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마생물이 반항기에 돌입했다.
마녀가 자신들 편에 있다는 사실은 그레데 왕국군의 사기를 있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거기에 비례해 적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적병은 실력을 펼치기는커녕 까마귀 떼를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쁘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그레데 왕국군이 가지고 있는 실력 이상의 승리를 가져왔다.
마녀가 합류한 뒤 지금까지 왕국군은 연전연승이다.
그 기세를 몰아, 그레데 왕국군은 현재 몬테스의 영주성이 있는 도시 근처까지 쳐들어와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면 서너 시간 안에 영주성에 도착한다.
하지만 영주성을 코앞에 두고, 그레데 왕국군은 진군을 멈춰 버렸다. 가는 길에 발견한 마을에서 머물고 있다.
'이게 무슨.'
윌리엄은 마녀의 마차를 호위한 채 마을 한쪽에 우뚝 서 있었다.
마을로 들어온 왕세자는 곧바로 여자들을 모아 몇 명을 데리고 촌장 집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던 영주들까지 마찬가지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자와 술을 강탈해 근처 집을 찾았다.
'적진이 바로 앞인데.'
있을 수 없다. 그레데 왕국군이 썩었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위가 썩으면 아래도 마찬가지다.
병사들도 윗사람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하지만 그걸 막을 사람이 없었다. 막아야 할 자들까지 모두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윌리엄은 비참한 비명에서 고개를 돌렸다.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보는 부하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마녀님의 마차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
윌리엄은 마을 안에 들어와 있던 마차를 다시 외곽으로 옮겼다.
이런 난장판 속에 있는 것보다는 소리가 덜한 외곽 쪽이 나을 것이다.
만일을 위해 마을 근처를 한 바퀴 수색했지만 다행히 근처에 적은 없었다.
만일 있다 해도 마녀의 까마귀가 있으니 큰일은 없을 거다.
호위병보다 까마귀가 더 믿음직한 것은 조금 우울한 일이지만.
그날 밤, 마을에서는 밤이 새도록 사람들의 비명소리, 술 먹고 난동 부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차 안에서 가끔 마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 싫어.
윌리엄은 마차를 조금 더 외곽으로 옮겼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녀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본래는 영주성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왕세자가 숙취로 일어나지 못했다.
하루 더 쉰 뒤에야 영주성을 향해 출발했다.
진군하는 와중에 몇 명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성 공략은 순조로웠다.
까마귀가 만드는 길은 어느새 이곳에도 소문이 닿아있었던 것 같다.
까마귀가 하늘을 뒤엎을 듯이 몰려가 성벽에 긴 다리를 만들었어도, 기름이나 끓는 물을 부으려는 사람조차 없다.
몇몇 대장으로 보이는 적병이 소리치며 싸울 것을 촉구했지만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그 적병조차 스스로 까마귀 길을 파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부하들을 다그치며 외칠 뿐이다.
병사들이 까마귀 길을 밟고 성벽을 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순식간이었다.
카니아 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바쁘고, 기세가 오른 그레데 왕국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암염 지역을 손에 넣었다.
전투가 끝나자 요란한 함성 소리가 온 도시가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윌리엄은 자신만만한 왕세자와 영주들의 모습을 보고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우리는 정말 승리한 걸까.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게 맞는가?
저 멀리에서 제국군이 다가오고 있다. 진정 그들을 이길 수 있는가.
이곳은 디코콰리아의 끝이다. 제국군이 있는 곳에서 멀어, 그들의 소문은 닿지 않는다.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국군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레데 왕국군에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이기고 있겠지.'
당연하다.
와토린구를 지키는 적은 수의 병사조차 저렇게 강한데, 제국의 대군이 그레데가 이기는 적을 못 다룰 리 없다.
게다가 이쪽에 마녀가 있듯이, 저쪽에는 황제가 있으니까.
