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선전포고
"그, 저는 앞으로 마녀님의 안전을 책임질 그레데 왕국의 호위대장 윌리엄입니다."
서쪽마녀가 검은 눈을 윌리엄 쪽으로 돌렸다. 역시 맹인이다. 소리를 듣고 방향을 가늠하는지 윌리엄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시선이 묘하게 맞지 않았다.
"그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압적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등장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윌리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성함을 여쭤보아도...."
윌리엄의 말에 서쪽마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주 조금,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주위에 있는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며 까악, 까악 울기 시작했다.
몇 마리는 동그란 눈을 윌리엄에게 돌리며 험악하게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으아악!"
"뭐, 뭐야!"
"마녀의 저주다!"
호위 병사들이 깜짝 놀라 반대 방향으로 뛴다.
윌리엄 역시 섬뜩한 마음에 주춤하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까마귀들은 더 이상 윌리엄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날 선 모습으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서쪽마녀는 까마귀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오직 한 명만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는 묻지 마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까마귀들이 옆에서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윌리엄은 어색하게 웃었지만, 이 여자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깊은 뜻은 없습니다. 그러면, 마녀님, 이쪽으로 가실까요."
윌리엄은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서쪽마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자신이 손을 내민 것도 모를 것이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여기, 제 손을 잡으세요."
하지만 서쪽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내게는 이 아이들이 있으므로."
서쪽마녀의 말이 끝나기 전, 까마귀 몇 마리가 톡톡 뛰어 그녀의 옆으로 갔다.
몇 마리가 날개를 펴고 윌리엄을 위협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눈을 쫄 것 같다.
윌리엄은 서쪽마녀의 앞에서 물러나 약간 떨어진 곳에 섰다.
서쪽마녀의 옆으로 간 까마귀 한 마리가 훌쩍 날아올라 마녀의 어깨에 올라섰다. 그리고 목만 조금씩 돌려 사방을 바라본다.
마녀는 움직이지 않는데, 까마귀만 사방을 동그란 눈으로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깍, 깍, 작은 소리로 짧게 몇 번 울었다.
서쪽마녀는 까마귀의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소리에 맞춰 조용히 발을 움직였다.
눈동자는 어설프게 허공에 고정되고 동작이 약간 어색했지만, 서쪽마녀는 마차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처럼 곧바로 그 앞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마치 까마귀가 그녀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름이 끼쳤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는 병사들이 웅성거린다.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병사들 사이에 퍼져갔다.
문득, 윌리엄은 서쪽마녀가 백발이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이상하군.'
눈앞에 있는 여자가 마녀라는 사실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마녀의 머리색은 하얀 빛을 띠고 있기는 해도 은색이었다. 백발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하다.
'뭔가 잘못된 소문이었을까.'
누군가가 은색의 머리를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은색 머리카락은 어두운 곳에서 보면 백발이라고 오인할 만도 하다.
어쨌든 이 마녀를 이제 왕에게 데려가야 한다. 왕이 전선에 서는 것은 아니지만, 멀찍이 떨어진 후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녀가 까마귀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바퀴가 마른 대지를 밟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여 허공으로 오르더니, 마차 위에 빼곡하게 올라가앉았다.
마차 지붕에 앉지 못한 까마귀는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부는 땅에서 톡톡 튀듯이 뛰어 따라오다가 잠시 멈추고, 거리가 멀어지면 훌쩍 날아와 다시 가까운 땅에 내려앉았다.
병사들이 억지로 마차 주변을 둘러쌌다. 마음은 알 수 있다.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윌리엄도 이 마녀의 곁으로는 다가가고 싶지 않다.
마녀가 제아무리 아름답고 요염해도, 예쁘게 치장한 시체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차 위에 올라앉은 까마귀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병사들을 쳐다본다. 마치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 위에서는 검은 구름처럼 까마귀가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마음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 젠장. 이 임무를 맡는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봤자 어쩔 수 없지만.
왕의 명령을 거부하면 곧바로 죽음이다. 그레데의 국왕은 마음이 좁고 거칠기로 유명했다.
