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누가 불쌍한가
리리샤가 또 이상해졌다.
숨을 못 쉬는 것처럼 헐떡거리며 손을 이상하게 오물락조물락거렸다.
루디는 리리샤의 등 뒤로 돌아 목걸이를 걸어 주면서 피식 웃었다.
리리샤는 겉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원래 아름답던 외모가 더욱 화사해져서, 나디아그라의 한창때를 웃도는 미모라고 외국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리리샤가 가녀린 백합꽃이거나, 건드리면 솜사탕처럼 녹아 없어지는 덧없는 유형의 미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괄량이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일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 일도 없어졌지만, 남작 부인의 흰머리가 나날이 늘어갈 만큼 활발 명랑하다.
그것을 교묘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의 가면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남작 부인의 공일 것이다.
목걸이가 가느다란 목에 놓이자, 리리샤가 큰 동작으로 홱 몸을 돌렸다.
"앗!"
누가 짧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남작 부인이었을 수도 있고, 시녀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것과 그중 한 목소리는 리리샤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분명히 리리샤 옷 안쪽에서 뭔가가 뜯어진 것 같다.
루디는 웃음을 숨기면서 리리샤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귀걸이까지 함께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곤란할 것 같군. 오늘 저녁 식사는 함께 합시다."
"예, 폐하."
리리샤가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무릎을 굽히거나 작은 동작조차 취할 수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수고하게."
루디가 시녀들에게 한 마디 하고 밖으로 나가자, 문이 닫히기 직전 와글와글 소리가 들렸다.
"마마! 허리인가요!"
"맙소사!"
"핀이 꽂힌 자리가 완전히 찢어졌어요."
"아, 이쪽도에요. 찢어졌어! 어떻게 하죠?"
"이제 이틀 뒤인데!"
문이 닫히자, 레빈이 바짝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황후 마마께 아름답다는 칭찬을 좀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바라시는데."
"아름답다고 했지 않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레빈, 그녀는 아직 어려. 벌써부터 성인 여자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는 거야."
"하지만 소문도 있고, 마마가 너무 불쌍하세요. 그렇게 폐하만 바라보고 계시는데. 마마가 바라는 말씀 한 마디 정도는 내리셔도...."
루디는 레빈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부지런히 복도를 걸었다.
레빈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리리샤의 조급한 마음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직 황후가 어린데도 사람들은 후계자가 없는 걸 불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황후가 불임이라거나 매력이 없어서 황제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말조차 돌고 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침실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태상황후가 첩비를 권하기 시작한 건 벌써 몇 년 전부터였다.
이제 겨우 십 대 중반인 아이한테 뭘 바라는 건지. 모두들 너무 급하다.
뭐, 대부분은 그저 황제에게 여자를 밀어 넣어 자신들의 이득을 보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루디가 최소한 리리샤가 열여덟 살을 넘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리리샤는 분명히 울 테지.'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의 고민을 알아줄까.
예전에는 리리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이라는 가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만나서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리리샤는 여전히 오직 루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 여자가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물론 아직은 성인 여성으로 볼 수 없지만.
겉모습은 점점 여자가 되어가는데 속은 아직도 아이인 것 같다.
'솔직히 리리샤가 18살 넘는 걸 기다리는 게 힘든 건 그녀가 아니라 나인데.'
마음만 먹으면 어느 여자도 손에 들어오지만, 그리고 그걸 나무라거나 비난할 사람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만 바라봐 주는 리리샤를 생각하면 다른 여자에게 손을 댈 생각은 나지 않았다.
리리샤가 울 거라고 생각하면 아래쪽에서 팔딱팔딱하던 게 금방 힘이 죽어버린다.
'하아.'
어린 리리샤에게 손을 댈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그렇다고 그녀가 울 것 같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18살 넘기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
'불쌍한 건 그녀가 아니라 나야.'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이 불쌍한 사실을 알고 있다.
'하아아.'
