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하얀 머리카락
처음에는 단순히 이 산에 들어온 적군의 사냥꾼, 그것도 여자를 한 번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는 오랫동안 산에서 살았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인간의 수가 적다.
살아있는 여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만난 여자는 얼어 죽은 시체였거나 멀리에서 흘깃 형체만 보았다. 그래서 살아있는 여자가 어떻게 생긴 건지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적군의 밤 습격을 피해 도망쳤던 여자 사냥꾼은 금방 발견했다. 나무 위에 올라가, 갈라진 틈 사이에 몸을 의지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땅에 떨어진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머릿속이 번쩍했다.
젊은 여자라는 게 그렇게 예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와는 전혀 다르다. 주름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말랐지만 몸도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가락으로 뺨을 눌러 보면, 피부가 탱탱하게 손끝을 튕겨냈다. 어머니의 물렁물렁하던 살과는 전혀 달랐다.
이 여자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산에 흘러들어오는 물건은 가져도 된다. 그 소년이 약속했다. 나라에 크게 위협이 되는 게 아니라면 이곳에 떨어지는 유실물은 남자 자신의 것이다.
적국이라고는 해도 이 여자는 병사가 아니다. 심지어 죽어가고 있다. 뭔가 위협이 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병사에게서 도망쳤으니 다시 돌아가지도 못할 거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아도 되지 않을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여자를 나무에서 내려 업고 집에 돌아왔다. 지금도 그때 얼마나 여자의 몸이 부드러웠는지, 얼마나 신기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남자는 지친 듯 잠에 떨어져 있는 여자의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처음에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 여자도 드디어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그에게 속한 사람이다. 아내다.
남자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여자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은 뒤 이불을 목까지 꼭꼭 여며 주었다.
겨울의 산은 춥다. 오두막 안은 불을 피워두지만 여자에게는 추울지 모른다. 여자는 매우 부드럽고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올해는 이미 어쩔 수 없지만, 내년에는 대비를 더욱 잘해야겠다. 사람이 늘었으니 먹는 것도, 장작도, 모두 두 배가 든다.
거기에 여자를 위한 물건도 필요했다. 상인에게 물건을 사려면 짐승 가죽을 두 배는 더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덫을 추가로 만들어 두어야 한다.
'게다가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대비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것이다.
***
겨울의 산은 위험하다.
눈이 많이 쌓이는 시기가 되면 보통 신발로는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적당한 나무를 미리 말리고 둥글게 휘어 커다랗게 만든 나무 덧신을 신발 밑에 신어야 한다. 그 나무 덧신을 신지 않으면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져 걸을 수 없었다.
보리스는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그 신발을 신고, 어기적어기적 산길을 걸어 산지기가 살고 있는 산꼭대기 집을 찾았다.
그레데 왕국 군의 진군해오면 산지기가 안내를 맡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리스가 산에서의 전투에 익숙한 사람이라 해도, 안내인이 없는 겨울산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싸우기 어렵다.
안 그래도 움직이기 힘든데, 겨울산은 눈이 모든 지형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낭떠러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산에서 안내인 없이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몇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을 찾아온 것인데, 흠, 보리스는 한숨을 쉬고 눈앞에 엎드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르신, 부디 이 여자를 제 아내로 주십시오."
산지기는 엎드린 채 털을 부풀린 고양이처럼 등을 둥글게 올렸다. 그의 뒤편에 엎드린 채 얼굴이 새하얘진 여자를 조금이라도 보리스의 눈에서 숨기려는 것 같다.
보리스는 남자 뒤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지만 몸이 다부지다. 바닥에 대고 있는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있고, 손가락에도 자잘한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 동작도 무술을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여느 여자와는 달랐다. 아무래도 사냥꾼인 것 같다.
잘 보면 허리가 볼록했다. 어쩌면 상처를 입어 허리에 천을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누가 칼이라도 들이밀고 협박하는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의 팔목에는 결박했던 자국이 있었다.
"하아."
보리스는 하늘을 보았다.
그의 한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산지기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약속했습니다. 증서가 있어요. 제가 제대로 산지기 노릇을 하고 좋은 안내꾼이 되면 아내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했어요."
보리스는 남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 알고 있네. 그 자리에 나도 있었으니. 하지만 저 여자는 그레데 왕국 사람이 아닌가? 결박 자국이 있는 걸 보면 자네도 그걸 알고 묶어두었겠지."
"...."
산지기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레데 왕국은 적국이야. 한창 싸우고 있는 나라의 여자, 그것도 분명 안내꾼으로 보이는 사람을 우리 편에 둘 수는 없네. 조금 기다려보게. 내, 더 예쁘고 젊고 좋은 여자를 구해주지."
산지기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 여자가 좋습니다, 어르신. 그분께서 이 산에 흘러들어오는 물건은 제가 가져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어요. 저 여자는 제가 주웠습니다. 쓰러져 있는 걸 제가 데려왔어요."
"저 여자는 물건이 아니잖아."
"무, 물건입니다. 나무 위에 떨어져 있었어요."
산지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보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순박하고 성실하다.
오래전에 약속한 걸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은 채 계속해서 산을 지키고 매일 멀리까지 순찰을 다녔다.
산을 다 돌아보려면 영역을 정해 순서대로 돈다 해도 며칠에서 수십 일이나 걸린다. 이 남자는 그걸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다닌 거다.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레데 왕국이 산을 오른 사실을 이렇게 일찍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이 산지기는 한 번 이거다 정하면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 그런 성격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일을 맡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배신당했다고 마음을 돌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보리스는 머리를 긁적이고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허리에 상처를 입었구나. 그 상처는 누구에게 입었느냐?"
