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남편을 덮치기로 했다
푸테그린 제국이 카니아와 그레데 왕국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안으로 퍼졌다.
리리샤는 시녀들의 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입에 물고 있던 과일 절임이 치마 위로 툭 떨어졌다.
"정말이야?"
"예, 마마. 확실한 소식입니다. 조금 전에 폐하께서 그리 명령하셨답니다. 시종이 알려줬어요. 내일 모레 출발이라고 합니다."
"전쟁이라고...."
리리샤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시녀 한 명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마마, 마음을 확고하게 가지세요. 괜찮으실 겁니다.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강한 분이시니까요. 분명 전쟁에 나가셔도 무사하실 거예요."
리리샤는 벌떡 일어니 발을 쾅쾅 굴렀다.
고치려고 노력은 하지만, 화가 나면 자기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나온다.
시녀들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몇 명이 안타까운 듯 리리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달래는 것처럼 말한다.
"마마, 걱정 마세요."
"폐하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럼요, 폐하께는 빛의 생물들이 있으니까요."
시녀들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리리샤는 고개를 들어 시녀들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루가 무사한 건 당연하잖아. 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야. 걱정을 해야 한다면 그건 루가 아니라 그레데 놈들이라구."
"어."
"예?"
"저, 마마...."
시녀들이 어리둥절한 가운데 타이라가 물었다.
"마마, 그러면 왜 그렇게 충격을 받으신 거예요?"
그 말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리리샤는 바닥을 쳐다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새해 연회 다음 날에는 분명 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없었고, 그 다음 날에도 분명 이번에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했는데 또 넘어갔고. 그래도 참고 기다렸는데. 나는 황후니까 폐하가 말할 때까지는 기다린다고 마음 먹었는데."
타이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마, 뭘 기다리고 계셨는데요? 뭐가 온다고 생각하셨어요?"
"첫날밤!"
리리샤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하자, 걱정스럽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던 시녀들이 조용해졌다.
리리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 기대했단 말이야, 첫날밤."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15살이 되면 성인이다. 더 이상은 아이가 아니야.
게다가 루디는 벌써 17살이다. 15살에서 한참이나 더 먹었다.
태상황제는 그 나이가 되기 전에 첫 아이를 보았다고, 태상황후가 만날 때마다 매번 그 이야기를 했다.
태상황후는 남편보다 세 살이나 위였지만, 그 이야기는 쏙 뺀 채 였다. 여우같은 할망구! 자신은 리리샤보다 훨씬 나이 먹어서 아이를 낳았으면서.
아니, 지금의 문제는 그게 아니다. 태상황제나 상황후 따위야 아무래도 좋아. 지금 리리샤 앞에 닥친 문제는 루디다.
리리샤는 확신을 담아 중얼거렸다.
"성인 남자는 여자 없이 자지 않는다구."
왠지 시녀들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몇 명을 제외하면 그녀들은 대부분 미혼 여성이다.
리리샤는 기혼, 시녀들은 미혼.
누가 더 남자를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자신이겠지.
태상황후가 여는 다과회에서도, '기혼'여자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말이죠, 열 여자 마다않는 짐승이에요. 손 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먹어 치우죠. 어머, 자신의 부인이 처녀인 남자?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하네요. 내가 아는 먼 친척 부부인데, 그런 경우가 있다더군요. 후훗,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결혼했는데도 아직까지 첫날밤도 없었을까.
빙 둘러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폄하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미소짓고 있었지만 가슴 아팠다.
이 세상 모든 남자는 짐승인데 어째서 루디만 인간이야, 라고.
이성 따위 저 먼 황무지에다 버리고 덥쳐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확!
하지만 리리샤는 알고 있었다. 루디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다. 아직 어린 리리샤를 위해서 짐승의 본능을 닫아두고 있는 거다.
자신에게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루디는 단지 리리샤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려주는 거라고 믿었다. 루디는 좋은 사람이니까.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다리는데 매일 눈 떠보면 침대에는 그녀 혼자만 덜렁 남겨져 있어. 매일 아침마다 밤에 루디가 오지 않았는지 시녀에게 묻는 것도 이제는 부끄럽다.
"이제 참지 않겠어."
리리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마, 그렇게 무시면 피가 나요."
타이라가 당황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아래에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황후의 몸에 피가 나면 곤란한 것은 시녀들이다. 미안, 흥분해서 잠시 잊어버렸어.
리리샤는 혀끝으로 피를 핥아 빨아들인 뒤,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힘차게 말한다.
"오늘 밤 황제 폐하의 방으로 갈 거야. 말리지 마!"
"에에엣!"
"마마!"
"맙소사, 마마가 드디어."
시녀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다. 타이라는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녀들의 마음은 안다.
황제의 방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드나드는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여자와 밤을 지낼 때는 상대방의 처소로 찾아가는 것이 관례다. 여자가 황제의 방으로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상대가 너무 점잖아서 짐승이 되지 못한다면, 이쪽이 짐승이 되어주는 수밖에 없잖아?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남작 부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리리샤는 남작 부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도 조용해졌다.
아, 분명히 또 혼나겠지.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게 농담처럼 가라앉아버렸다.
