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리고 5년이 흘렀다
태상황제가 돌아가시고 5년, 리리샤는 14살이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면 새해, 15 살이 된다.
"길었다."
리리샤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타이라가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황후 마마. 드디어 공식적으로 황후가 되시는군요."
"그래."
지금까지 가짜 황후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리샤는 오늘까지 공식적인 행사에 나갈 수 없었다.
황제가 공무를 하는 것처럼 황후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어린 리리샤는 기껏해야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역할 정도만 했을 뿐이다.
리리샤 대신, 루디가 공식 행사에 나갈 때 에스코트하는 여성은 태상황후였다.
어린 리리샤가 파트너가 된 건 즉위식 겸 결혼식이었던 날 뿐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되는 건 15살 이후다.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리리샤는 황제의 파트너로 행사에 나설 수 없었다. 전혀 준비 안 된 리리샤가 공식 석상에 나가봐야 비웃음만 당할 테니까.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고 나라 안팎에서 눈을 접시만큼 크게 뜨고 우러러보는 루디마저도, 태상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단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갖은 고생을 했다.
은근히 반발하며 누르려고 하는 귀족들과 어린아이라 속일 수 있다고 뒤에서 무시하는 외국의 사절들. 쉽게 농락당할 거라고 여겨 몸으로 어린 황제를 압박하는 수많은 여성.
어린 리리샤가 나가면 어떻게 될 지 눈에 뻔히 보였다.
아, 생각하다 보니 분노가 치밀어왔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상대적으로 리리샤보다 루디에게 부드러운 태상황후는 황후 대신 다과회를 주최하면서 매번 그해 사교계에 데뷔한 여자를 황제에게 소개하고 있다.
당연히 첩으로 권유하는 거다.
루디는 올해 16살, 지금은 세상에 없는 태상황제는 그 나이에 벌써 아빠가 되어 있었다던가.
늙은 마물 여우! 타도 태상황후!
리리샤가 주먹을 불끈 쥐자, 타이라가 바로 옆에서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건드렸다.
"마마, 치마 찢어져요."
"아."
이런, 위험했다. 지금은 마지막 가봉 중이었다.
드레스의 허리를 조이기 위해서 며칠 동안 식사를 줄였다. 간신히 목표로 했던 허리둘레가 된 거야. 배에 힘을 주면 아직 코르셋을 입지 않은 상태라 살짝 핀으로 붙여 놓은 부분이 찢어져 버린다.
새해 연회에 리리샤는 처음으로 황후 데뷔를 한다. 당연히 드레스에도 힘을 콱 주었다.
누구보다 아름답게, 누구보다 여성스럽게, 누구보다 성인 여성답게!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성인 여성.'
이 나라의 여자는 대부분 15살에서 18살 사이에 사교계 데뷔를 한다.
하지만 황후인 리리샤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데뷔라는 것 자체가 혼활 시장에 뛰어들기 위한 입장표다.
이미 남편이 있는 리리샤에게는 사교계 데뷔가 필요 없을 뿐 아니라 허용되지도 않았다. 사교계 데뷔는 미혼 여성만 하는 거니까.
그래서 이번 새해 연회가 사교계 데뷔 대신이다. 매우 중요한 날이다.
사교계 데뷔 겸 공식적인 황후의 첫 일이면서 동시에 성인 여성이 된 기념일이니까.
'이제 정말로 성인이 된 거야. 이제는 진짜 아내야. 나는 정말로 여자가 됐다.'
길었다. 정말로 길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고 타이라의 얼굴이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마마. 머리 장식이 다 떨어집니다. 잠시 가만히 있어주세요."
"그래."
타이라가 물러서자, 가봉 작업을 하던 여성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 부위와 허리의 천을 핀으로 고정하고 둘레를 다시 잰다.
남작 부인과 타이라, 그리고 다른 시녀들이 사방에서 꼼꼼히 리리샤의 모습을 확인하며 가봉하는 여성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물어보았다.
리본을 조금 위로, 프릴은 더 풍성하게, 여벌의 레이스는 준비되어 있는지 등등.
새해 연회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는 모두 네 벌이다. 한 벌은 낮에 입을 드레스, 한 벌은 밤에 입을 것, 그리고 두 벌은 여벌로 준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비상시에 덧대거나 일부만 교체할 수 있도록 오버 가운이나 소매와 어깨 연결 부위를 감추기 위한 어깨 장식, 가슴 부위를 덮는 역삼각형의 장식천 같은 것들을 여러 벌 준비해두었다.
