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28화 (128/201)

#128 하늘의 벌레

주위가 대번 소란해졌다.

윌리엄 역시 놀랐다. 설마 서쪽마녀가 그런 소원을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두 조용히 하라!"

왕이 큰 소리로 외치자, 점차 소란이 가라앉았다.

"서쪽마녀야, 그대는 우리에게 그 황제의 목을 쳐달라는 것이냐?"

왕의 말에 서쪽마녀의 동작이 굳었다. 그렇게 보였다. 서쪽마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왕이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꽃이 피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잊고 모든 사람이 넋을 잃었다. 최소한 윌리엄은 그랬다. 사람을 뇌쇄하는 미소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 이 순간 알았다.

서쪽마녀가 방울 굴러가는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후후후후후후훗. 설마 그대들이 푸테그린 황제의 목을?"

비웃는 듯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서쪽마녀가 웃자 까마귀들도 따라 웃는 것처럼 깍깍깍깍 짧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의 부리가 모두 사람들을 향해 딱딱거리며 웃는다. 깍깍깍깍.

누군가가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 것 같다. 사람들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서쪽마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을 것입니다. 나 아닌 자가 어찌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 잠시나마 버틸 수 있을까. 그런 불가능한 일을 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서쪽마녀는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 황제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인물은 황제 곁에 있는 것들이 허락하지 않아요."

서쪽마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들도 황제의 근처에 가까이 갈 수는 있겠지요. 칼을 뽑는 단계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에게 진정 해를 입히는 단계에 이르면, 글쎄요, 운이 좋으면 도망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그대로 죽을 겁니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를 만큼 한순간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왕이 화가 나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마녀, 그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 무얼 원하는 거냐?"

서쪽마녀는 왕의 말에 들어 있는 비꼼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간단해요. 한 전장에 설 수 있게 해주면 됩니다. 지금 폐하와 나 사이 정도의 공간만 되어도 충분하죠. 조금 더 멀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얼굴을 보고 있을 정도의 거리만 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한 마디로 너희들은 제국의 황제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왕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윌리엄의 심정이 조마조마 해졌다. 왕은 난폭한 사람이다. 이런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받고 참을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잡았다. 장식용의 얇고 좁은 검이지만, 그것도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다. 장난감이 아니었다. 찔리면 당연히 죽는다.

'결국 마녀를 데려와놓고 죽이는구나.'

윌리엄은 속으로 탄식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개를 퍼덕였다.

순식간에 허공이 까마귀로 가득 차고 사방이 새의 날갯짓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까마귀가 왕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으악! 이, 이것들을 치워라! 이 새들을 죽여버려!"

왕이 소리쳤지만, 주변에 있는 병사들도 어쩔 도리가 없다. 까마귀는 병사들과 다른 사람에게도 달려들고 있었다.

"끄아악, 까마귀가 눈을!"

병사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져 뒹굴었다.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있지만, 손바닥 밑으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사람들의 눈을 집요하게 노렸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이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모두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마녀여! 멈춰라! 제발 멈춰!"

왕이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쳤다. 근위병들이 왕의 몸을 덮어 보호했지만, 까마귀가 집요하게 쪼는 통에 몇 명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서쪽마녀가 어깨에 앉은 까마귀를 향해 뭔가 말하자, 갑자기 까마귀 떼의 공격이 멈췄다.

난장판이 된 곳에서, 마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나는 반드시 이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 없다면 나는 이곳에서 떠나 다른 나라를 찾겠습니다."

이미 선전포고까지 보내놓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 마녀를 떠나보낸다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녀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녀여, 그대의 제안을...수락하겠다."

왕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윌리엄은 이 끝이 그다지 좋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은 마음이 좁은 사람이다. 결코 이 모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

"...."

며칠간의 여행 동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서쪽마녀는 무시무시한 느낌인 것이 사실이고 이런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벌이는 걸 보면 보편적인 여성도 아니다. 어쩌면 끔찍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외로 인간적이고 순수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 세상의 권모술수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익숙하다면 이런 식으로 눈에 띄게 원한을 사는 방법을 취할 리 없다.

