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숨바꼭질 대신 얼음땡
아기 코끼리가 코를 번쩍 들더니 갑자기 귀를 펄럭이기 시작했다.
점보의 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위아래로 잠시 흔들리더니 허공에 둥둥 뜬다.
[주인님! 나, 언제 엄마 만나? 점보 엄마는 어딨어요? 나 엄마 만나고 싶어. 엄마 만나러 가자!]
잠시 멍해져 있던 루디는 깜짝 놀라 아기 코끼리의 코를 잡았다.
"잠깐, 잠깐, 기다려! 아까 그 말, 부인이라고? 가짜 부인은 또 뭐야. 마녀가 내 부인이었니?"
코를 잡힌 점보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엉덩이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점보가 까르르 웃었다.
[와하하하하. 신닌다! 주인님! 코 당겨! 당겨주세요!]
노는 게 아니다. 루디는 아기 코끼리의 코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눌렀다.
그의 힘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점보가 스스로 루디의 동작에 따른 것 같다.
허공에 떠 있던 아기 코끼리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날지 마. 잠시만, 잠시 기다려 봐."
[응!]
하지만 여전히 귀가 펄럭펄럭 움직였다.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점보는 네 발을 가볍게 움직이며 춤을 추듯 통통 튀었다.
가끔 몸이 붕 뜬다.
루디는 점보가 날아가지 않도록 목을 누른 채 물었다.
"내가 마녀와 결혼했었니?"
[몰라!]
"하지만 아까 부인이라고."
[주인님이 그렇게 말했잖아. 부인이 된 거니까 잘 지내라고. 하지만 엄마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엄마 아니야.]
아까부터 엄마 엄마 하는데, 대체 네 엄마는 누군데?
문득 아기 코끼리가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코를 스르르 루디의 머리 위에 놓았다.
[맞아. 다 잊어버렸지. 불쌍해, 주인님. 괜찮아. 점보가 있으니까요. 점보가 가르쳐 줄게요. 잘 살 수 있어. 점보가 있으면 끄떡없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벽에 대고 말하면 엉뚱한 메아리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아."
왜인지 모르지만, 이전의 자신은 점보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대로 설명했는데 이해하지 못한 채 나머지는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점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드래곤이 말했다는 가짜 부인이라는 말뿐이었다.
'드래곤을 한 번 만나봐야 하나.'
하지만 드래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초원에서 살고 있을까. 초원의 민족이 정령이라고 말했던 걸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의 그가 남겼던 마생물들은 사람들을 피해 산과 들, 강 같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지내면서, 어느새 민간에서는 정령이라고 불렸던 건지도 모른다.
문득 드래곤의 이름을 알면 그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보, 혹시 나한테 드래곤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까?"
아기 코끼리가 머리를 홰홰 저었다.
[점보는 드래곤 이름 몰라.]
"어째서? 주인님이 있을 때는 계속 함께 있었던 거 아니야?"
[응,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주인님은 드래곤 이름을 부르지 않아. 장난으로 만들었대. 그래서 드래곤 이름 부를 때마다 웃는대요. 그래서 드래곤 화내. 삐져요. 웃긴다고 주인님이 웃으니까.]
"...."
대체 어떤 이름을 붙여줬길래.
아기 코끼리가 머리를 루디의 몸에 붙이고 살살 문질렀다.
[나는 내 이름 좋은데. 주인님이 준 거잖아! 점보! 점보! 점보! 내 이름이야! 알아? 주인님! 내 이름은 안 잊어버렸지?]
미안해. 완전히 통째로 잊어버리고 있다. 지금도.
루디는 점보의 머리를 토닥이고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도 없다. 이제 슬슬 이 아이를 보내야지.
"점보는 숨바꼭질할 때 어디에 있었어?"
[산! 산에서 가만히 엎드려 있었어.]
점보가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루디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심심하니까 가끔 뛰었어요. 벌레 잡거나 새 잡거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점보는 분노 정령이야! 무서워서 부들부들해. 하지만 숨어 있었어요. 사람한테 안 들켰어.]
점보의 코가 루디의 어깨를 슬금슬금 더듬었다.
[그, 도움도 했어. 물도 주고 과일도 주고. 하지만 안 들켰어요. 주인님이 말한대로 인간은 약하니까 조심했어. 안 밟아요.]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점보는 디코콰리아에 있는 산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굉장히 컸다고 하는 걸 보면 와토린구에 있는 산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산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사냥꾼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쫓겨 도망쳐온 이도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루디가 들어보면 산적이었던 것 같은데, 점보는 그런 사람한테도 물과 과일을 몰래 주었던 모양이다.
재미있었던 것처럼 말했지만, 굉장히 심심했던 게 아닐까. 숨바꼭질하다 말고 몰래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쫓아다닐 정도로.
