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오만한 마녀로 살아야 나를 지킬수있다
가느다랗고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다. 마치 명주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디는 손을 허우적거려 실을 치우려고 했지만, 닿으면 닿는 대로 달라붙어 버렸다. 아, 젠장. 물이 가득 들어와 숨을 쉴 수 없다.
눈앞을 하얗고 긴 실이 감싼다. 고치 속에 들어간 누에처럼, 루디는 순식간에 전신을 흰 실 같은 것으로 친친 감겼다.
몸 안의 마력을 운용해보려고 했지만 안 된다. 하얀 머리카락이 마력을 빨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출생과 얽힌 비밀, 드래곤, 하늘에 떠 있는 가느다란 빛, 하얀 머리카락.
'설마, 이거 마녀의 짓인가? 나를 불러온 것도 그 계집이라면, 화를 내고 죽이겠다고 나서야 하는 건 나 아냐?'
이곳에 올 무렵, 그제야 겨우 일이 손에 붙었다. 안정된 직장을 손에 넣고 상사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좋아하던 여자와 묶여 이제야말로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고 생각했었다.
힘들었던 상황을 모두 견뎌내고 간신히 손안에 행복을 붙들었는데, 그 모든 걸 망쳐버린 원흉이 그의 목숨을 노려?
지금까지 애써 눌러왔던 분노가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치솟아 올랐다.
대체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평온한 삶에서 끌려와 이런 세상에 내팽개쳐진 건가. 왜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자신이어야만 하는 건지, 이 세상의 불합리함에 화가 났다.
명주실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눈과 코를 막고 입으로 기어들어온다. 점점 숨이 막혔다.
좋아, 죽일 테면 죽여봐라. 대신 나도 널 용서하지 않아. 죽어도 절대로 복수해 줄 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복수한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되살아나 반드시 네년에게 똑같이 해주마. 네가 사랑하는 세상에서 끄집어 내, 낯설고 삭막한 곳에 내팽개쳐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몸속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것처럼 솟아났다.
몸에서 빛이 퍼져나간다.
그의 몸을 감고 있던 흰 머리카락이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가닥가닥 끊겼다.
흰 실이 몸에서 뜯기듯 흩어져 나가는 동시에 루디의 것이 아닌 빛이 전신을 감쌌다.
봉황 만의 느낌이 아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마생물이 모두 몰려온 것 같았다. 마생물들이 느끼는 분노와 혼란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부드러운 물결 같은 것이 몸속에 들어와 끊임없이 톡톡톡톡 내부를 쳤다. 봉황과 생쥐들이 몸속에 들어온 모양이다.
루디는 물속에 얼굴까지 잠겨있다가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젠장, 어쩌면 잠시 동안은 숨이 멈췄던 건지도 모른다.
입과 코에서 물이 분수처럼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목욕통 가장자리에 팔을 걸치고 정신없이 기침을 했다.
몸속에 들어간 봉황과 생쥐들이 계속해서 내부를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물을 밖으로 빼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죽을 뻔했다. 안심하는 순간 몸이 축 늘어졌다.
천막 밖에서 보좌관의 소리가 들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심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루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온한 듯 밖을 향해 외쳤다.
"아, 괜찮아. 잠시 혼자 있을 테니 물러가 있어라."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병사들이 불안해할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 근처에 있을 테니 뭔가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보좌관은 걱정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천막 앞에서 떠났다.
'빌어먹을.'
루디는 벌렁 몸을 뒤집었다. 기침을 너무 해서 목이 아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겨우 살아있는 실감이 들었다.
"어쩌면 마녀가 이 전쟁에 참가했는지도 모르겠다."
루디가 중얼거리자 봉황 두 마리의 얼굴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동그란 눈으로 가만히 루디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봉황은 루디의 말이 이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시기도, 갑자기 마녀의 짓으로 보이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는 것도, 마녀가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뭐, 어쨌든 이쪽에서도 찾고 있었으니까, 저쪽에서 와준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그래, 꼭 한 번 만나봐야겠다. 왜 그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 세상에 불러온 건 그녀인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랬는지, 꼭 들어봐야겠다.
만일 용사 소환이라고 씨부렁거리면 정말 죽여버릴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도 죽일 것 같다.