"알겠습니다, 마마."
남작 부인이 그렇게 말하더니 시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러분은 모두 잠시 나가주세요. 마마께 침실의 작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
시녀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작 부인을 보았다.
리리샤도 마찬가지다. 방금 들은 게 확실히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맞았나? 혹시 여우나 까마귀가 둔갑해서 낸 목소리 아냐?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시녀들이 어리둥절,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조용히 다들 나간다.
"타이라, 그대도 나가세요."
남작 부인이 말하자, 타이라도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모두 방에서 나가자 남작 부인이 리리샤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아무도 마마의 불안은 눈치채지 못했어요."
"...."
리리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초원 전쟁 때의 일이 생각나셨습니까?"
"...."
끄덕, 고개를 한 번 숙이자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으로 울려 퍼졌다.
"마마, 잠시 몸에 손대는 것을 용서하세요."
남작 부인이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말 잘 참으셨습니다. 폐하를 위협하는 마생물이 있다는 일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죠. 정말 잘 하셨어요."
"...루가...아무리 강해도...위험은 항상...."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리리샤는 남작 부인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가 남작 부인의 가슴에 숨겨져 작게 흘러나왔다.
리리샤가 진정될 때까지 남작 부인은 계속해서 그녀를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마침내 울음소리가 잠잠해지자, 리리샤는 훌쩍훌쩍 코를 울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흑...첫날밤 얘기도...흑...정말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마마가 굉장히 기다리고 계신 거, 잘 알고 있어요."
남작 부인이 작게 웃었다.
"근데, 침실의 작법은 뭐야?"
리리샤가 묻자, 남작 부인이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차려진 밥상은 먹지 않으면 수치. 폐하께 그렇게 말씀해보세요."
"...."
그게 뭐야. 그런 건 침실의 작법이 아니지 않아?
하지만 남작 부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지금은 폐하께 모두 맡기면 됩니다."
"...."
어쨌든 좋아. 리리샤는 오늘 진짜 루의 부인이 된다.
*
날이 어두워지자 시녀들이 리리샤의 몸을 따뜻한 물로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처음 사용하는 향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마무리한다.
옷은 어째서인지 보통 때 입고 자는 헐렁한 치마였다.
시녀들이 모처럼이니 뭔가 다른 걸 입히고 싶어 했지만, 남작 부인이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금지해버렸다.
조금 안타깝다. 이날을 위해 황실에 출입하는 상인에게서 구입해놓은 야한 옷이 몇 개 있는데.
듣기로는 귀부인들이 은밀하게 구입하는 옷이라고 한다. 그걸 입으면 남자들이 홀딱홀딱 반해버린다던가.
'어쩔 수 없지. 워낙 날씨가 추우니까.'
황후가 감기라도 걸리면 시녀들에게도 책임 문제가 걸린다. 남작 부인의 걱정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혹시 시종이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어쩌지. 조금 걱정이다. 아무리 황후라 해도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허락을 받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곤란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졸음이 쏟아졌다. 이런 시간까지 깨있어 본 적이 없다. 리리샤는 꾸벅꾸벅 졸다가 소파에 엎어져 본격적으로 잠이 들었다.
타이라가 침대에 눕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그랬다가 다시 못 일어나면 어쩌려구. 절대로 안 된다.
한참 잔 것 같다.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서 일어나자, 타이라와 시녀들이 리리샤를 둘러싸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침대에 오르신지 한 시간쯤 되었습니다."
남작 부인의 말에 시녀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다들 긴장해서 얼굴이 굳었다.
리리샤는 벌떡 일어났다.
"가자!"
긴장 때문에 주먹을 움켜쥐자, 남작 부인이 두꺼운 털 외투를 리리샤의 어깨에 걸쳤다. 모자가 달려있는 망토였다. 남작 부인은 목까지 꼭꼭 채워서 끈으로 묶은 뒤 머리에 모자를 씌웠다.
"이 차림으로 복도는 추워요. 감기에 걸리시면 큰일입니다."
남작 부인이 신발을 바꿔 신기면서 말한다.
하지만, 모처럼 남편 침실에 쳐들어가는 마당에 보송보송 털 달린 신발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타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 입모양으로 털 신발은 매력 빵점이라고 소곤거렸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리리샤를 가운데 두고 시녀들이 빙 둘러싼 채 밖으로 나갔다.
여자들의 무리가 차가운 황궁의 복도를 타박타박 걸어간다.
가끔 밤늦게 일을 하고 있는 시종이나 순찰을 도는 호위병을 만났다.
하지만 눈에 불을 켠 듯 긴장하고 있는 시녀들 무리에 말을 걸거나 어디로 가느냐고 검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리샤는 아무런 제지 없이 황제의 처소에 도착했다.
황제의 방 앞에는 문 여닫는 걸 담당하는 시종과 문을 지키는 호위병이 서 있었다.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어쩌지?'
조금 걱정이 됐다.
남작 부인이 가장 앞으로 나가자, 가만히 서 있던 호위병들이 찰칵 소리를 내며 무기를 조금 들었다.
"!"
