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13화 (113/201)

#113 열 일하는 봉황새

계속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다. 뭔가가 먹고 싶은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

언젠가 이 어두운 공간도 끝이 나는 걸까.

하지만 가도 가도 끝없는 암흑뿐,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서 계속 걷는다.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이제 걷는 것도 지겨워졌을 무렵이었다.

어딘가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루, 루, 하며 통곡을 한다.

애절하다기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우는 걸까. 저 아이는 왜 저리 루라는 사람을 부르고 있지? 어른들은 뭘 하길래 애를 저리 울리나.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걷는데, 어둠 속에 희뿌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지만 확실히 빛이다. 몽글몽글한 빛이 수없이 모여 있었다.

어쩌면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음소리는 그 빛 가운데에서 들리고 있었다.

왠지 그곳을 향해 걸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어둠뿐이다. 갈 곳도 없으니 저 빛이 목적지가 되면 좋을 거다.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 그쪽으로 다가가자, 등 뒤에서 그를 붙잡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다.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마음에 걸렸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뒤통수에 목소리가 엉겨 붙는 듯 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발을 움직였다.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러면 괴로운 것과 만나게 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울음소리와 빛에 가까워졌다.

등 뒤에 달라붙는 듯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제서야 자신의 이름이 기억났다.

루디.

그래, 그것이 이름이었다.

조금 더 빛과 울음소리에 가까워지면서 우는 아이의 이름도 기억났다.

리리샤. 나의 황후다.

번쩍 눈을 뜨자,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리리샤가 그의 옷에 진득한 국물을 묻히며 울고 있었다.

더럽구나.

아무리 귀여운 아이라도, 더러운 건 더러운 거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제발 누가 이 더러운 콧물 좀 닦아줬으면 좋겠다.

*

시선을 돌려 확인하자, 처음 보는 방에는 리리샤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조금 놀란 것은 구석에 태상황제가 앉아있었던 점이다. 멍하니 눈을 껌벅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황제! 깨어났구나."

아니, 병자가 누워있지 않고 지금 뭐 하는 거지.

안 그래도 병색이 완연하던 태상황제의 얼굴이 반의반 쪽이 되어 있었다.

팔을 조금 움직이려고 했지만 무겁다. 억지로 손을 앞으로 돌려, 가슴에 매달려 우는 리리샤 몸에 손을 올린 뒤 태상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황제 폐하, 여기에서 뭘 하고 계세요. 몸에 좋지 않습니다."

목이 깔깔하다. 목소리를 내자, 모래가 목구멍에서 굴러가는 것 같았다.

"황제, 그대가 여기에 이리 누워 있는데 내가 편히 쉴 수 있겠느냐."

태상황제의 눈이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조금 전까지 초원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시선을 약간 밑으로 내리자, 시종장과 보리스가 보였다.

"보리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느냐?"

보리스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꼬박 열하루를 누워 계셨습니다. 경계도시에서 마차로 이동하여, 현재는 황궁입니다."

맙소사.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나.

루디가 몸을 꼼짝하며 일어나려고 하자, 시종장이 옆으로 와 등에 베개를 넣어 주었다.

태상황제는 몇 마디 나눈 뒤 안심했는지 처소로 돌아갔다.

리리샤는 나가는 걸 거부하고 그대로 루디의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 바로 옆에 눕더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루디가 온 걸 알고 안절부절못하느라 자지 못했던 것 같다.

시종장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약간 배가 고프지만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다.

마생물들이 조금 전까지 모든 사람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에 아주 가끔 보리스만 가까이 와서 물수건으로 입술을 적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마생물이 위협해서 물 한 모금, 약 한 알 먹이지 못했다고, 시종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의사도 오지 못했다.

하지만 몸 어디에도 나쁜 곳은 없다. 그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무거울 뿐이었다. 어쩌면 마생물이 마력을 계속 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디가 일어난 것으로 마생물들도 경계를 풀었다.

몇몇은 여전히 경계하는 것처럼 침대 주변을 떠나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모습을 숨기거나 리리샤 옆을 뒹굴거리며 느긋하게 몸을 쉬었다.

"내가 기절한 뒤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해 줘."

루디의 말에 대답한 것은 보리스였다.