위가 그러니 아래도 마찬가지다. 그레데라는 나라에 제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다. 겉모습은 멀쩡해 뵈지만 속이 썩었다. 저 밑 땅속에 박힌 뿌리까지 모두 썩어 있었다.
***
"괜찮아. 며칠 전에도 이쪽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 우리도 무사히 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안심시키며 말한다. 소년은 아직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은 굉장히 작았다.
벌써 이틀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눈 내린 땅바닥을 여러 번 파봤지만 마른 나무뿌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배고픈 나머지 입에 넣은 건 차가운 눈뿐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정말 괜찮아질까.'
소년은 아버지가 여러 번 말한 그레데 방면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고향 마을을 도망치듯 떠난 것이 벌써 여러 달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와토린구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쪽으로 가는 길목은 대부분 병사들에게 막혀 있었다. 먹고 살기 좋다는 와토린구로 넘어가는 사람이 워낙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소년과 가족이 향한 곳은 그레데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나라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디코콰리아보다는 나을 거라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 나라도 정상적인 관문으로는 갈 수 없다. 하지만 산이 끊어지는 지점으로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그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소년과 가족은 눈 덮인 땅을 한참 걸어, 마침내 막대기가 듬성듬성 꽂혀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이 국경이다. 막대기가 꽂힌 지점에서 한 발자국만 넘어가면 디코콰리아에서 그레데 왕국이 된다.
주변에는 나무와 좁은 물길이 나 있었다. 언덕처럼 약간 경사가 져 있어서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 말로는 언덕 너머에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한다.
"자, 서두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약간 밝았다.
마을이 있으면 그 주변은 논이다. 경작을 하고 남은 지푸라기나 떨어뜨린 알곡이 조금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으면 일을 해주고 음식을 조금 받을 가능성도 있다.
소년도 쓰러지려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가족이 막대기를 넘어서 그레데 왕국의 땅으로 들어가고, 언덕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갑자기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면서 병사 수십 명이 언덕 너머에서 뛰쳐나왔다.
"적이다! 적군이 쳐들어왔다!"
병사들이 외쳤다.
소년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는 소년과 가족뿐이었다.
소년과 가족이 허둥지둥하는 동안, 병사들이 달려와 가족을 빙 둘러쌌다.
병사들이 계속 외친다. 적이다, 적군이 쳐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소년은 자신의 모습이 혹시 다르게 보이는가 싶어서 스스로를 내려다봤지만, 언제나 입고 있던 낡은 옷과 신발이 보일 뿐이었다.
병사 한 명이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노, 놓아 주세요. 제발. 놓아."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병사에게 끌려간다.
아버지가 병사의 다리에 매달리자, 다른 병사가 아버지의 등을 발로 찼다. 아버지가 땅에 구르자, 이번에는 병사 두 명이 아버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소년과 동생도 병사의 손에 잡혔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언덕 바로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까지 다녀온 어떤 마을보다도 작았다. 띄엄띄엄 자리한 집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고,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그중 한 집으로 끌려가고, 나머지 가족은 병사에게 잡힌 채 광장에 서 있었다.
집안에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여러 명의 병사가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아버지는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가 다리를 칼에 찔렸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동생을 부둥켜안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을 찾아온 것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병사들이 아버지를 붙들고, 강제로 낡은 옷을 위에 걸쳤다. 카니아의 병사들이 입는 옷이다. 여러 해 전에 저 옷을 입은 병사를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나라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병사라고 말했다.
몇 시간 정도는 지났을 것이다. 어머니가 다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옷은 찢기고 어머니 얼굴 여기저기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아버지의 손에, 병사가 억지로 칼을 쥐어 주더니 그대로 어머니의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가 고꾸라지고, 아버지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소년은 동생이 보지 못하도록 끌어안은 채 굳어 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사가 소리 높여 외쳤다.
"적군이 우리나라의 여자를 유린하고 죽였다!"
병사가 아버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아버지가 병사에게 밀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곁에 서 있던 다른 병사가 아버지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포고문 어디 있어! 선전포고문 가져와! 서둘러라! 야, 누가 저 애새끼도 처리해."
