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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24화 (124/201)

#124 서쪽마녀

벌써 몇 번이나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리리샤는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고 있지만, 조금 숨이 차 있었다.

"황후, 잠시 쉬는 게 좋을까?"

루디가 말하며 손을 내밀자, 리리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살짝 몸을 의지했다.

루디는 한 손을 리리샤의 등에 대고 홀의 커다란 공간을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의 커튼 뒤에서 교육에 좋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아앙, 이라든가, 으응, 이라든가.

가끔은 가짜가 분명한, 작은 비명소리도 들렸다.

대체 황궁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물론 알기는 하지만.

루디는 살짝 리리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도 그 소리가 뭘 뜻하는 건지 아는 모양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있었다.

'역시 그만 들어가게 하는 게 나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지, 오늘은 리리샤의 공식 행사 첫날이다. 얼마나 이날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면서 그런 처사를 했다가는 두고두고 원망 받을 거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 리리샤가 일찍 들어가 버리면 황제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날지 모른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여러 방 중 한 곳이, 미처 커튼을 다 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교성이 크게 들렸다.

루디는 재빨리 리리샤의 뒤로 돌아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약간 거리를 두고 레빈이 서 있다.

루디가 시선을 주자, 레빈이 히죽 웃으며 다가와 그 방의 커튼을 완전히 닫았다.

레빈과 안에 있는 여자의 시선이 맞았던 모양이다.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커튼 안쪽에서 울렸다. 그렇게 놀랄 거면 조심을 하라구.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루디가 리리샤를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자, 레빈이 한 방 앞에서 두꺼운 커튼을 젖혔다.

"이곳은 특별히 삼중으로 커튼이 되어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소리가 거의 안 들릴 거예요."

리리샤가 푸드득 소리가 날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엎어졌다.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 순간 저 모양이다.

'어디가 성숙한 여성이야.'

여전히 어린아이다.

루디도 들어가려고 막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막혀있는 벽에서 빛을 뿌리며 튀어나왔다.

빛으로 빚은 참새다.

루디가 손을 올리자, 작은 새가 그의 손가락 위에 내려앉는다.

새는 마치 소리 없이 노래하는 것처럼 부리를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서서히 빛을 허공에 뿌리며 사라져갔다.

'그런가. 결국....'

루디는 새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어 마침내 희미한 형태만 남자, 옆에 있는 레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와토린구의 사냥꾼에게서 신호가 왔다."

"알겠습니다."

레빈이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홀을 빠져나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리리샤가 몸의 열기를 낮추기 위해 부지런히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루디는 시종이 가져다준 음료수를 손수 건넸다.

리리샤가 받자마자 호탕하게 벌컥벌컥 들이켠다. 이런 곳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루디는 벽에 등을 기댔다.

태상황제가 죽고 5년,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이 흘렀다. 리리샤에게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지만 충분히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이제 겨우 함께 공무를 하고 옆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제국은 역대 황제가 모두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제일 앞에 나서서 싸워왔다. 루디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어나면 최전선으로 향하게 된다.

리리샤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 옆의 자리를 탕탕 쳤다. 옆으로 가서 앉자 와락 목에 달라붙는다. 밤 연회의 분위기에 취한 걸까. 평상시와 달리 과감하다.

리리샤가 응석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 아까 거 한 번만 더. 그거, 입술에, 응?"

"안 돼요."

"오늘은 리리샤 성인 데뷔인데. 한 번만! 응? 응? 응, 응, 응?"

이 철부지 아가씨가! 남의 마음도 모르고. 안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십 년 넘게 참고 있다. 몸이 어려도 마음만은 성인 남자인 거야.

루디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남자를 그렇게 부추겨선 안 돼, 리리샤."

"남자 아니다. 남편이다."

리리샤가 불만스럽게 말하는 걸 들으며 손가락으로 코를 살짝 집었다.

"웅!"

리리샤가 불만스럽게 뺨을 잔뜩 부풀리는 걸 보고 루디는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황후, 그렇게 조를 힘이 있으면 한 곡 더 춥시다."