이 아이를 다시 그 산으로 보낼 생각을 하니 약간 불쌍해졌다.
루디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몸을 낮췄다. 가만히 코끼리의 순한 눈을 보았다.
"점보, 숨바꼭질 한 번 더 할까? 내가 술래야. 지난번에는 제대로 찾아주지 못했으니까 이번엔 잘 찾아줄게."
[....]
좋아할 줄 알았는데 펄럭거리던 점보의 귀가 약간 가라앉았다.
점보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나, 숨바꼭질 이제 싫은데.]
이런. 곤란하다.
루디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나왔나 보다.
점보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코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주인님, 곤란해? 곤란해졌어요? 예전처럼? 하지만 점보는 이제 숨바꼭질 싫어. 주인님하고 놀고 싶어요. 옆에 있고 싶어. 얼음땡하면 안 돼?]
"얼음땡?"
[응! 점보가 얼음땡 잘하잖아. 점보가 얼음땡 왕이야! 잊어버렸어? 얼음땡도 잊어버린 거야? 그거 하면 주인님이 칭찬 많이 해주는데. 칭찬 잊어버렸어요? 점보는 칭찬 받고 싶은데. 얼음땡 가르쳐줄까? 주인님이 얼음!이라고 소리치는 거야.]
아기 코끼리가 코를 세우더니 활발한 목소리로 외쳤다.
[얼음!]
동시에 동작도 멈췄다. 펄럭이던 귀가 흔들리던 모습 그대로 경직되고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 과연. 이전의 자신은 이런 식으로 코끼리를 데리고 다녔던 거구나. 한데 가르쳐준다더니 자신이 얼음이 되어버리면 어쩌누.
루디는 살짝 점보의 등을 만졌다.
"땡!"
점보의 귀가 다시 펄럭이고 눈동자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억났구나, 주인님. 점보 얼음 잘했어? 잘했지? 점보 칭찬해 주세요.]
머리를 마구 루디의 몸에 밀면서 비빈다. 루디는 몇 발자국 뒤로 밀리면서 아기 코끼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래, 잘 했어."
점보가 발을 굴리며 춤추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춤추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잠시 동안 네 개의 발을 통통 튕겨 춤추다, 점보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주인님이랑 있어도 돼? 숨바꼭질 안 해? 안 숨는다?]
"그래. 대신 얼음땡을 잘 해야 해."
[물론이지! 점보는 얼음땡 왕이야!]
성안에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성주의 목을 벤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성으로 돌아가야겠다."
루디가 말하며 몸을 돌리자, 점보가 뒤에서 통통 뛰며 따라왔다.
호위와 저격병들도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표정이 느슨해지며 미소 짓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점보가 외쳤다.
[주인님!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뒤를 돌아보자, 아기 코끼리의 귀가 크게 움직이더니 쑤욱 하늘로 올라갔다.
높은 하늘에서 점보가 외쳤다.
[얼음!]
순간, 점보의 귀도, 코도, 다리도 모두 멈춘다. 점보의 몸이 수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디는 순간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호위와 저격병도 마찬가지다.
간신히 낙하하는 코끼리에서 멀어졌을 때, 쾅! 소리와 함께 바닥이 깊이 패며 사방으로 돌이 튀었다.
[와하하하하!]
움푹 파인 땅속에서 뭔가가 불룩불룩하더니 작은 몸집의 점보가 툭 튀어나왔다.
불쌍하고 뭐고, 당장 이 녀석을 산으로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루디가 경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점보가 그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먼지를 잔뜩 묻힌 점보가 부르르 먼지를 털고, 코를 이리저리 흔들며 루디를 향해 달려왔다.
[주인님! 봤어? 봤어요? 재미있지? 나 멋있었어? 엄청 멋지지?]
루디 앞으로 온 점보가 주변을 돌면서 기쁜듯이 코와 몸을 흔들었다.
루디는 점보의 코를 잡았다.
점보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칭찬을 기대하는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점보."
[응, 주인님.]
"다시는 허공에서 얼음하지 마."
[?]
점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안 멋져?]
"그런 말을 해주기 전에 죽을 거야. 점보가 얼음하는 바람에 떨어져서 부딪치거나, 돌이 날아와 맞아서 죽어. 인간은 약한 거라고 점보가 말했지?"
점보의 귀가 축 처졌다.
[미안해요. 인간은 금방 죽어버리는데. 점보가 잘못했어요.]
루디는 한숨을 쉬고 점보의 머리에 손을 놓았다.
"그래.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내가 얼음이라고 말하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곧바로 동작을 멈추는 거야. 알겠니?"
그렇게 말며 점보를 보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반성하는 걸까.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자, 가자."
[....]
