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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20화 (120/201)

#120 바람둥이의 마지막

리리샤와 타이라가 만나 얼싸안고 울었다는 시종의 보고를 들으며 태상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황제, 진짜 그것으로 괜찮겠는가?"

"예, 이번에는 폐를 끼쳤습니다."

루디는 태상황제가 권하는 대로 이국에서 들여왔다는 차를 마셨다.

지구에서도 한 번은 맡아본 듯한 향기다. 허브차였을 거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무슨 허브인지는 잘 모르겠다. 향긋하다.

찻잔을 입에서 떼자 태상황제가 추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폐랄 것도 없지. 내게 자식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정색하고 매달리는 아이는 처음이었어. 꽤 신선하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내가 무서운지 가까이 오지도 않거든."

그야 무서울 만도 할 것이다. 태상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루디도 이 남자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 일에 관련된 사람 중 몇 명은 목이 날아갔을 걸세. 만일 나였다면 그 여자아이는 확실하게 죽었겠지."

그야 그랬을 것이다. 황후가 죽을 뻔했으니.

루디는 향기 진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우아한 몸짓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황제는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태상황제가 묻는다.

이번 일은 루디가 태상황제에게 부탁한 것이다. 시종장으로 하여금 리리샤에게 조언하도록 지시한 것도 루디였다.

황제 자신이 그냥 용서해버리면 선례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형평성도 문제지만, 기강이 해이해질 염려가 있었다. 그러기보다는 이번 일이 약간의 불규칙적인 케이스가 되는 편이 좋았다.

루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상황제 폐하, 저는 리리샤가 너무 위축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녀는 밝고 명랑한 지금의 성품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황제의 취향은 이상하군."

태상황제가 어깨를 움츠리며 히죽 웃었다.

글쎄, 그것은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여워하는 아이가 씩씩하고 명랑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걸 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로 두 아이 모두 뭔가 배웠을 거다. 불행한 사고였지만, 두 아이가 성장할 기회가 되어 준다면 헛된 일은 아니다.

태상황제가 잔을 들었다 금세 다시 내려놓았다.

"그 여자아이의 부족, 붉은매라고 했던가. 그들은 파수꾼 노릇을 잘 하고 있는가?"

"예, 고루카라는 상인이 그 부족과 경계 도시를 왕래하며 사이를 주선하고 있습니다. 경계도시의 영주도 새로 임명했어요. 당분간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들게 운영해야 할 테지만 앞으로가 기대되는 곳입니다. 야만족의 물건은 다른 나라에서도 꽤나 좋은 값에 팔리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태상황제가 다시 찻잔을 드는 일은 없었다.

이제 그런 물건조차 쉽게 들 수 없을 만큼 몸이 나빠졌다. 알아보지 못하도록 속이고는 있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분명 이 남자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데, 왜 이리 마음이 슬퍼지는 걸까.

***

찬바람이 불고 숨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계절이 되면서, 태상황제의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첫눈이 내린 날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시간이 하루의 반 이하로 줄었다.

루디는 매일 점심 무렵, 태상황제가 깨어있는 시간을 택해 잠시 얼굴을 보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소한 것들이다.

나디아 비의 처소에 갔던 리리샤가 마리와 함께 밭을 일구다 똥을 밟았다던가, 염소가 빨래하고 널어두었던 나디아 마마의 치마를 모두 씹어서 못쓰게 만들었던 일, 다른 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진실의 의자를 보고 깜짝 놀랐던 일. 그런 것들.

조금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태상황제가 잠이 들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면 조용히 밖으로 나온다.

보통은 루디가 오면 잠시 자리를 비우는 상황후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루디가 나가면 교대하는 것처럼 상황후가 안으로 들어갔다.

태상황제가 몸 져 누우면서, 그의 곁은 대부분 상황후가 지키고 있었다.

태상황제의 시중을 드는 것은 시녀와 시종들이다. 그들이 옷을 갈아입히고, 약과 음식을 먹이고, 배설을 도왔다.

상황후가 하는 일이라고 하면 가끔 열이 오를 때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거나 말상대를 하고 자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상황후는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을 모두 중단하고, 거의 하루 종일 태상황제 곁을 조용히 지켰다.

