 덤벼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남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연약하게 들렸다.

역시, 태어날 장소를 잘못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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