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34화 (134/201)

#134 마녀만 있다면 제국도 이길 수 있다

눈 덮인 땅은 모든 것을 얼린다. 그곳에 닿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았다.

서쪽마녀는 진군하는 내내 창을 열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까마귀를 통해 가끔 뭔가를 본다. 어떤 때는 의도한 일이지만, 때로는 원치 않는 데도 낯선 영상이 그녀의 암흑을 비집고 억지로 들어왔다.

명확한 영상인 경우는 거의 없다. 뒤죽박죽, 현실과는 약간 다른 왜곡된 이미지가 보였다.

손으로 더듬을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인 걸 보면 아마 그럴 거다.

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빛 아래에서 뭔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것이 비참한 것이라는 점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시체, 튀어나온 내장, 아마도 사람들이 붉다고 말하는 피의 흔적,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까마귀가 보내는 영상이 그녀 주변에 있는 것일수록 영상은 현실에 가까워졌다. 더 자세한 묘사를 덧붙여 눈앞에 들이댄다.

거기에 소리가 더해지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여자의 비명, 남자의 원통한 고함소리, 가하하하 웃는 병사들의 목소리.

모두가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 서쪽마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래도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와토린구를 떠나 몬테스에 들어온 뒤, 그레데 왕국군은 몇 개의 작은 마을을 거쳤다. 와토린구와 달리 그 마을에는 약간의 식량과 사람들이 있었다.

와토린구에서 받았던 울분을 터뜨리는 것처럼, 그레데 왕국군은 거칠게 행동했다.

마을을 불지르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먹을 건 당연히 주지 않는다. 그저 괴롭히기 위해 디코콰리아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여자만 끌고 온 것이 아니다. 남자는 물론 어린아이조차도 날카로운 창 끝에 밀려 걷다가 힘이 다하면 차가운 땅에 쓰러져 죽어갔다.

쓰러진 시체는 그대로 굳어 그 자리에 남는다. 까마귀의 노란 눈이 썩지 않고 눈을 부릅뜬 시체를 가끔 잡았다.

'토할 것 같아.'

작은 마차의 공간 안에서, 서쪽마녀는 손을 더듬어 구석에 있던 작은 나무통을 끌어당겼다. 나무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 안에 역류하는 액체를 뱉어낸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지구의 삶이, 이럴 때는 조금 그리워졌다.

'....'

하루 종일 창을 통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작은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다. 서쪽마녀는 그 소리를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달콤한 연인의 속삭임도, 아이를 꾸짖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있었다. 새벽녘이면 편의점 손님이 가게 앞에서 술을 마시다 그대로 드러누워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때로 싸우는 사람의 투박한 소리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는 존재하지 않는, 평온한 세상이었다.

그때는 그 일상이 그토록 복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곳에 와서야 겨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야말로 행복한 것임을 알았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아주 가끔, 시조가 없는 나날에 지치면 생각났다. 조용히 흘러가던 일상이 가끔 그리워졌다.

'울지 마. 울어서는 안 돼. 그러면 약해진다.'

이 세상에서 약해지면 끝이다. 서쪽마녀는 통속에 얼굴을 반쯤 디민 채 숨을 골랐다. 울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잠시 그렇게 하고 있자, 누군가가 마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서쪽마녀님, 내일쯤은 성공격에 도움을 받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서쪽마녀는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울음 섞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내일, 그래요.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뒤에 저녁 식사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윌리엄의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저 사람은 어쩌면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는 건지도 모른다. 가끔 소리도 없이 가까이 올 때가 있는데, 또 때로는 굉장히 크게 발소리를 내며 움직이곤 했다.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약간 고마워졌다.

서쪽마녀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올리고 멀리에 있는 자신의 새들을 불렀다.

'돌아와, 이제 내게 돌아와. 잠시 너희들의 일을 멈추고 내게 와 줘.'

그녀의 목소리가 까마귀에게 닿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서쪽마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새를 마음속에서 불러들였다.