보통은 이렇게 많은 드레스를 준비하는 일은 없지만, 새해 연회는 특별이다. 그날은 리리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큰일 났다. 새해 연회를 생각하니 긴장이 왔다.
루디에게 돌진하는 여자는 많다. 미혼인 여성도 있지만 애인을 지망하는 기혼녀도 상당수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성도 많다. 그녀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죽을 것 같다.
리리샤가 손을 옆으로 뻗어 허우적거리자, 타이라가 금방 눈치채고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마마. 정말 어른스럽고 아름다우세요."
"정말?"
"네. 저보다 나이 많아 보이세요."
"그건 너무하잖아!"
타이라가 밝게 웃는다.
남작 부인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자, 타이라는 금세 새초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리리샤와 타이라는 남작 부인의 잔소리를 들었다.
측근 시녀들만 있을 때로 한정되지만, 대신 하루 종일 잔소리 들을 걸 모았다가 한꺼번에 왕창 받기 때문에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프다.
타이라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이 동시에 히죽 웃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고 시녀가 들어왔다. 남작 부인에게 소곤소곤 작게 말하는 것이 보였다.
남작 부인이 가봉하는 여자들의 작업을 멈추게 했다. 잠시 뒤에 다시 한다고 말하며 핀을 안전하게 다시 꽂으라 지시했다.
여자들이 서둘러 핀을 뒤집거나 천 조각을 덧대며 상처가 나지 않도록 다시 꽂았다.
"폐하께서 잠시 들리신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앗!"
리리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남작 부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리리샤는 허리를 바로 펴고 우아한 동작이 되도록 조심하면서 시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예, 황후 마마."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낮추며 고개를 숙였다.
남작 부인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어리는 걸 보고, 리리샤는 살짝 타이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옆으로 내린 팔이 남작 부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손가락을 꼬아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타이라도 즉시 똑같은 모양으로 손가락을 구부렸다.
제일 말단인 어린 시녀가 자리의 각도 때문에 그것을 보았다.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는 옆에 있는 고참 시녀의 눈총을 받았다.
'수행이 모자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힐끔 타이라를 보자, 그녀도 눈으로 동감이라는 신호를 주었다.
'후훗, 남작 부인을 속이는 것쯤, 이제는 식은 죽 먹기지.'
리리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움직이다 타이라와 스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타이라가 곧바로 엄지를 내고, 서로의 엄지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재빨리 꾹 누르자 타이라도 힘을 준다.
계집애! 그새 새로운 걸 배웠구나. 힘을 주는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리리샤가 밀린다. 에잇, 하고 팔에 힘을 주는데,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떨어졌다.
"마마."
어머, 이런. 걸렸네.
남작 부인의 시선이 타이라에게 향한다.
남작 부인이 뭔가 말하기 전에 타이라가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마마의 목에 두를 레이스를 가져오겠습니다."
타이라가 단정한 모습으로 살짝 무릎을 굽히더니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배신자, 도망갔다.
마침 핀을 다시 꽂던 작업도 마무리되어 가봉하던 여자들도 모두 옆방으로 물러갔다.
시녀들이 재빨리 가봉하던 옷 위에 레이스나 로브를 덧대었다. 리리샤는 시녀들이 작업하는 동안 남작 부인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설교가 끝날 즈음 타이라가 돌아왔다.
'약삭빠른! 저쪽에서 오지 않고 기다리는 걸 내가 봤다구!'
그런 의미를 담아서 눈을 흘겼지만, 타이라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훗, 황후의 시선을 받고도 움찔하지 않다니, 고래심줄 같은 뚝심이구나.'
리리샤의 시선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을 텐데, 타이라는 여전히 모른척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얼추 작업을 끝냈다. 머리를 약간 느슨하게 늦추어 올리고, 곳곳에 있는 핀이 보이지 않도록 리본과 레이스를 달았다.
타이라가 드러난 가슴에 레이스를 부착한다.
"타이라, 가슴을 조금 더 가운데로 모아줘."
리리샤의 말에 타이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마, 충분히 모았어요."
"조금 더! 골짜기가 모자라잖아."
"여기서 더 모으면 그건 골짜기가 아니라 그냥 뭉개진 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레이스라도 조금 밑으로 내려!"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다 드러내게 되잖아요."
"좀 드러내면 어때! 어차피 부부인데."
리리샤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타이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건 그러네요."
타이라가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레이스를 낮추는데, 남작 부인의 손이 쑥 올라왔다.