루디가 일어서서 리리샤에게 손을 내밀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방을 나설 때 그녀의 눈은 다시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바빠질 테니.'

오늘은 새벽까지 리리샤와 사귀어 주자.

사람들이 춤추는 고리에 섞여 빙글빙글 돌고 손을 맞추면서, 루디는 마음속으로 그레데 왕국의 일을 생각했다.

그레데 왕국은 예전부터 디코콰리아와 카니아의 불화를 틈타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곳이다.

제국이 카니아와 손을 잡으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다른 나라에 접촉하고 있었다.

태상황제가 죽은 뒤가 가장 심했다.

아직 황제가 어릴 때 뭔가 일으켜야 한다고 주변 국가를 들쑤셨지만, 초원에서 마도병기가 대활약한 일로 다른 나라들은 모두 몸을 사렸다.

그레데와 손잡겠다는 나라가 없어 지금까지 어영부영 열만 올리다 말았는데, 결국엔 단독 행동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보통이라면 제국이 버티고 있는 지역을 탐할 리 없다. 하지만 디코콰리아에는 그만한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었다.

와토린구 바로 옆, 산과 맞닿아 있는 곳에는 암염 지역이 있다.

카니아가 끈질기게 디코콰리아에 싸움을 걸어오고, 태상황제가 언젠가 반드시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예견한 이유였다.

태상황제는 그 암염보다 마력과 문장을 소유한 와토린구의 후계자를 더 원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태상황제가 완전히 그걸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와토린구는 암염 지역 바로 옆이다. 뭔가 트집을 잡거나 원인을 만들어 침략하기 쉽다.

단순히 루디만을 위해서 이 지역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단지 우선순위가 마력 소유였을 뿐, 언젠가는 암염 지역도 차지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거다.

루디는 환하게 미소 짓는 리리샤를 보며 한쪽 가슴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고 상황이 변해가면 어느 나라가 또 거기에 뛰어들지 알 수 없다.

제국이 조금이라도 약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모두가 벌떼처럼 물어뜯기 위해서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백성도, 리리샤도, 모두 절망에 물들어 버린다.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제국의 힘을 보여야 한다.

누구보다 강하게, 누구보다 잔인하게.

그 발톱을 이쪽에 들이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리리샤는 루디를 우러러보고 있지만, 그는 좋은 남자가 되지 못했다. 5년 동안 수없이 많은 어둠을 보고, 결국엔 자신 역시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 척 겉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불쌍한 리리샤.'

어머니처럼 나쁜 남자한테 잡혀 버렸다. 그래도 미안, 놔줄 수는 없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어. 상황이 그녀를 놓아주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린다면, 아마 리리샤는 파멸해버리고 말 거다.

태상황제가 바랐던 것처럼, 지금은 루디의 빛이 너무 커져서 그녀는 자신의 보호 아래가 아니면 살 수 없을 만큼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그녀에게 작은 오염이라도 생기면, 조금이라도 루디의 날개 밑에서 벗어나게 되면, 루디의 옆을 바라는 모든 사람이 리리샤를 물어뜯어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린다.

루디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녀가 자신의 날개 밑에서 적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

'마녀라.'

윌리엄은 마녀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결국엔 누구도 보지 못한 존재 아닌가.

소문이 부풀면 결국엔 괴물이 되는 걸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마녀라는 존재가 그저 사기꾼처럼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의 호위대장이라는 자리가 온 것은 웃기는 일일 것이다.

모두가 마녀를 두려워하며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서워하지 않는 그가 호위대장이 되었다.

"대장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부하가 다가와 말했다.

"그래, 출발하자."

마녀와 약속한 장소는 그레데 왕국의 변방에 있는 황무지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도 참 이상한 일이기는 해.'

그곳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주변에는 우물조차 메말라 짐승은커녕 풀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쳇, 하지만 사기꾼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뭔가 숨겨진 방법이 있는 걸 거다.

아무도 살지 못하는 황무지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자신을 마녀로 믿게 하려는 방편이겠지.