다시 한번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시종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방금 모로즈 공작이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알현실에서 만나시겠습니까?"
모로즈 공작은 폐황태자인 로베르토다.
루디는 고개를 저었다.
"태양의 방에서 보지. 공주 쪽 준비를 해줘."
"알겠습니다."
"아, 공작부인은 함께 왔던가?"
"예, 그녀도 함께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만나 볼 필요까지는 없겠지. 나중에 그녀도 공주와 만날 수 있도록만 해두게."
"예, 폐하."
시종장이 소식을 가져온 시종에게 뭔가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루디는 집무실로 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뒤 태양의 방으로 향했다.
태양의 방은 천장에 태양신이 인간과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방이다.
중요한 손님이나 귀족들을 만날 때 사용하는데, 가끔은 만찬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에 모로즈 공작이 황태자였던 시절 좋아했던 장소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태양의 방에 도착하자, 모로즈 공작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선이 가느다랗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둥글어진 것 같다. 살집도 좀 붙었지만 성격도 조금 느슨해진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
모로즈 공작의 얼굴에는 황제의 모습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리운 마음에 가슴 한쪽이 살짝 저렸다.
"황제 폐하! 신 모로즈,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모로즈 공작이 우아한 동작으로 정중하게 절을 했다.
"고개를 들라."
루디가 말하자 공작이 조용히 몸을 바로 했다. 이전에 황태자였던 모로즈 공작의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
모로즈 공작은 오랜만에 만난 루디의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황제의 머리와 눈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렬한 느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사랑스럽던 외모의 금발 아이가 이토록 강한 압박감을 내뿜는 남자로 변모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황제는 이전에 보아온 코레아 왕조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이건 예전의 아버지보다도 더 무서운 느낌이 아닌가.'
모로즈 공작은 자기도 모르게 황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오늘의 알현을 허락받은 것은 몇 년 전 있었던 반란 시도를 고발한 덕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명의 사람이 접촉을 해왔다.
모로즈 공작은 그런 사람들의 용건을 듣지도 않고 모두 거절했다. 방문 자체를 받지 않았다.
귀족은 누구나 연회나 살롱을 통해 인맥을 쌓고 정보를 얻지만, 그는 은둔자처럼 조용히 영지에 머물며 외부 접촉을 끊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영지를 잘 경영하고 부흥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살아도 죽은 것처럼 조용히 지내는 것.
그렇게 해야 언젠가 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나 아버지가 주신 짧은 글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품에 넣은 종이를 꺼내 눈에 넣었다.
딸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명이 아내의 가문을 통해 끈질기게 접촉을 해왔다. 그냥 무시해서 될 일이 아닐 정도로.
잘못하면 아내의 가문까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게 아닐까 싶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짧은 편지를 몇 번이고 보고, 시종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해 기억했다.
[부디, 폐하의 온정을 악으로 갚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인께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시게 설득해 주십시오. 부인의 불평이 있으면 로베르토님까지 위험해집니다. 이렇게 빨리 떠나게 하는 것도 황후께서 당신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폐하의 배려이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주셨던 편지의 말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그 말을 기억해 줄 이는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고, 몇 번이나 절망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건 아버지의 친필로 적힌 편지가 그의 품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서신을 주었던 그 일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증거가 있으니까.
아버지가 그냥 자신을 내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손에 남아 있는 한, 누군가에게 뭔가 당부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잘못되면 함께 목숨을 끊을 준비를 하고 아내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결국 수긍했다.
아내의 친정에 아무 말도 전하지 않고 시종장에게 고발한 것은, 수상한 접촉을 받고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날이었다.
반란을 시도했던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주모자와 그 자식들은 처형당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반란군을 토벌하러 갈 때는 아름다운 빛의 새들이 황제의 군을 이끌었다고 들었다.