다시 레이스가 원상태로 올라오더니, 조금 더 위에 덮였다.
"...."
골짜기가 없어졌다. 기껏 만들었는데.
"하아, 그러니까 제가 할 때 그냥 놔두지 그러셨어요."
타이라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리리샤의 어깨가 약간 떨어졌다.
"황후 마마,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벌써 복도까지 오셨어요."
시녀가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 시녀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지고, 타이라와 몇 명의 시녀가 리리샤의 주변을 돌며 마지막 확인을 했다.
남작 부인이 몸을 돌려 입구로 나가는 사이, 타이라와 시녀 두 명이 재빨리 리리샤의 가슴에 올라와 있는 레이스를 낮추어 다시 고정했다.
"고마워."
작게 말하자, 타이라와 시녀들이 남작 부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루디가 들어왔다.
시녀들이 모두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리리샤는 가급적 가슴이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몸을 숙였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많이, 골짜기가 저 깊은 바닥까지 보이도록.
보아라! 이것이 바로 이틀 뒤면 열다섯 살이 되는 성숙한 여성의 몸이다.
루디가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루디의 시선이 단 1초도 그녀의 가슴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돌멩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귀여운 황후는 오늘도 아름답군."
안 돼, 평상시의 반응이 돌아왔다.
루디의 눈에는 이 골짜기가 보이지 않는 걸까. 어제의 리리샤와 오늘의 리리샤는 전혀 다른데.
이 드레스는 지금까지 입었던 것과 달리 성인 여성의 향기가 물씬 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리리샤가 입었던 옷은 루디의 방침과 남작 부인의 의견이 서로 죽이 맞아 몸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거였다.
코르셋도 루디가 싫어했기 때문에 천으로 된 부드러운 걸 사용했고, 가슴 위까지 꽉꽉 올라오는 드레스를 입었다.
골짜기? 그딴 게 있는지도 모르는 옷이었어. 남자가 여장을 했다고 해도 믿었을 것 같다.
'이렇게 드러난 옷을 입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안 돼. 성인 여성의 향기가 나오지 않는다. 모처럼 타이라와 시녀들이 노력해 줬지만 리리샤에게서는 전혀 요염이 안 나와.
눈물이 날 것 같다.
루디의 뒤를 금붕어 똥처럼 쫓아다니는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황후 마마께서 어린아이처럼 황궁 복도를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 모습은! 이제 그야말로 어른이 되셨습니다."
금붕어똥2 레빈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제 그야말로 성인 여성이십니다. 그렇지 않나요, 폐하."
원래 저 두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황제한테 뭔가 말하는 일이 없다. 시종장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 만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성인, 성인을 부르짖었다. 리리샤도 알아차릴 정도로.
살짝 시선을 올려다보자, 루디가 정말 기쁜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우리 황후는 정말 귀엽네. 많이 컸어."
성인 여성이라고 어필하고 있는데 어째서 귀엽네야! 많이 컸다는 또 뭐고!
자기도 모르게 입이 툭 튀어나왔다.
안 돼, 평상시와 똑같다. 루디 앞에만 서면 어린 시절 버릇이 나와 버린다. 이래서야 영원히 성인 여성으로 대접받기는 글렀어.
루디가 가까이 다가와서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가락 끄트머리만 살짝 잡았다. 손가락이 갈라지는 부분에 살짝 루디의 입술이 닿았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아, 정말 나는 이 사람이 좋다. 여자로 보이고 싶어.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빛이 몽롱해지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루, 너무 좋아.
루디가 시선을 뒤쪽으로 주자, 시종 레빈이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목걸이다.
"아!"
검은색의 보석이었다.
황후가 된 이후 많은 보석을 보았다. 하지만 검은 보석은 처음이었다.
둥근 보석 하단에서 사방으로 황금빛의 별 모양이 길게 빛을 뿌리며 뻗어 있다.
검은 보석 주변에는 작은 검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이거, 루의 색깔과 내 머리 색?"
자기도 모르게 둘만 있을 때의 말투가 나왔다. 하지만 루디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목걸이를 손에 들었다.
"그래.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그대가 나의 것이라는 표식을 해둬야지. 안 그러면 누군가 내 사랑스러운 황후를 훔쳐 갈지도 모르니까."
"...!"
너무 놀라서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 이런 말을 하다니, 루디가 루디가 아닌 것 같다.
큰일 났다. 가슴이 너무 두근두근 뛰어서 숨을 못 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