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27화 (127/201)

#127 서쪽마녀가 원하는 것

제국에서 전쟁은 남자들의 것이다. 여자가 끼일 틈은 없었다. 여자는 군대가 떠날 때 그 앞에 서서 배웅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리리샤는 황궁 안에서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밖으로 달려가 마차를 탔다. 오늘만큼은 그녀가 선머슴처럼 치마를 들고뛰어도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았다.

리리샤가 탄 마차는 곧바로 황궁에서 가장 외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높은 탑이 있다. 거기에서라면 멀리까지 보일 것이다.

마차가 탑에 도착하자, 제대로 멈추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뒤따라온 마차에서 남작 부인과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멀리 가버린다.

리리샤는 탑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 가파른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쉬지 않는다.

계단을 한참 뛰어오르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벌어진 입으로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이제 죽을 것 같아. 도저히 안 돼.

그런 생각이 열다섯 번쯤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고, 마침내 열여섯 번째 들 무렵에야 간신히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탑의 창문은 높다. 키가 작은 리리샤의 얼굴은 창문에 닿지 않았다. 어쩌지, 이래서야 볼 수 없다.

당황해서 콩콩 뛰어오르며 창문 밖을 보려던 리리샤의 옆에서 갑자기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발판이 있습니다. 발판을 밟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언제 따라온 거야?

리리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자, 시종장이 히죽 웃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폐하께서 떠나버리십니다. 자, 이쪽으로. 조심하세요."

아래를 보니,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나무 발판이 놓여 있었다. 시종장이 놓아준 모양이다.

"고마워."

리리샤가 발판에 발을 올리자, 시종장이 손을 잡아주었다.

발판 위에 오르자, 탁 트인 하늘과 저 멀리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루디와 병사의 모습은 금방 찾았다.

그들은 황궁을 막 나서 황도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검은 말을 탄 루디가 백성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루디의 주변에는 봉황 두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하늘이 축복해 주고 있는 듯 보였다.

백성들이 루디와 병사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들리지 않는 환호성이 탑 안에서 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아직 어린 모습이 남아있는 루디지만,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제국이 자랑하는 황제, 그대로였다.

평상시라면 그 모습에 가슴이 쿵쿵하고 두근거리며 행복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오늘은 애절할 뿐이었다.

저 등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는 걸까. 저 사람이 앞으로 가는 길목에는 얼마나 많은 죽음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제발, 이 몸의 모든 것을 바치오니, 신이여 우리 황제를 지켜주소서."

리리샤는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며 멀어져 가는 루디의 뒷모습을 보았다.

개미처럼 조그마하던 루디의 모습은 점점 더 작아져,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리리샤의 시선은 도시 먼 저편에 못 박힌 듯 부어져 있었다.

***

"앞으로! 진군!"

호령에 따라 수만의 병사들이 저벅저벅 앞으로 걸었다.

특색 없는 옷에 조끼형의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목에는 대부분 노예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대대로 푸테그린 제국의 황제가 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노예병에 있다.

제국은 큰 전쟁이 있을 때 귀족에게 징병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강력한 마도 병기와 노예병에 의존했다.

그 때문에 귀족의 힘이 다른 왕국에 비해 적다.

하지만 황실의 마력소유가 줄어들고 힘이 약해지면서, 귀족의 발언권이 조금씩 커지는 추세였다.

그러나 루디가 황제가 됨으로써 그런 경향도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이번 전쟁은 외국에 대한 경고도 되지만, 동시에 제국 내의 귀족에게 황제의 힘을 과시하고 쐐기를 박는 의미도 있는 셈이다.

너희들의 황제는 역대 황제 그 누구보다 강대한 마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헛된 생각은 하지 말라고.

특히 지금의 노예병은 모두 루디가 주문을 넣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 목걸이에는 거짓말 탐지기와 전기충격기 주문이 들어 있어서,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노예는 모두 걸러진 상태였다.

귀족들은 그런 주문의 내용까지는 모른다. 코레아 왕조 가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황제가 주문을 넣었다는 사실까지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노예병들의 충성심이 유례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이 세계 누구보다 사람이 평등하다고 배워온 내가 오히려 같은 인간을 가장 억압하고 있다니.'