어쩌면 인간과 접촉하지 않고 숨어 살았기 때문에 세상살이에는 상당히 서툰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왠지 걱정되는걸.'

그 뒤, 왕의 명령에 따라 마녀의 신변은 윌리엄이 돌보게 되었다. 호위에서 기타 필요한 물품 같은 것도 모두 윌리엄의 책임이다. 서쪽마녀를 맡으려는 시녀도 없었던 것 같다.

윌리엄은 얼굴을 찡그렸다. 곤란하다.

마침 근처에 호위대에 함께 배정된 부하가 있었다. 얼마전에 결혼한 녀석이다. 윌리엄은 그 병사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이봐, 여자한테는 뭐가 필요한지 알아? 밥 외에 말이야."

"글쎄요. 돈일까요?"

"그건 뭐야. 장난하지 말고. 진짜 급하다. 당장 오늘 밤부터 마녀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아놔야 해."

"하아, 대장님. 그건 저한테 묻지 마시고 이곳에 있는 시녀라도 한 명 붙잡아 물어보세요."

"야, 이 면상을 보고 말해라."

"...."

윌리엄은 예전부터 여자한테 인기가 없다. 검의 실력은 상당히 괜찮다고 자부하지만, 험악한 얼굴과 덩치가 여자들에게는 야만인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에스코트도 교양의 하나로 몸에 익히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써먹을 기회라고는 어머니와 누님한테 뿐이었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병사의 말에 윌리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진짜 살았어."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대장님도 고생이네요. 마녀의 호위에 시중까지."

그러게 말이다. 윌리엄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서쪽마녀는 어째서 제국의 황제를 원하는 걸까. 설마 정말로 그 사람의 목을 원하고 있는 건가? 황제의 곁으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빛의 새일까.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

군대가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지금은 한겨울이다.

도로가 잘 닦여 있는 지구에서도 한겨울 눈이 내리거나 길이 얼어붙으면 교통이 마비가 되는데, 제대로 된 도로조차 드문 중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때로는 눈으로 덮여 바닥이 안전하지 못한 지역도 있다.

안내인을 미리 교섭해두었기 때문에 최악의 일은 없었지만 제국의 군대는 가는 길목마다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선발대가 확인한 지역을 그대로 짚어가며 천천히 이동하고 여러 번 휴식시간을 가져야 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루디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잔뜩 움츠린 병사들의 등이 애처롭다.

그중 유난히 어려 보이는 병사가 있었다. 당연히 노예병이다. 허리에 긴 마도병기를 달고 있는 걸 보면 저격병일 것이다.

"신병인가? 어린 나이에 저격병이면 상당한 실력이구나."

루디가 말을 걸자 어린 병사가 바짝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에 의해 삼년 전 노예에서 저격병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아, 그때 올라온 병사로군."

몇 년에 한 번 루디는 황제의 특별 명령을 내려 노예 가운데에 묻혀 있는 재능의 소유자를 찾아낸다. 이 어린 병사는 그때 발굴한 모양이다.

루디는 툭툭, 어린 병사의 등을 쳐주고 히죽 웃었다.

"그때 올라왔으면 상당한 재능이로군. 기대할 테니 열심히 해라."

"감사합니다!"

어린 병사의 코끝이 새빨갛다.

몇 년 동안 루디는 황궁뿐 아니라 군대에도 각종 마도구를 보급해왔다.

남작 부인의 남편 세렌 남작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마도구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렌 남작은 박리다매라는 개념이 없는 이 시대에 아마 최초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일 것이다. 특권 계층만 사용하는 비싼 도구라는 생각을 버리고, 정말 저렴하게 공급해 주었다.

덕분에 제국은 엄청난 양의 마도구를 보유하고, 세렌 남작 역시 예전에 보지 못했을 만큼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루디는 병사들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괜히 마도구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써야 할 때는 마음껏 써. 너희들의 몸이 굳어 움직이기 어려워지는 게 더 곤란한 거다."