시종의 보고를 들으면서, 루디는 정말로 상황후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는 몸을 일으키고 부축을 받아 걸을 수도 있지만, 의사인 파블로는 이제 태상황제의 생명이 멀지 않을 거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때부터는 태상황제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마지막 방문이 이어졌다.

태상황제는 이전부터 자신의 생명이 얼마가 남든 의사의 진단을 속이지 말라고 말해왔다.

루디는 상황후가 없는 시간을 틈타, 솔직하게 의사가 한 말을 태상황제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듣고 태상황제가 조용히 웃었다.

"그래, 황제에게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 더 살아있어야 그대가 편할 텐데."

태상황제의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보였다.

태상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원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동안 함께 밤을 지냈던 모든 후궁의 인사를 받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디아그라는 마지막에 가까운 순서로 하라는 것이다.

후궁들이 태상황제와 있을 시간도 미리 정해주었다. 10분 정도면 된다고 했다. 모든 후궁에게 똑같은 시간을 정해, 한 명이라도 더 늘리지 말라고 했다.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황자와 황녀님들의 방문은 언제로 하는 게 좋을까요?"

시종장이 물었지만, 태상황제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그 아이들은 죽을 염려가 없으니."

점점 대화가 이상하다. 혹시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정신에 혼란이 생기는 걸까.

살짝 루디가 시종장을 쳐다보자, 그 역시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상황제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상황후 혼자 곁을 지키게 하라. 그대들은 괜찮지만 후궁은 곁에 두지 마."

가만히 침대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물었다.

"폐하, 확실하십니까?"

"그래, 상황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나디아그라 마마의 시간을 조금 늘릴까요?"

시종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태상황제가 그제야 시종장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레이, 그대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얼빠지게 변해가는구나."

"...."

태상황제가 루디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 내가 그대에게 해주는 마지막 조언이 되겠구나. 여자는 말이야. 진실이 어떤지 알아도 믿을만한 거짓말을 주면 제 편한 것을 믿는다. 남자가 수십 명을 농락하는 바람둥이라 해도 자신 앞에서 너만을 사랑한다고 맹세하면 믿고 싶어 하는 게야. 뭐, 남자도 다를 건 없지만."

태상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참으로 몹쓸 남자지만, 그래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상황후도 나디아도 다른 후궁도 모두 귀엽다. 한 명도 죽이고 싶지 않아. 내가 괴롭히는 것과 다른 상황에서 내 여자가 고통을 당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

시종장이 아, 하고 중얼거렸다.

태상황제가 히죽 웃었다.

"상황후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없어지면 옛날 일이 생각날 때마다 후궁들을 괴롭힐지도 몰라. 나디아그라가 특히 걱정이야. 그러니, 내 곁에는 황후만 남는 게 좋다. 내가 마지막까지 그녀를 가장 곁에 두었다는 추억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사람이라는 건 항상 마지막에 느낀 감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긴 말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태상황제가 잠시 숨을 골랐다.

"만에 하나, 상황후가 나디아를 괴롭혀 봐라. 나도 없는 상황에서 다치는 건 상황후겠지. 내 곁에서 가장 오래 있어준 여자가 비참하게 죽는 건 죽어서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내 곁에 마지막까지 머무는 건 반드시 상황후 여야만 할 것이야."

이 말은 시종장이 아니라 루디에게 하는 걸 거다.

상황후가 뭔가 일을 벌여 수습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라는 뜻이겠지.

"알겠습니다."

루디의 말에, 태상황제도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걸 느낀 것 같다.

"그래, 꼭 부탁하네, 황제."

태상황제가 안심했다는 듯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방 저편에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내가 죽거든 저기에 있는 지시대로 후궁을 처리해 주게. 내 미리 다 안배해놓았지."

그날부터 후궁에 있는 비들의 방문이 시작되었다.

후궁들은 한 번에 한 명씩, 태상황제가 피곤하지 않도록 시간의 간격을 두고 방문했다.

그때마다 태상황제는 미리 마련해두었다는 작은 선물을 후궁들에게 주었다.