호위병들이 움직이는 건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직무인 줄 알았을 정도였는데.
남작 부인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했다.
"황후 마마십니다. 감히 무기를 들이대려 하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화가 난 목소리였다.
하지만 호위병은 조금도 겁먹거나 주춤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폐하의 방에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설혹 황후 마마라 할지라도 말인가요?"
"...."
호위병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는 거구나. 리리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허긴 그렇지. 황제의 방에 아무나 설렁설렁 들어갈 수는 없는 거다.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말이다.
리리샤는 이대로 방에 돌진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시녀들이 벌을 받는다.
리리샤는 망토 밖으로 손을 내 남작 부인의 옷을 살짝 잡았다.
"그냥 가자."
리리샤가 막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정면이 아닌,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문에서 시종장이 나왔다.
시종장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복도를 걸어오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남작 부인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시종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분은 안 됩니다. 황후 마마만이라면."
그렇게 말하더니 호위병에게 살짝 시선을 주었다.
호위병이 다시 무기를 원래 장소에 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종이 문을 연다.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어쩌면 리리샤일 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른 시녀일지도 모른다.
타이라가 힘내라는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리리샤는 긴장한 몸을 삐걱삐걱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목각인형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등 뒤에서 문이 조용히 닫히고,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커다란 방의 모습이 보였다.
방 저편, 커다란 침대에 길게 천이 늘어져 있다.
'저 안에 루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 꿀꺽, 시간을 두고 울렸다. 자신이 내는 소리인데도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삐거덕거리며 걸어간다. 뒤꿈치가 터진 털 신발이 질질 끌려 소리를 냈다.
침대 옆까지 가서 커튼을 살짝 젖히자,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조금 흩어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왠지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귀엽다."
그렇게 소리 내고 나서야, 리리샤는 자신이 이다음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작 부인은 루디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지금 루는 자고 있잖아!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모자를 벗었다. 얼굴에 피가 모여서 굉장히 더웠다. 망토를 묶고 있는 끈에 손을 댄 뒤에야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는 걸 알았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후우. 후우."
심장아 제발 그만 떠들어라.
리리샤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끈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끈의 여밈은 풀기 쉽게 되어 있었다. 긴 끈을 살짝 당기자 망토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그래, 일단은 함께 누워야지. 그래, 눕자."
리리샤는 허둥지둥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너무 두근거리니까 숨쉬기가 괴로워졌다.
엉금엉금 기어서 루디의 옆으로 간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디가 항상 리리샤에게 해주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다.
"괜찮아, 루. 아프지 않으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아니, 이게 아닌가? 너무 당황해서 뭔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괜찮으니까. 부부는 다 하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이것도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뭔가 말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다. 리리샤는 루디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대로 옆에 누운 뒤 몸을 바짝 붙인다. 루디의 팔이 가슴에 닿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루디의 옆모습을 보자, 잊어버렸던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팔을 뻗어 루디의 몸을 끌어안은 뒤,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절대로, 꼭, 내게 무사히 돌아와야 해. 약속이야, 루. 나, 아기랑 함께 기다릴 테니까요. 루를 많이 닮은 아이랑 계속 기다릴 테니까. 제발 무사히 내게 돌아와, 루."
리리샤는 눈을 감았다가 자신이 한 가지 잊어버린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루디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갖다 대었다.
한 번 입술을 누른 뒤,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여러 번 입술을 맞춘 뒤 작게 속삭였다.
"이건 내가 주는 마법이에요. 무사히 돌아오라는 마법. 잠자는 숲속이 미녀가 되지 말라고, 미리 주는 거야."
다시 루디의 옆에 누운 뒤, 한동안은 심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이불 속에서 귀를 기울이면 루디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에 안심이 되어 조금씩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는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
'이게 무슨 고문이야.'
루디는 천정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리리샤가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잠에서 깨어 있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때 일어나면 귀찮게 될 게 뻔히 보였다. 남작 부인에, 시종장까지 한 통속이다. 그 자리에서 리리샤를 돌려보내려고 하면 시끄러울 건 뻔했다. 게다가 리리샤도 울 테고.
그래서 리리샤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하도 귀엽게 행동하길래 잠시 두고 보았다. 게다가, 흠, 이런 결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리리샤에게는 남녀 간 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그래, 알고 있었어.
이 시대의 여자들은 대부분 남편이 알아서 해줄 테니 가만있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시집을 간다.
간혹 가문의 관례나 황실, 혹은 왕가의 방침으로 남녀 관계에 대해 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소수의 이야기일 뿐이다.
TV나 영화는 물론 소설조차 드문 이 시대에 집안 깊숙한 곳에서 자라는 귀족 여성은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다. 순수배양된, 티 하나 없는 맑은 샘물이다.
"그래도, 같이 이불 속에서 자면 아이가 생긴다고 믿다니."
남작 부인, 이건 너무 교육이 모자란 게 아닐까.
루디는 새근새근 잠이든 리리샤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조심조심 팔베개를 해주었다.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지만, 당연히 잠은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날밤을 새야 할 것 같다.
"마법의 키스는 고마웠어요, 부인."
루디는 작게 웃으며 리리샤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