리리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더러운 황제의 일면이다.

병사들이 지나간 뒤를 따르는 것은 수송부대였다.

식량과 각종 물건을 실은 수레가 줄을 지어 병사들 뒤를 따른다. 수레 한대에 열 명가량이 달라붙어 있었다. 수송부대 역시 노예가 많다.

루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현대도 그렇지만 중세에도 군대를 유지하는 건 돈이 든다. 아주 많이 들었다. 전투 노예를 사용하는 데 저항이 있었던 자신조차 용납해버릴 정도로.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노예병을 빼고서는 군대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루디는 한동안 황제로서의 자신과 지구인이었던 과거를 저울질했지만 결과는 노예병의 확충과 재정비로 나타났다.

전투노예 중에서 능력 있는 이는 마도병기를 다루는 전투 노예로, 사람을 부리는데 두각을 보이는 사람은 노예병의 신분이지만 십인장으로 올린 건 그나마의 속죄요 자기합리화다.

일반 노예병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십인장이 되면 노예병도 약간의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런 승진 시스템은 노예병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아직 오십인장이 된 노예병은 없지만, 이번 전쟁에서 잘하면 노예병 출신의 오십인장이 나올지도 모른다.

군대는 어느새 제국의 황도를 한참 벗어났다. 가는 길목마다 그들을 반기던 백성의 목소리도 이제는 완전히 멀어져, 주위는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와 흙길뿐이었다.

루디는 슬슬 말을 몰아 병사들 사이를 거슬러 나아갔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다. 불안해하는 자는 없었다. 식량도 충분했다. 제국은 몇 년 동안 유례없을 만큼 풍작이었다.

루디가 황제가 된 덕분에 신이 기뻐하는 거라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기묘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들었다.

그레데 왕국의 행동도 미리 예상한 대로다. 그 나라의 왕은 욕심이 과해, 더 빨리 일을 벌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어디에도 불안해할 징후는 없다. 하지만 루디의 마음은 밝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어째서 겨울이지?'

전쟁을 한겨울, 추운 시기에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년씩 걸리는 큰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추운 시기도 중간에 끼게 되지만, 이렇게 겨울에 시작하는 전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데 어째서 그레데 왕국은 이 시기를 택한 걸까.

디코콰리아의 상황이 악화되어 지금 건드리면 쉽게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카니아의 상황 역시 최악이라, 지금의 디코콰리아는 거의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망설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 먼저 손을 댈 거라고 조바심을 낸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그레데 왕국 자체의 문제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레데 왕국은 제국과 정반대로 흉작이었다. 게다가 장성한 황태자와 호전적인 왕자들 때문에 정치적인 상황도 어수선하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레데의 왕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사람들의 시선을 국외로 돌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디코콰리아의 암염 지역은 광산을 팔 만한 돈과 기술력이 없기 때문에 소금이 조금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카니아가 자국의 상황이 힘든데도 디코콰리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시종장이나 군부의 인물들도 그렇게 예상했다.

루디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씩 따져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뭔가가 이상하다고 속삭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

루디는 불안을 숨기며 병사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각자에게 말을 걸어 격려를 하고 지나간다.

말을 몰아 중앙으로 향하다 보니, 몇몇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황제가 되기 전, 보리스에게 함께 훈련을 받던 마도병들이다.

그들은 이제 각자 마도병을 책임지는 오십인 장이나 백인장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관록이 생겨, 예전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디가 그들을 향해 말을 몰아가자, 절도 있는 모습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중 한 명은 예전 너무 긴장해서 싸우던 와중에 똥을 싸고도 몰랐던 일이 있다. 그때 일로 그의 별명은 똥싸개다. 하지만 지금의 점잖은 모습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히죽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봐, 똥은 미리 싸고 왔나?"

주변 병사들이 와하하 하고 크게 웃는다. 똥싸개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폐하까지 그러십니까. 모두 저만 보면 똥 싸고 왔냐고 해서 이제 모두 알아요.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아직까지 하는 건지. 다들 너무합니다."