대부분은 작은 액세서리 종류였다. 반지나 목걸이, 브로치 같은 것들이다.

거기에는 황가의 문장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태상황제는 각자에게 그 액세서리를 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나 그대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들고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해라. 이것이 그대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아. 허나 예로부터 황가의 문장이 찍혀 있는 물건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시종에게 그런 보고를 듣고, 루디는 자신이라면 그런 준비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디아그라가 받은 것은 황제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목걸이 형태의 펜던트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루디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초상화가 든 펜던트를 받은 건 나디아그라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들은 아마 위장이었을 것이다. 나디아그라 혼자만 초상화를 받은 게 아니라는, 그런 허술한 위장.

그 빈틈없는 남자가 그렇게라도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해졌다.

보고를 하던 시종이 상황후 역시 초상화 펜던트를 받았다고 말했을 때에는 조금 웃었다.

바람둥이는 할 게 못 된다. 살아 한창일 때도, 죽을 때도 태풍이 인다.

먼 땅으로 보내진 전 황태자는 태상황제의 죽음이 가까워졌지만 부친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태상황제는 여자들에게 나름 달콤한 것과는 달리 자식에게는 조금 냉담한 것 같았다.

결국 끝까지 자식들을 만나지 않았다.

다만 황후인 리리샤만큼은 여러 날에 걸쳐, 몇 번이나 만나 주었다.

그때마다 가만히 리리샤의 얼굴을 보았다고, 시종이 말했다.

어쩌면 리리샤의 얼굴을 통해서 나디아그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상황제는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새해를 열흘 앞둔 날 더 이상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해를 이틀 남기고 조용히 숨을 멈췄다. 하늘이 구멍 난 것처럼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루디는 그날 황제라는 존재를 공유하는 유일한 이해자를 잃었다. 오직 단 한 명의 고독한 군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태상황제가 죽고 나서야 실감했다.

태상황제의 숨이 멈추자, 황궁 안에 있는 종탑에서 뎅, 뎅, 하얀 눈을 배경으로 종이 울렸다.

그 종소리는 다시 외부로 퍼지고, 황도에서 가장 큰 종탑의 종소리로 이어졌다. 하나의 종소리가 다시 다음의 종으로 넘어간다. 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제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는 여러 날에 걸쳐 자신들을 사랑했던 태상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상황제의 관은 역대 황제가 모두 들어가게 되는 거대한 지하 무덤에 안치되었다.

루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태상황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죽고 싶었다, 라는.

황제가 되기 전, 보리스가 훈련시켰다고 들었다. 어쩌면 태상황제는 황제가 되기보다는 군인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한 번도 그런 눈치를 보인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것은 그런 삶이었을까.

태어난 자리가 삶을 결정하는 세상, 그것은 모든 사람의 위에 서는 황제 역시 다를 바가 없구나.

누구도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

태상황제가 자신의 사후에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던 책상의 서류는 후궁에 있는 첩비들의 처우에 관한 것이었다.

태상황제가 죽은 이상, 그의 손이 닿았던 후궁들은 모두 궁을 나가게 된다.

그때 궁핍하지 않도록 준비한 것이다.

나이가 젊은 후궁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내로 하사하게끔 미리 교섭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후궁도 찾을 수 있는 한도에서는 아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너무 나이가 많아 그런 자리를 찾을 수 없는 후궁에게는 죽을 때까지 어딘가 영지의 수입이 연금처럼 지급되도록 해놓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빈틈이 없다.

하지만 단 한 명, 나디아그라는 후궁을 나가라는 언급이 없었다.

황후의 생모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황후나 황제의 모친은 따로 궁을 마련해서 지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태상황제가 나디아그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건 아마 후궁에 두라는 뜻이었을 거다.

후궁이 아닌 궁에는 남자의 출입이 가능하지만, 후궁에는 보편적인 남성이 드나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지막까지 상황후에게 신경을 써주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죽어서 그런 조치를 했어도 서운해하지 않도록.

눈이 붉어진 시종장이 기가 막힌 듯 그분은 끝까지 집착이군요, 라면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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