누군가의 발자국이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두려워서 눈도 뜰 수 없다. 품 안에서 우는 동생을 더욱 꽉 끌어안았을 때 목덜미에 큰 충격이 왔다. 소년은 동생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다시 한번, 등에 충격이 온다. 그리고 또 한 번.
충격이 오는 대로 흔들리는 몸 아래에서 동생이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
여러 번 와토린구에서 전령이 오고, 다시 지시가 내려갔다. 전령이 가지고 오는 소식은 대부분 미리 예상한 것들이지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루디는 피곤한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하다.
"폐하, 조금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벌써 며칠째 제대로 쉬지 않으셨습니다."
"글쎄, 지금부터 연병장에 나가볼 생각이었지만."
"몸의 상태를 조절하고 쉬는 것도 황제의 일입니다. 지금은 쉬실 때입니다, 폐하."
시종장이 루디의 뒤로 돌아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종장은 전생에 마사지사였을지도 모른다. 단지 몇 번 어깨의 단단한 부분을 눌렀을 뿐인데 전신의 힘이 쭈욱 빠지며 기분 좋은 한숨이 나왔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절묘해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기분 좋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잠시였던 것 같은데 깜빡 졸았던 것 같다.
루디는 억지로 몸을 바로 세웠다. 시종장은 여전히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지만 일부러인 것처럼 잠을 유도하는 손의 움직임은 그친 것 같다.
시종장이 낮은 목소리로 등 뒤에서 말했다.
"그레데 왕국의 선전 포고문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외교 통로가 아니라 디코콰리아 국경의 관문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내용은?"
"그레데 왕국의 땅에 디코콰리아의 병사가 침략해 자국민을 유린했다고 합니다. 염탐꾼의 말에 의하면 국경을 넘어온 난민을 이용한 모양입니다."
"불쌍한 일이로군."
루디는 눈을 감았다. 이야기만 간단히 들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디코콰리아에서는 계속해서 난민이 생기고 있었다.
농민이 허락 없이 영지를 떠나면 도망자가 된다. 그런 자들은 어디에도 정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는 워낙에 디코콰리아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흉작에 카니아의 약탈, 노예로 빠져나간 인력의 부족이 종합적으로 적용해, 디코콰리아에서는 매일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있다.
먹고사는 게 어려워진 사람들은 야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다. 와토린구에도 계속해서 난민이 밀려들고 있었다.
농민이 빠지면 일할 사람이 부족해 수확량은 더욱 줄어든다. 결국 그 지역은 더 먹고살기 어려워졌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디코콰리아를 통치하고 있는 카니아 측에서는 영지에서 농민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디코콰리아의 처참함은 여러 해 전 루디가 와토린구에 가 있는 동안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심해졌다고 들었다.
루디는 가슴속에 쌓이는 음울함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었다.
"카니아 측의 대응은 어떤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쯤은 카니아 측으로 전령이 출발했을 테지만, 반나절 정도 지체되었다는 연락이 있었어요."
"느리군. 그래서야 원군을 요청하는 것도 한참 늦겠어."
시종장이 지시를 해둔 모양이다. 시종이 차와 달콤한 과자를 가지고 와 책상에 놓았다. 시종장이 어깨 주무르는 걸 멈추고 옆으로 와서 섰다.
"그 나라도 현재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요. 나라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디코콰리아에 신경 쓸 틈은 없을 겁니다."
시종장이 히죽 웃었다.
"폐하의 뜻대로 될 듯합니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카니아는 현재 한계에 다다라 있다. 제국이 뒤에 있다는 것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언제 무너지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레데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를 내기 어려웠다. 필연적으로 카니아는 제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은 디코콰리아 뿐 아니라 카니아까지 무너지게 만들 것이다.
루디는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와토린구까지는 먼 길이야. 카니아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 늦는다. 잘못하면 원군이 아니라 우리 편의 시체를 수습하러 도착하는 꼴이 돼. 전군에 출발 명령을 내려라."
시종장이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