그 여자는 자신이 서쪽마녀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진짜 그런지조차 알 수 없다.

서쪽마녀를 만나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누구도 서쪽마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모른다.

왕이 어째서 그 말을 믿고 있는지가 이상할 정도였다.

마차 두 대를 끌고, 호위대가 마른 땅을 밟으며 앞으로 나갔다.

습기가 거의 없는 땅은 마차의 바퀴를 통통 튕겨낸다. 돌길을 굴러가는 것처럼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대는 마녀를 태울 마차다. 다른 한 대에는 마녀를 위한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왕은 마녀를 위해 그 입에 들어가는 것과 입는 것, 닿는 걸 모두 최상품으로 준비했다.

'이런 걸로 정말 제국을 이길 수 있다면 싼 거지만.'

윌리엄은 얼굴을 찌푸리고 바닥에 가래를 뱉었다.

왕은 미쳤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어리다고 해도 유래없을 만큼 강한 마력소유다.

제국의 소년 황제가 지금보다도 어릴 때 초원 야만족에게 마도병기를 사용해 승리한 이야기는 이제 세 살 어린아이도 알만큼 유명해졌다.

소년 황제가 부린다는 빛의 새는 유랑악단이 각지를 다니며 공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모든 나라가 그 일의 위험성을 깨닫고 몸을 사리는데, 오직 그레데의 국왕만이 서쪽마녀라는 여자 한 명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할 리 없었다.

한참을 걷자, 마른 땅에 내려앉아있는 까마귀가 몇 마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누런 대지에 검은 까마귀.

왠지 이상한 느낌이다.

호위대 병사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오십 명, 많지 않은 인원의 걸음이 주춤해진다.

"뭘 겁을 내는 거야! 서둘러라.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윌리엄은 소리쳤지만, 어쩌면 마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여기에서 멀지 않다. 서쪽마녀가 정말 약속대로 온다면 지금쯤은 눈에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휑한 황무지 어디에도 마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속았나.'

까마귀가 한 마리, 두 마리, 어느새 조금 늘었다. 까악, 까악, 우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 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할까.'

황무지에서 오래 머물 만큼의 물자는 가져오지 않았다. 식수도 각자가 허리에 차고 있는 수통의 물과 마녀를 위해 가져온 물통 한 개 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 정도만 머문 뒤 떠나고 싶었지만, 왕에게 변명하려면 최소한 삼일 정도는 있어야 할 거다.

윌리엄이 걱정거리를 하며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데, 병사들이 소리쳤다.

"대장님! 저쪽에, 저 하늘에!"

"뭐야."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 본 윌리엄의 몸이 굳었다.

하늘 저편에서 까만 새의 덩어리가 날아오고 있다. 수천 마리 정도 될까. 까마귀가 마치 구름처럼 한데 뭉쳐서 날아오고 있었다.

"맙소사."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검은 새의 덩어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으아아악!"

병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왔던 길로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

"잡아! 그놈 잡아라."

윌리엄이 소리치자, 병사 한 명이 칼집으로 병사를 후려쳐 쓰러뜨렸다.

몇 명의 병사는 바닥에 엎드렸다.

윌리엄도 호위대장이라는 지위만 아니었으면 비명을 질렀을지 모른다.

두려움이 목구멍 위까지 차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검에 손이 갔다.

가까이 다가온 까마귀 떼의 모습은 더욱 기괴해 보였다. 어떻게 날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까마귀들은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점점 까마귀 떼가 낮아지자,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녀다!"

"서쪽마녀다!"

"오, 맙소사! 마녀가."

윌리엄은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까마귀 떼 위에 여자가 올라가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맙소사."

윌리엄은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이렇게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왕의 애첩도 이토록 요염한 모습은 아니었다.

까마귀가 바닥에 내려와 완전히 날갯짓을 멈추자,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굳어져 있던 윌리엄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생각해내고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

왠지 여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

'뭔가 조금 어설픈....'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는 보기 드물게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한데 그 눈동자가 제대로 그의 모습을 잡지 못했다. 마치 맹인처럼.

서쪽마녀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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