경계도시에서 급히 마차를 수배하고 옮기느라 초원의 일은 뒷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특별 기관이 제대로 알아서 하니 걱정 말라고 보리스가 루디를 안심시켰다.

모처럼 해결된 일이 엉망이 되면 곤란하다.

"사람을 한 번 보내서 뒤처리를 꼼꼼하게 해."

루디가 당부하자 보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쉬셔야 합니다."

"그래, 조금 피곤하네."

루디는 무거운 손을 몇 번 쥐어 보았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루디는 초원에서 자신의 것이 된 소녀를 떠올렸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 배상으로 주어진 소녀."

"우선은 경계도시의 영주관에 두었습니다."

루디는 옆에서 더러운 얼굴로 잠이 든 리리샤를 보았다.

나이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초원의 그 소녀는 루디와 비슷한 것 같았다.

리리샤보다 두어 살 위일 거다.

어쩌면 리리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이쪽으로 불러서 리리샤의 시녀로 교육시켜 줘. 어차피 그곳에 있으면 그 아이한테 좋을 일은 없을 테니."

초원에서 그대로 있었다면 누군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갔을 거다.

하지만 배상으로 주어진 탓에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루디의 책임이다. 어떻게든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초원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들었는지, 가만히 서 있던 시종장이 물었다.

"폐하, 그 초원의 여자는 어떤 대우를 하면 되겠습니까. 후궁으로 맞이하시는지."

"아니, 그 아이는 그냥 시녀야."

루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황후의 시녀로 교육한 뒤 괜찮은 사람과 혼인시킬 생각이다. 그 아이는 리리샤와 나이가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야생마 같은 리리샤와 함께 두면 말썽은 부릴지 모른다. 하지만 리리샤의 숨통은 틔게 될 거다.

주변에 너무 어른만 있는 것보다는 비슷한 또래가 있으면 정서 발달에도 좋겠지.

그 사이 시종장은 루디가 먹을 음식을 준비한 모양이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시종장이 묽은 수프처럼 생긴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왔다.

일일이 시종장이 떠먹여 준다.

아기가 된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숟가락은 쥘 수 있겠지만 제대로 흘리지 않고 먹을 것 같지 않았다.

반 그릇 정도 먹은 뒤 잠시 쉬었다.

깜박 잠이 든 것 같다. 깨어났을 때는 몇 시간 흐른 뒤였다.

어느새 리리샤와 남작 부인은 방을 나가고, 안에는 시종장과 보리스뿐이었다.

루디가 눈을 뜬 걸 확인하고, 보리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디는 아까 남작 부인과 리리샤가 있어서 묻지 못했던 일을 꺼냈다.

"그 마생물은 어떻게 됐어?"

"폐하가 쓰러질 때 그 마생물이."

그 당시를 생각했는지, 보리스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폐하의 몸을 땅에 부딪치지 않도록 안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 몸이 없으면 만질 수도, 뭔가를 건드릴 수도 없는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요."

어쩌면 실제로 안았다기보다는 공기를 조종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람에 연이 날리듯, 공기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그 드래곤이 날아왔을 때 실제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걸 보면 가능한 이야기다.

보리스는 약간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거대한 마생물은 왠지 폐하를 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폐하가 쓰러지자 한참 동안 슬픈 얼굴로 바라보다 결국엔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그게 한 말은 어떻게 생각해?"

루디가 묻자 보리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생물이 말을 했습니까?"

"마녀에 대해서 말했잖아."

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뭔가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폐하께는 뭔가 소리가 들렸습니까?"

"그래. 그 녀석이 마녀와 관련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 드래곤의 말을 자신만이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루디는 시종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녀에 대해서 알아봐 줘. 그 마생물이 마녀에 대해 언급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했어."

다행히 마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조사가 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마녀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

"와토린구 공작가와 인연이 깊은 마녀가 한 명 있습니다. 만일 폐하가 마녀와 관계있다고 하면 그녀겠지요. 서쪽 마녀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서쪽 마녀라고 해서 푸테그린 제국의 서쪽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푸테그린의 동쪽이나 남쪽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대륙의 서쪽에 살고 있다 해서 그렇게 불리었다.

서쪽에 마녀가 그녀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녀가 가장 유명했다. 그래서 서쪽 마녀라고 하면 그녀를 말한다.