아내의 친정은 반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로베르토에게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덕분에 당주가 물러나는 선에서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난 걸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황도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대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이 늦었군."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로즈 공작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신 말씀이옵니다. 제가 어찌 공을 바라겠습니까. 신과 아내의 가문이 용서받은 것만으로도 큰 은혜이옵니다."
"글쎄, 그대의 일은 태상황제께 당부를 듣고 있었다. 더욱이 상황후께서 몇 년이나 내 일을 돌보아주고 계셨으니, 내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단지 그대를 불러들이기 좋은 시기를 조금 보고 있었어."
모로즈 공작은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약간 당황했다.
"새해 연회에 상황후의 에스코트를 부탁하고 싶은데, 해주겠는가?"
"!"
황제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자신에게?
로베르토가 가지고 있는 모로즈 공작이라는 이름은 일대 공작으로, 자식에게는 계승되지 않는다.
로베르토가 죽으면 공작의 작위는 자식에게 이어지지 않고 지금 주어진 영지도 황실에 반납될 것이다.
일대 공작이라 하더라도 작위만큼의 지위를 인정받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작위는 허울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진짜 공작으로 봐주지 않는다. 로베르토는 그저 폐위된 쓰레기 황태자에 불과했다.
반면에 태상황후는 현재 황실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하는 사람은 그만큼 신분에 걸맞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심지어 태상황후는 지금까지 황제의 상대로 각종 행사에 참가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맞지 않는다.
그 에스코트를 자신에게 맡긴다는 말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작이라는 이름만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감금된 것처럼 영지에 머물지 않고 황도에서 활동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하지만 어째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밖으로 나온 말은 쓸어 담을 수 없었다.
당황해서 사과의 말을 하려는데, 황제가 손을 들어 말렸다.
"올해 황실에서 외국으로 시집가는 공주가 있다. 그대에게 공주가 시집갈 곳의 문화와 문물에 대해 알아보고 적응이 쉽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맡기고 싶네."
지금은 너무 예전 일이라 거의 잊어버렸지만, 황태자 시절에는 여러 나라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런 경험이 필요한 걸까.
모로즈 공작은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제가 힘이 될 수 있다면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황제가 명을 내리면 수긍하는 길 외에는 없다.
게다가 황궁에 출입하다 보면 언젠가 딸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히 그걸 위해서 이 일을 맡기는 걸 거다. 희망이 가슴속에 싹을 틔었다.
"그래, 이후 공주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네. 그대가 공주의 힘이 되어주게."
"예, 폐하."
황제는 이내 자리를 비웠다.
모로즈 공작은 잠시 태양의 방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주가 이쪽으로 온다고 한다. 시집갈 공주는 지금은 궁을 나간 후궁의 딸이라고 들었다.
자신의 딸은 어떻게 된 걸까.
태상황후, 어머니를 만나면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여성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방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아버지!"
갈색과 금발 중간의 색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흩어지면서 가느다란 몸이 그의 가슴에 안겼다.
"아버지!"
"맙소사."
모로즈 공작은 작게 한 마디 중얼거리고 가만히 자신의 품에서 울고 있는 공주의 등에 손을 올렸다.
잠시 흐느끼던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공주의 뺨을 감싸고 가만히 들여다보자, 아버지를 닮은 코와 입이 보였다.
"맙소사."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공주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만나고 싶었다."
모로즈 공작이 중얼거리자, 공주가 말했다.
"내일, 내일, 동생들도 올 거예요. 오늘은 나만 허락받았지만, 내일은 동생들도."
"목소리가..."
상상 속에서만 보던 딸이 실제로 말을 한다. 얼굴은 상상으로 볼 수 있었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말을 한다.
눈을 감아도,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가에서 시종이 조용히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공작부인이 잠시 뒤에 오실 겁니다. 다과를 준비했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휘청휘청 걸어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시 뒤,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금방 딸의 모습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서로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방에 울린다. 여전히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이 아니구나."
그제야 몸이 실감을 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말씀을 끈질기게 믿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