'마녀는 황제를 이길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녀가 부리는 저 수많은 까마귀가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마녀가 황제를 노리는 것은 분명하니, 까마귀 외에도 뭔가 방법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지금에 와서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 와토린구의 산 쪽으로 향했던 기습군과 접촉하려던 연락병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본래 약속한 장소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혹시 몰라서 산 근처까지 가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 보고를 듣자, 왕세자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이유가 있으니 못 나왔겠지. 바보 같은 말이다.
산에 누군가를 보내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누군가 제안했다고 하는데, 왕세자가 묵살했다고 들었다.
땅은 눈이 거의 녹았지만, 아직도 산은 한겨울이다. 그런 상태의 산에 오르는 건 안내인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은 안내인 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원인도 모르는 상태로 산의 기습군과 연락이 끊겼다.
그 뒤로, 윌리엄의 마음에는 살얼음처럼 불안이 끼어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했다.
누군가가 모두의 눈을 가리고 사람들에게 질 나쁜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윌리엄은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현실성이 없다.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역시 지나쳐. 너무 지나치게 이겼다.'
어느새 그들은 현실이 아닌 곳에 서 있었다. 마녀가 만들어낸 환상 속, 언제든지 바닥이 무너질 것 같은 그런 장소에 와 있었다.
*
왕세자가 그를 부른 것은 도시를 함락한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영주성에 틀어박혀 있던 왕세자는 얼큰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윌리엄이 들어가자 호쾌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윌리엄! 어서 와라. 그대는 여자도 마다하고 수도승처럼 마녀만 지키고 있다고 들었어. 그러다 소중한 곳이 썩어버린다. 평상시에 사용하지 않으면 어느새 아무 데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야."
이런 음담패설까지 할 정도면 상당히 많이 취한 모양이다.
왕세자 주위에는 영주도 몇 명 있었다. 아마도 회의 중이었던 것 같다. 테이블에는 지도도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 취해 있었다. 붉은 얼굴로 실없이 웃는다.
윌리엄은 왕세자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문 앞에 섰다.
"이리 와! 자자, 이리로."
왕세자는 그를 영주들 가까이로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자, 왕세자는 자기 옆자리를 탕탕 쳤다.
"여기 앉아라."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왕세자 전하 옆에 함부로 앉을 수는 없습니다."
"정말 딱딱한 놈이로고."
왕세자는 큰 소리로 웃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여 탁자에 팔을 올렸다.
"그래, 좋다, 좋아. 이야기하는데 꼭 옆에 앉을 필요는 없지. 윌리엄, 우리 왕국군은 와토린구 본성을 치기로 했다."
"...."
"하하하. 놀랐다, 놀랐어. 이봐, 윌리엄이 놀라고 있다. 하하."
그야 당연히 놀랐다. 왕세자가 설마하니 당당하게 와토린구를 공격하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우리가 왜 와토린구로 가지 못하고 몬테스로 향한 건지, 왕세자는 잊어버린 건가.
그 이후 와토린구의 병사들이 보여주었던 마도병기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왕세자는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깟 막대기에서 나오는 빛쯤, 마녀의 까마귀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쥐 한 마리가 눈에 띄면, 보이지 않는 곳에는 수백 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국군이 가지고 있는 게 막대기 형의 마도병기 하나뿐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게다가 마녀의 힘은 약해지고 있다.
서쪽마녀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얼핏 보면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마녀는 힘들지 않게 까마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다리를 유지하는 시간이 약간 줄어들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까마귀의 수도 약간 줄었다. 까마귀 다리의 폭이 미세하게 좁아져 있었다.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마녀 하나만 믿고 와토린구를 치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
"왕세자 전하,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마녀는."
윌리엄이 말하려는데, 왕세자가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윌리엄, 반론은 받지 않는다. 이건 명령이야."
그리고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죽였다.
"네가 산으로 향했던 기습군과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해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에게 임무를 주마. 내일 너는 그곳으로 떠나. 산으로 가라. 기습군과 만나서 와토린구를 칠 날짜를 정하고 와."