한참 동안 그렇게 새를 부르다 지쳐,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새를 불러오는 일은 힘을 많이 사용한다. 한꺼번에 힘을 쓰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눈을 감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그녀가 안심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가짜다. 너무 그리워서 뇌가 만들어내는 가짜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벌써 천년 이상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가 말한 모든 걸 기억했지만, 지금은 모두 망각 속으로 흩어져 몇 개 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분의 목소리, 듣고 싶어.'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깊은 밤, 잠이 안 올 때면 시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데렐라, 아기 코끼리 덤보,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 사람은 중학생 어린 시절에 이 세계에 떨어져, 들려줄 이야기가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지구의 것 중에서 생각나는 건 이제 그 정도라고. 하지만 그게 더 좋았다.

스무 살을 여러 해나 넘긴 아가씨에게 어린아이들에게나 들려줄 법한 동화를 이야기해 주는 노인의 목소리는 서쪽마녀에게 평화, 그 자체였다.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가끔 그 사람을 졸라 얼굴을 만졌다. 살아온 세월만큼 새겨진 주름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면 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 이 사람은 나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겠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망망대해에 혼자 떠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혼자다.

"...."

서쪽마녀는 몸을 바로 세웠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직 제국의 황제가 가진 마력이 남아있다. 그에게 부어준 걸 모두 회수하고, 드래곤과 덤보를 찾아가자. 이번에는 자신의 마력도 부어버리자.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모든 걸 던져 그 사람을 불러오자. 마녀의 힘이 없어도, 그 사람이 설혹 힘없는 보통 사람이 되어 온다 해도 좋다.

'만나고 싶어요.'

괜찮다. 이번에는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

굳게 마음먹어도 그립고 외로운 심정까지 물리칠 수는 없었다. 고개가 저절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미안해요.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어요. 미안해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손등을 적셨다.

*

다음 날 아침, 윌리엄은 마차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차 주변이 온통 새까맣다. 까마귀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지금까지 마녀가 데리고 있던 것보다 몇 배는 되는 것 같다.

병사들도 멀찍이서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다들 마녀를 두려워했다.

온 세상천지가 까만 새로 뒤덮여 있으면, 뭐, 당연한 일일 거다.

윌리엄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는 까마귀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까마귀가 아니라 좀 예쁜 새였으면 덜했을 텐데. 비둘기라든가, 앵무새라든가, 그런 거.'

왜 하필 까마귀일까. 불길하게스리.

마녀는 윌리엄이 데리러 가자 금방 마차에서 나왔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왕이 준비한 두꺼운 외투를 걸쳐주자 작은 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전처럼 그녀를 인도한 건 까마귀였다. 검은 까마귀 떼가 두 줄로 나란히 서서 폭 좁은 긴 도로를 만들었다.

서쪽마녀가 지나갈 때마다 까마귀가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까악 까악 짧게 울었다. 여전히 마녀의 어깨 위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저게 까마귀 대장인가?'

윌리엄은 가만히 마녀 어깨에 앉은 까마귀를 보았다. 생각 탓인지 유난히 똑똑해 보인다. 어쩌면 마녀가 부리는 주술의 비밀은 저 까마귀가 모두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데 왕국군은 성에서 상당히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을 받는다. 뭐, 저렇게 작은 성에서 이런 대군을 맞아 싸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때문에 마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중간에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약간 미안해졌다. 마차를 조금 더 가까이 댈 걸 그랬다.

나라를 공격할 때도 성을 공격할 때도 절차는 비슷하다. 제일 먼저 명분을 세운 서신을 보냈다. 이러이러해서 너희가 잘못했으니 우리는 못 참는다, 언제까지 제대로 된 대답이 없으면 싸우겠다, 보통은 그런 내용이다.

이 성에도 여러 번 그런 서신이 서로 오갔다. 이야기가 잘 되면 보통 몇 날 몇 시로 약속을 정해 양측이 병사를 이끌고 싸우게 된다.