신병들은 잔뜩 긴장해있지만, 루디와 함께 훈련한 경험이 있는 병사들은 겁먹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옛! 알겠습니다, 폐하."

"오히려 몸이 후끈후끈해서 문제입니다!"

근처에 있던 백인장이 가까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겨울에 이동을 하면 꼭 동사자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동사자는커녕 동상 걸린 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대도 특별히 하급 병사들에게 신경을 써라. 겨울은 병사에게 힘든 거야. 나도 잘 알지. 여러 해 전에 와토린구에서 있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폐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루디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나도 노예 출신이니까."

그 이야기는 많이 퍼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루디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그건 또 각별한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노예병 중에서는 문득 깨닫고 보면 울고 있는 자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불쌍한 노예는 아니었으니까 울 필요 없다.

루디는 우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치고 말했다.

"춥고 배고픈 것만큼 슬프고 괴로운 일도 없지. 쉴 때만큼이라도 마도구는 충분히 써. 황제의 명령이다."

"옛! 알겠습니다, 폐하!"

루디의 말에 병사들이 눈을 반짝이며 합창하듯 대답했다.

잠시 쉬는 동안, 길을 파악하기 위해 며칠 앞서 출발했던 선발대가 돌아왔다.

선발대 대장이 강아지처럼 온몸의 눈을 탁탁 턴 뒤 가까이 다가왔다. 선발대 대장 옆에 있는 이 지역의 안내인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선발대 대장의 모습을 보고 다른 대장들이 다들 근처로 몰려왔다.

"폐하, 앞으로 하루 정도 거리에 약간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본래 가려고 했던 지름길이 막혔어요. 며칠 전에 큰 눈이 내릴 때 막힌 듯합니다."

선발대 대장이 눈짓을 하자, 안내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곳은 겨울이 되면 자주 막힙니다. 하지만 막히는 구간은 굉장히 짧기 때문에 눈만 녹일 수 있다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선발대 대장이 말을 이었다.

"돌아가면 십여 일은 족히 걸리니, 시도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하지만 조심해야 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돌아가는 쪽이 오히려 낫다."

"알고 있습니다."

선발대와 안내인은 곧바로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이번에는 루디가 만든 빛의 생쥐들이 백여 마리 따라간다.

병사들이 땅에서 솟은 듯 갑자기 나타난 생쥐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미친 듯이 흔드는 병사도 있다.

"수고하세요!"

"생쥐님들, 조심!"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백인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놈들은 신성한 마생물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자기 친구들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괘씸한 놈들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인장도 웃고 있다.

루디도 어깨를 으쓱한 뒤 빙그레 미소 지었다. 눈 쌓인 곳을 만날 때마다 생쥐들이 활약하다 보니 어느새 마생물은 제국의 병사들에게 동료 취급이다.

생쥐들도 그게 싫지 않은지 가끔은 일부러 병사들 앞에서 꼬리를 기묘하게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생물들도 점점 인간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그 드래곤처럼 말도 하게 되는 걸까.'

루디는 병사들이 불마도구와 전기난로 효과를 지닌 마도구를 꺼내 몸을 데우는 것을 보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마녀와 그 빛의 드래곤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언젠가 그 일도 해결해야 할 텐데.'

문득 뭔가가 하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봉황의 수컷이 춤을 추듯 한 점을 향해 날아갔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작은 아지랑이 같은 빛을 봉황이 삼킨 것 같았다.

[끼에엑!]

아주 작은,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비명 같은 것이 공기를 진동하며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봉황 수컷은 아무것도 아닌 듯 루디의 곁으로 날아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었어?'

루디가 마음속으로 묻자 봉황이 가만히 루디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문지르며 가르르, 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벌레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글쎄, 단순히 벌레였을 것 같지는 않지만 봉황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마생물이 느끼는 건 완전히 달라서, 가끔은 루디조차 봉황의 생각을 알 수 없다.

문득 하늘을 보자, 봉황의 암컷이 경계를 하듯이 하늘을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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