봉황 수컷이 가만히 루디의 가슴에 머리를 댔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대편에서 너희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수를 쓴 거였겠지. 괜찮아. 게다가 모두 나를 구하러 애썼잖아.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어느새 마생물들이 주변에 가득 빛을 뿌리며 루디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디는 마생물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마생물들은 모두 안심한 것 같지만, 그들 마음의 저편에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루디보다도 더.
하지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의 심부름꾼이라는 까마귀는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적대하는 듯 보이는 행동은 없었다. 마치 반갑다는 듯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대하거나 해치려는 모습은 없었다.
한데 어째서 마녀만이 그를 죽이려 하는 걸까.
***
'끊어졌다.'
조금 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빛의 실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속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서쪽마녀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숨이 가쁘다.
'마생물의 짓이 아니야. 이 느낌은 설마, 스스로 내 힘을 튕겨냈나.'
황제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것들이 도울 테니 지금은 그를 죽일 수 없다. 그저 잠시 동안 시간을 벌어 그 남자에게 표식을 달려고 했을 뿐이다.
그를 만나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촘촘하게 그물 짜듯이, 그가 닿는 걸음걸음마다 하나씩 세심하게 얽매어 두어야 직접 만났을 때 마생물과 그를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둘을 분리한 뒤에야 간신히 그의 몸에 깃들어 있는 시조의 마력을 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써 이 정도로 힘을 키웠다면 힘들지도 모른다.
서쪽마녀는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깨닫고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
무섭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그 남자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제국의 황제는 대체 어떻게 이토록 빨리 힘을 키우는 거지? 자신은 어떤 괴물을 이 세상에 불러들인 걸까.
서쪽마녀는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누구도 자신이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는 안 돼. 그러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녀를 위협한다.
이 세상은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오만하고 겁을 모르는 마녀로 살아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를 불러들일 수 있어.'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성공했다고 여겼는데, 어디에서 잘못된 걸까. 분명히 그를 불러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각성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계속 기다렸다.
언젠가 그가 사랑하는 마생물들과 만나면 반드시 각성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드래곤을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실패했다. 잘못된 사람을 불러들였다.
'바보, 나는 바보야.'
제국의 황제가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두 회수하더라도 그 사람을 다시 불러오기에는 모자랄지 모른다.
그러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이번에는 힘을 보태줄 마생물조차 없다. 시조가 남긴 마생물의 대부분이 소환을 위해 모든 마력을 소진하고 사라져갔다.
모두 단 한 가지, 언젠가 다시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마력을 모두 내놓았다.
다시 비슷한 양의 마력을 모을 수도 없지만, 만일 가능하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천 년, 수 천 년, 어쩌면 만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아니면 영원히 안 되던가.
'그때까지 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앞으로 다시 천 년 이상, 혹은 그 너머의 시간을 확실치 않은 희망에 매달려서 계속....'
미쳐버리고 말 거다. 외롭고 너무 외로워서 반드시 미쳐버린다.
'이제 싫어. 혼자는 싫어요. 제발 내게 돌아와 주세요.'
숨죽여 흐느끼자, 까마귀가 부리로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 사람이 남겨준, 그녀를 지키는 존재.
서쪽마녀는 손을 더듬어 까마귀를 품에 안았다.
'너만은 내게서 떠나지 말아 줘. 제발 나와 함께 있어.'
까마귀가 조용히 그녀의 뺨에 머리를 부벼댔다.
다음 날 서쪽마녀는 마차를 타고, 디코콰리아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그레데 왕국군의 본대로 향했다.
***
그레데 왕국군은 제국과 달리 보급부대가 없다. 대신 상인들이 따라다니며 병사들이 약탈한 물건을 구입하고, 식량과 필요한 물품을 팔았다.
그 때문에 그레데 왕국군에게 전쟁터에서의 약탈은 필수였다.
당연히 그레데 왕국군은 국경을 넘자마자 약탈을 위해 근처 마을로 향했다.
모든 나라가 그렇지만, 성과 먼 마을은 견고한 벽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크게 값나가는 물건은 없지만 그런 마을에는 식량과 가축이 있다. 지나가면서 약탈하기에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제일 처음 목적지로 정한 곳은 상인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다.
그저 마을에 불과하지만, 그곳에는 산에서 나는 약초와 짐승 가죽을 구매하기 위해 상인들이 많이 온다.