"전하. 하지만 마녀는."
윌리엄이 거듭 말을 꺼내자, 왕세자가 큰소리로 웃으며 옆에 있는 영주를 가리켰다.
"걱정 마라. 마녀는 이 사람이 맡을 거야. 너도 이 사람이 맡으면 안심하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맹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왕세자 파벌 중에서 가장 큰 후원자였다.
가슴속에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역시 이렇다. 왕도, 왕세자도 모두 똑같은 놈들이다.
윌리엄은 아무 소리도 못한 채 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
순식간에 날이 지나간다. 겨울에는 더디게 지나가던 하루가 봄기운을 풍기면서 빨라진 느낌이었다.
성에서 도망치는 카니아 병사들의 수도 늘어난 것 같다. 도착하는 성벽마다 지키는 병사가 줄어있었다.
도망친 병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디코콰리아 백성을 뜯어먹는 도적이 된다.
훈련된 병사로 이루어진 도적은 농민이나 평민이 도적이 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 난폭하고 더 잔인하며 매우 강했다.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없애야 하는 해충이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기 전에, 몸집을 키워 더 강력한 집단이 되기 전에 잡아 죽여야 한다.
"...."
앞서가던 선발대 병사가 한 명 돌아왔다. 다른 때보다 이르다.
루디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냐?"
루디가 묻자, 노예병 치고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선발대 병사가 대답했다.
"근처에 도적이 있습니다. 도망친 카니아 병사들이 주축이 된 도적떼인 것 같습니다. 병사 옷에 다른 걸 껴입은 자가 많습니다."
선발대 병사가 손으로 진군하는 방향에서 약간 어긋난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무기도 상당히 좋습니다. 말단 병사들 외에 대장급도 한두 명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규모는?"
"최소 칠팔 백 명입니다."
지금까지 만난 도적떼보다 규모가 크다. 어쩌면 이미 번데기는 독나비로 변화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좋아, 치고 간다. 본대는 그대로 진행."
루디의 말에 대장 몇 명이 병사들을 데리고 옆으로 빠졌다.
군대가 갈라지는 모습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점보가 폴짝폴짝 뛰어와 물었다.
[주인님! 저 사람들은 놀러 가?]
"아니, 적을 만났기 때문에 싸우러 가는 거야."
점보는 바보 같아 보여도 사람에 관한 일은 제법 많이 알고 있다. 적이라는 말도, 싸운다는 뜻도 알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점보가 물었다.
[주인님! 점보는 인간 전쟁에 끼면 안 돼요. 기억하고 있어. 점보는 전쟁하는 거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싸우는 건 괜찮지? 응? 나도 가고 싶어요. 나도 싸우고 싶어.]
"안 돼."
점보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동그란 눈이 약간 불쌍하게 되어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구경은? 구경은 해도 되지요? 응? 응? 응?]
구경만 한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이 녀석이 구경하러 가서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안 돼."
점보가 눈물이 그렁그렁 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주인님 미워!]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뛰어간다.
아, 귀를 밟고 넘어졌다. 벌떡 일어나다가 또 밟고 고꾸라졌어.
넘어진 건 자신의 잘못일 텐데, 점보가 원망스러운 듯 루디를 돌아보았다.
[주인님 바보!]
그렇게 소리치더니 다시 엉덩이를 흔들며 달려갔다.
"...."
마생물이 반항기에 돌입했다.
*
도적떼를 처리하러 갔던 병사들은 이틀이 지난 뒤에야 본대에 합류했다.
도망치는 자까지 모두 쫓아가 몰살하고, 병사가 아닌 평민 출신의 도적은 상인에게 노예로 넘겼다고 한다.
제국군은 그 뒤로도 작은 규모의 도적떼를 두 번이나 만났다.
디코콰리아는 어느새 평민보다 도적이 더 많은 나라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이 나라를 정상으로 복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암울한 나라의 미래와 달리 하늘을 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