여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그, 저는, 저기, 사냥꾼의 딸로...."
"무서워 말고 말해봐라. 이 남자가 너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거짓을 말한다면 네 팔과 다리를 모두 자른 뒤에 이 남자에게 줄 테다."
"히익!"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산지기는 원망스러운 듯 보리스를 보았지만 이 정도의 협박은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사시나무 떨 듯 몸 전체를 부들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저,저,저, 저는 그레데 왕국의 산기슭에 살고 있는 사냥꾼의 딸입니다. 본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군의 안내를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새해 첫날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 어쩔 수 없이 제가 안내를 맡았는데, 한밤중에 병사가, 이 상처는 그 병사에게...."
여자의 말은 간단했다. 한밤중 병사가 덮치는 바람에 엎치락뒤치락하다 상대를 상처 입히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여자가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처, 처음에는 저도 여기에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지금은 절대로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너는 네 입으로 병사가 겁탈하려고 해서 도망쳤다고 했다. 한데 고작 며칠 사이에 이 남자의 아내가 될 생각이 들었다는 게냐?"
여자가 몸을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병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이후 매일 여러 명의 병사가.... 오라버니를 생각해 계속 참았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어요. 군에서 도망친 지금은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산에서 조용히 살 수 있다면, 저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여자의 가족은 한 명뿐이었다. 달랑 남매만 남았다. 어머니는 남매가 어릴 때 도망가 버리고, 지금까지는 산기슭에서 아버지와 살았다고 한다. 그녀의 오라버니도 나이가 먹도록 산에서 살겠다는 여자를 구하지 못해 혼자 몸이었다.
보리스는 가만히 여자를 쳐다보다 히죽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 오라비와 사이는 좋은가 보구나."
"...."
여자가 조심스레 보리스를 올려다본다. 보리스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오라비가 너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을만한 물건을 내게 다오. 이 일이 잘 되면 너는 물론이요 네 오라비까지 이 땅에서 살 수 있게 해주마."
그레데 왕국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었다. 본대는 선전포고문을 보냈던 관문 쪽에서 쳐들어오는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 산으로 넘어와 와토린구를 기습할 것으로 보인다.
놈들이 디코콰리아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와토린구와 그 너머에 있는 암염 지역이었다.
보리스는 이쪽에서 그레데의 기습군을 습격해 어느 정도 수를 줄여둘 생각이었다.
와토린구는 광대한 지역이다. 영주관이 있는 도시 외에도 여러 개의 도시와 산, 광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와토린구를 지키는 병사는 그리 많지 않다. 한정된 수의 병사로 와토린구 전체를 지켜야 하는 부담은 엄청나다.
약간의 술수를 씀으로써 적의 병사를 줄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뭐, 여기에서 상대를 이기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와토린구는 기본적으로 성에 틀어박혀 수비를 위주로 할 예정이다. 황제와 그렇게 약속을 해두었다.
그 때문에 와토린구에 있는 거의 모든 성은 몇 년 동안 부지런히 식량을 비축하고 틀어박힐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놈들에게 한 방 날릴 기회가 있다면 당연히 나가봐야지. 황제가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놈들의 발을 묶고 수를 줄일 방법이 있다면 두 손 두 발 모두 활용해서 놈들과 붙어봐야 할 것이다.
보리스는 손을 탁탁 털고 중얼거렸다.
"겨울산은 헛발 디뎌 죽기 딱 좋은 곳이지."
***
그 무렵, 루디가 이끄는 제국군은 여러 개의 도시를 지나 이제 겨우 푸테그린을 벗어나고 있었다.
눈길이라는 점도 있고, 군데군데 도시에 들려 식량과 물품도 보급했기 때문에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레데 왕국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그런 제국의 군대도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무리는 할 수 없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제국군은 진군을 멈추고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화덕처럼 돌을 둥글게 쌓고 불 마도구를 놓는다. 그 위에 긴 쇠막대와 쇠 냄비가 걸리고, 육포와 말린 야채가 들어갔다. 금세 여기저기에서 스튜 끓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루디는 병사들과 함께 어울려 불을 쬐고 스튜를 먹었다. 잠시 병사들과 환담을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고 나면 어느새 밤이다.
루디가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이미 난로 마도구와 몸 씻을 때 사용하는 통이 놓여 있었다.
루디의 잡다한 신변을 돌보는 보좌관이 천 주머니에 들어있는 비누와 수건으로 사용하는 천을 들고 들어왔다. 천막의 입구를 꼭꼭 여민 뒤 통 옆에 물품을 가지런히 놓는다.
"수고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물러가게."
보좌관의 얼굴이 약간 침울해졌다.
황궁 안에서는 모든 걸 시종이 하지만, 전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루디로서는 그게 훨씬 편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루디가 혼자 하겠다고 하면 슬퍼한다고 할까, 굉장히 서운해했다.
보좌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러면 잠시 뒤에 물건을 치우러 오겠습니다."
"그래."
루디는 보좌관이 나간 뒤 옷을 벗고 통 속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추위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서 근육이 뭉쳐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다.
찰방 찰방, 물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피부에 기분 좋은 자극이 닿았다. 공기는 차가운데 물은 따뜻하다.
조금 젖은 얼굴이 추워서, 루디는 몸을 조금 더 물속에 가라앉혔다.
턱이 따뜻한 물에 닿자 저절로 하아, 숨이 나왔다. 좋다. 약간 머리를 뒤로 젖히고 물속으로 몸을 조금 더 내렸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
순간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뜨거운 물이 입과 콧속으로 들어왔다.
하얀색의 뭔가가 하늘거리며 그의 얼굴을 건드렸다. 얼핏 보기에는 하얀색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그래, 머리카락이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친친 그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