전혀 싸우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 있는 성주는 겁쟁이로 취급당했다.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보통은 싸우러 나온다.

하지만 아예 승산이 없다 싶을 때 나올 사람은 없다. 불명예고 뭐고, 사는 게 우선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이 성의 성주는 당연하다고 할지,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기로 했다.

공성 장비로 공격해야 했다면 이 성은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많이 걸 만큼 중요한 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녀의 힘을 시험해보기에는 딱 좋다.

'한데 어떤 식으로 길을 만든다는 걸까.'

왕세자와 영주, 병사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마녀는 까마귀가 만든 길을 타박타박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간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윌리엄에게 물었다.

"어느 쪽에 길을 만들면 좋을까요?"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만들겠다는 건가. 윌리엄은 반신반의하면서 손으로 성의 정면을 가리켰다.

"저쪽, 정문 쪽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마녀는 윌리엄을 손가락을 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자꾸 잊어버린다.

"정문은 마녀님이 있는 곳에서 직선으로, 약간 오른쪽에 있습니다."

서쪽마녀가 알았다는 듯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성으로 얼굴을 향하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새들아, 나의 새들아, 내 말을 들어라. 부디 너희들의 몸으로 저 성에 올라갈 길을 만들어다오."

서쪽마녀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하나둘 날갯짓을 하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바로 성을 향해 날아간다.

까마귀들은 이내 서로의 몸과 몸을 붙여 두꺼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저 높은 성벽까지, 검게 물들은 길이 놓였다.

까마귀들의 몸 위에, 옅은 빛이 그물처럼 짜여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침 넘어가는 소리만 꼴깍꼴깍 들렸다.

성 위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까마귀를 보고 마녀라고 외치던 사람들조차 조용해져 있었다.

서쪽마녀가 윌리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서두르세요. 길어야 이십 분입니다. 그 이상은 유지할 수 없어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윌리엄은 병사들에게 고함을 쳤다.

"서둘러! 길은 금방 끊긴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까마귀를 밟지 못했다. 다들 주저하며 허공에 떠 있는 까마귀 길을 바라만 보았다.

윌리엄과 친분이 있는 백인대장이 부하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넋 놓고 있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다른 놈들이 먼저 건너가서 좋은 걸 다 차지해버린다. 먼저 가는 놈이 장땡이야!"

그리고 먼저 칼을 들고 까마귀 길을 향해 달려갔다.

"...."

강한 척하고 있지만, 윌리엄은 보았다. 백인대장의 얼굴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허긴, 왜 무섭지 않을까. 마녀가 하는 주술일 뿐 아니라, 새들이 뭉쳐 길을 만든 거다. 중간에 새가 날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떨어져 죽어 버린다.

'멋진 놈.'

백인대장이 먼저 올라서고,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무거운 남자들이 수십 명 한꺼번에 올라가 뛰는데도 까마귀로 만든 바닥은 멀쩡했다.

그들이 올라가 뛰는 것을 본 뒤에야 다른 병사와 영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까마귀 길은 성으로 쳐들어가는 왕국군으로 가득해졌다.

성 위에서 당황하여 뜨거운 물이 담긴 항아리를 부으려고 한다.

윌리엄의 심장이 섬뜩해졌다.

하지만 길을 만들지 않았던 까마귀들이 날아가 적병에게 달려들었다.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뜨거운 통을 든 적병의 눈을 쫀다. 멀리서 보는 데도 현장의 공포가 손에 잡힐 듯했다.

윌리엄은 마침내 성벽을 넘어가는 아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길 수 있다."

마녀의 도움을 받으면 와토린구 아니라 제국군도 이길지 모른다.

'맙소사.'

알지 못하는 사이, 그레데 왕국군은 승리의 여신을 손에 넣었다. 그 돼지 새끼 같은 국왕이 결국엔 옳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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