"서쪽 마녀는 단 한 명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제자에게 이어지는 호칭 같은 것입니다. 본래의 서쪽 마녀가 사망하면 제자가 다음 대의 서쪽 마녀가 되지요."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 마녀는 제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제국과는 관계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서쪽 마녀는 까마귀를 사역하고 있습니다. 민간에는 까마귀가 마녀의 심부름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서쪽 마녀가 부리는 까마귀를 마녀 모두가 사역한다고 착각한 탓이라고 하더군요. 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까마귀의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본다고 합니다."

"까마귀?"

루디가 멈칫하자, 시종장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예전에 후궁에 있을 때 까마귀가 내게 날아온 적이 있었다. 한두 번 더 그랬지만 그 이상은...."

문득 루디는 그 까마귀가 처음에는 후궁의 저택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됐지만, 그 이후에는 점점 더 먼 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봉황에게 시선을 돌리자, 왠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쑥 내밀었다.

"혹시 너희들, 계속 까마귀를 죽여 왔니?"

퐁퐁퐁, 빛이 터졌다.

"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퐁퐁퐁, 그렇다고 봉황이 빛으로 대답했다. 칭찬을 기대하는 것 같다. 눈이 반짝거렸다.

"얼마나 많이?"

퐁퐁퐁퐁퐁퐁퐁퐁퐁퐁, 빛이 수십 번에서 다시 수백 번 터진다.

가만히 보고 있던 보리스가 쿡쿡거리고 웃었다.

"열 일하는 새들이군요."

아아, 정말 그렇다. 설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지런히 까마귀를 죽이고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

"곤란하군요. 서쪽 마녀가 사는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종장이 눈썹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마녀가 까마귀를 사역하는 것도 그냥 아무 새나 가능한 건 아니겠지요. 뭔가 훈련을 시키거나 특별한 주술을 사용하는 걸 겁니다. 어쩌면 특정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토록이나 많이 죽었다면 마녀의 수중에 남은 까마귀도 얼마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최소한 더 이상은 이곳에 까마귀를 보내지 않을 거다.

칭찬을 해주지 않아서인지, 약간 풀이 죽은 듯 보이는 봉황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인 뒤 당부했다.

"잘했어. 하지만 더 이상은 죽이지 마."

포오옹, 포오옹, 포오오오옹, 느리게 빛이 깜박였다. 굉장히 풀이 죽은 것 같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마리의 봉황이 미안하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살짝 그의 손에 올라탔다.

손을 끌어당겨 가슴 위에 올려놓자, 두 마리의 새가 조용히 루디의 가슴에 앉았다.

마치 심장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루디의 가슴에 긴 목을 구부려 머리를 기댄다.

"까마귀가 있었다면 조금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시종장, 힘들더라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줘."

열쇠는 아마 마녀가 가지고 있을 거다.

루디의 말에 시종장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보리스와 시종장이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섰다.

두 사람은 루디가 정신을 잃은 뒤 계속 이곳에서 쉬지 못하고 그를 지켰던 것 같은데, 여전히 계속 곁에 있을 모양이다.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 루디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봉황이 따뜻한 기운을 계속해서 루디의 몸속에 흘려보냈다.

루디가 너무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마생물이 와서 그의 몸에 마력을 붓고 있었다.

어차피 다시 루디가 그들에게 마력을 나눠 주는데, 그들로서는 뭔가 불안한 모양이다. 루디가 마력을 주면 꼭 다시 그것을 되돌려 그의 몸속에 흘려 넣었다.

'암흑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는 누구였을까.'

어쩌면 그게 서쪽 마녀인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 먹었던 마법 사탕에도 뭔가 다른 숨겨진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와토린구 공작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당한 걸까. 루디는 정말로 그의 자식인가.

그 드래곤이 왜 그렇게 슬퍼한 건지, 마녀는 무엇을 시도했던 건지, 암흑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여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디가 지구에서 이곳으로 끌려오게 된 것은 그들의 짓인지가 궁금했다.

만일 그렇다면 자신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이 무자비한 세계에 평화로운 지구의 인간을 끌고 온 그 드래곤과 마녀를 용서할 건가.

루디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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