하지만 따라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해서 얼굴을 들여다보자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그의 말속에 '얼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대로 굳어있다.
'이거 정말 스스로 하는 걸까? 혹시 주문 아니야?'
루디는 약간 의심하면서 점보의 몸에 손을 댔다.
"땡."
[파아아아아아.]
점보의 코에서 숨소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점보는 흔들흔들 머리를 움직이면서 루디의 곁으로 와 걷기 시작했다.
[응, 주인님. 이제 가자.]
한 사람과 코끼리 한 마리가 흙길을 걷는다. 성으로 향하면서 루디는 문득 웃었다.
설마하니 이런 걸 데리고 다니는 처지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쩌면 기억하지는 못해도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이전과 같은 실패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몸에 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만든 게 봉황이라 다행이야.'
드래곤이나 아기 코끼리가 아니어서 정말 좋았다.
'그나저나, 스타워즈의 광선검, 내가 만든 거였구나.'
어깨가 약간 처졌다.
***
'벌써 세 번째.'
서쪽마녀는 피곤한 몸을 마차 안에 밀어 넣고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몸은 불편하다.
안 그래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더욱 세심하게 주변을 살펴야 한다.
아주 작은 소리조차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다 보면 쉽게 피곤해졌다.
성을 공격하는데 까마귀의 힘을 빌려주는 것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까마귀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힘이 많이 필요하다. 한 번 힘을 쓰면 적당한 시간을 쉬면서 회복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연이어 힘을 쓰느라 머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생각 같아서는 까마귀를 쓰고 싶지 않지만.'
서쪽마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면 이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되돌아가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간신히 제국 황제를 옭아맬 그물을 거의 완성했는데 지금 돌아가버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다.
서쪽마녀는 아픈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길게 숨을 쉬었다.
까마귀가 그녀의 뺨에 부리를 슬슬 문질렀다. 힘내라는 걸까. 딱딱하지만 서쪽마녀에게는 이 부리의 감촉이 가장 부드럽게 느껴졌다.
"마녀님! 잠시 괜찮을까요? 총대장께서 잠시 만나고 싶다고 부르십니다."
마차 밖에서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서쪽마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뭔가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몸을 더듬어 이상한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서쪽마녀는 마차 밖으로 나갔다.
몸이 약간 비틀거리자, 윌리엄이 손을 잡아주었다.
다른 때면 그 손을 피하지만, 방금 성을 공격하면서 마력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의지해 왕자의 천막을 향했다.
아직 공격 중이다. 멀리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빠.'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부분의 감각이 예민하다.
타인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피 냄새가 지나칠 만큼 가까웠다. 토할 것 같다.
"마녀님, 괜찮으십니까?"
윌리엄의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마녀는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윌리엄은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시조도 그랬다. 깊게 파인 주름이 있는 손으로 그녀를 잡고, 지구를 닮은 냄새를 찾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그 사람은 내가 지구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은 별로 그리울 것도 없었다. 지구에 놓고 온 건 작은방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녀는 하루 종일 방에만 머물렀다.
세상이 좋아져 장애를 가진 이에게도 세상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이야기였다.
위험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는 그녀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하루 종일 작은방 창문 앞에서 거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지냈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그녀에게 친화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전혀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작은 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나중에, 한참 뒤에야 어쩌면 집이 무너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죽었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는 작은 마을에 불쑥 나타났던 것 같다.
거기에서부터는 힘들었다. 지금도 그리운 마음이 별로 없는 지구의 생활이 천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참한 삶이 시작되었다.
'성녀라고.'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가 처졌다.
말이 성녀지, 그냥 노예다. 비참했다. 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다.
시조가 그녀를 발견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비참하게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구에서도, 여기에서도, 시조의 곁에 있을 때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윌리엄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마녀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비틀거렸을 뿐."
서쪽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든다.
'정신 차려.'
이곳은 밖이다. 멍하니 있어서는 안 돼. 이제 조금 남았다. 거의 다 끝났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는 거야.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타인을 짓밟거나 더러운 짓을 하는 사람도 다들 행복한데, 그녀도 한 번 정도는 행복을 꿈꾸는 게 용서되지 않을까.
길게 살아온 동안 단 한 번 바랐던 남자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용서되는 게 아닐까.
시조가 사랑하는 여자는 죽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환생할지도 모르고, 자신처럼 불쑥 이상한 세계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자신처럼 육신이 죽은 세계에서 같은 특징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조가 사랑했던 여자가 다시 나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났어도 물론 자신은 알아보지 못했을 테지만, 마생물들도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 것 같다.
시조의 부인이 태어났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라는 꿈을 꾼 것도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가장 그에게 가까운 여자다.
"총대장이신 왕세자전하의 천막 앞입니다."
윌리엄이 작게 말했다.
서쪽마녀는 등을 곧게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