정식으로 판매하기 어려운 불법 물건도 제법 나오기 때문에 마을치고는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다.
그레데 왕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하지만 그레데 왕국군이 도착했을 때, 마을은 깨끗했다. 한 명도 없다. 마을 밖에는 항상 여러 개의 낡은 천막이 쳐져 있었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지?"
당연히 그레데 왕국군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함정인가 하고 경계했지만,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마을이 통째로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당연히 각 가구마다 비축된 식량도 없었다.
이래서야 당장 며칠 뒤에 먹을 식량조차 간당간당하다.
그레데 왕국군은 곧바로 다음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없다.
그런 일이 하루, 사흘, 열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병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식량이 대부분 떨어질 무렵, 다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다른 마을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너무 서둘러 떠나느라 제대로 짐을 꾸리지 못한 것처럼 어수선했다.
바퀴가 빠진 마차,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밀가루 부대 몇 개, 문이 열려 있는 집들.
이번에는 분명히 뭔가 남아 있을 것 같다.
마음이 급해진 몇몇 부대가 지시를 어긴 채 황급히 마을로 진입했다.
그 부대에 뒤처질까, 다른 귀족의 수하에 있는 부대도 마을로 달려간다.
한동안 적도 보이지 않는 유령 마을을 지나온 군대는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요란한 함성이 들렸다. 와토린구 군의 기습이었다.
***
단 삼백 명.
만 명이 넘는 그레데 왕국군을 습격한 와토린구 군의 숫자다.
전원 기마병이었다. 그중 백 명은 긴 막대기 형의 마도구를 지닌 저격병이다. 나머지는 석궁과 장창 부대였다.
"정확하게 맞히려고 하지 마라. 대강 쏴! 빨리 쏘고 빨리 뜨는 게 장땡이다!"
대장이 소리치자, 병사들이 하! 소리를 지르며 말을 달렸다.
와토린구 병사가 말을 타고 그레데 왕국군 주변을 돌며,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만 노리고 석궁과 장창을 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가 아닌 대장급만 노리는 거다.
장창과 석궁은 장전을 하느라 보조 병사가 따라붙어 있었다. 보조병사는 대기하고 있다가 화살이나 창이 떨어지면 새 통을 건네주고, 기회를 틈타 떨어져 있는 무기를 다시 주워왔다.
마도병은 그런 보충도 필요 없다. 그냥 계속해서 쏘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이쪽에서 쓰러뜨리는 적의 수는 몇 배나 되었다.
"으악!"
"제국의 마도병기다!"
"놈들은 마도병기를 가지고 있다!"
"피해!"
난생처음 보는 무기에 그레데 왕국군 중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그레데 왕국군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사이, 순식간에 대장급 여러 명이 쓰러졌다.
그레데 왕국군 사이에서 재빨리 혼란을 수습한 몇몇 부대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커다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때, 와토린구 기습군의 대장이 외쳤다.
"놀이는 끝났다. 퇴각! 퇴각하라! 늦는 놈은 보리스님한테 엉덩이를 맞는다!"
대장의 말은 곧바로 다른 와토린구 병사에 의해 주변으로 퍼졌다.
"퇴각! 퇴각!"
"놀이는 끝났다. 물러간다!"
"늦는 놈은 보리스님한테 엉덩이 싸대기다!"
그레데 왕국군의 일부가 미처 그들 앞에 나서기도 전에, 와토린구 기습병은 꼬리말고 도망치는 개처럼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적이 도망친다! 잡아!"
"쫓아라!"
"쏘아! 화살을 쏘아라!"
뒤늦게 그레데 군이 그들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왕국군은 보병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그들이 화살을 쏠 무렵에는 와토린구의 기마병이 벌써 저만치 멀리 간 뒤였다.
그레데 왕국군 중에서도 말을 타고 쫓으려고 한 자가 몇 명 있었지만, 마도병이 긴 막대기 형의 무기를 뒤로 향해 아무렇게나 방방 쏘자, 몇 명이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화살이나 장창과 달리, 제국의 마도병기는 제대로 된 겨냥조차 필요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레데 왕국군은 더 이상 아무도 와토린구 병사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단 삼백 명이 기습한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추운 날씨에 음식까지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레데 왕국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져 버렸다.
윌리엄과 서쪽마녀가 본대에 도착한 것은 그런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