똥싸개는 울상이지만 다들 재미있다고 웃고 있었다.

루디는 그들과 몇 마디 더 우스갯소리를 한 뒤 다른 병사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모두 순조롭다. 어디에도 불안할 구석은 없었다.

'내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맑은 하늘 아래서, 루디는 병사들에게 히죽 미소를 보였다. 그가 감추고 있는 불안함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봉황 두 마리가 그의 곁으로 날아와 춤을 추듯 허공을 돌아다녔다.

***

마녀는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서쪽마녀는 생각보다 훨씬 취약한 사람이었다. 여느 여자들보다도 몸이 약한지, 마차 여행을 잘 견뎌내지 못했다.

윌리엄은 잠시 멈추었던 마차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마녀님, 괜찮습니까."

"...네."

안에서 약한 소리가 나왔다. 마차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곧잘 멀미를 한다. 그것은 서쪽마녀도 마찬가지여서 벌써 여러 번 토하고 있다.

"이제 출발합니다. 혹시 괴로우시면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네."

윌리엄이 신호를 보내자,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면 갈 거리를 벌써 며칠째 걷고 있는 건지. 약간 한심해졌다.

이제 한 시간 뒤면 겨우 왕이 기다리는 도시에 도착한다. 보나 마나 불호령은 그에게 떨어질 것이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까마귀를 잔뜩 지붕에 이고, 먹구름 처럼 하늘에서 졸졸 따라오는 까마귀 떼를 이끌면서 마차가 굴러간다.

한참을 간 뒤에, 왕이 머물고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한 시간쯤 전에 미리 한 명을 보내 도착한다고 기별을 한 터라, 도시 입구에는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위와 하늘에 떠 있는 까마귀를 본 안내자가 깜짝 놀란다. 얼굴 가득 두려움이 보였다. 뭐,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래도 폐하 옆에 있는 관리다. 금세 마음을 다잡고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폐하께서 며칠째 짜증이십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서 안내자가 살짝 귀띔을 했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미리 알고 있어본 들 아무 소용 없다. 하늘에 까마귀 먹구름이 떠있지만 윌리엄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한창이었다.

영주관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건물 앞에 나와 있었다. 왕까지 함께다. 왕의 주변은 병사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마녀가 대단하다 해도 설마 왕이 일부러 마중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궁금했던 것이리라.

'누군가가 마녀의 까마귀 이야기를 했나 보군.'

마차를 멈추자 하늘에서 날던 까마귀가 커다랗게 회전하더니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사방이 까마귀 천지가 되자, 사람들 사이에서 두려움 섞인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윌리엄이 마차 문을 열자, 서쪽마녀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보통 여성이 마차에서 내리면 에스코트하지만, 윌리엄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까마귀 몇 마리가 톡톡 튀어 서쪽마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한 마리는 서쪽마녀의 어깨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서쪽마녀에게 다가간 몇 마리의 까마귀가 뒤뚱뒤뚱 걷더니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톡톡 뛰듯이 움직인다. 마치 이쪽이 길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서쪽마녀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지만, 어깨에 앉은 까마귀가 까악, 까악, 하고 몇 번 울자 걷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미리 걸었던 그대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움직인다.

앞선 까마귀가 징검다리 건너듯 발자국을 찍으면 어깨에 앉은 새가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린다. 서쪽마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몇 명은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났다.

다만 그레데 국왕 만은 삼킬 듯이 서쪽마녀를 보고 있었다.

서쪽마녀는 일반적인 드레스가 아닌, 몸에 흐르는 듯 붙어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몸의 굴곡이 모두 드러나는 옷이다. 탐스러운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서족마녀가 왕의 앞까지 가서 서자, 국왕이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서쪽마녀의 몸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마녀여, 우리나라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대가 푸테그린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나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해도 좋다."

왕의 말이 떨어지자, 서쪽마녀가 대답했다.

"관대한 그레데의 국왕이시여,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말해보라."

"나는 제국의 황제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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