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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11화 (111/201)

#111 마녀는 실패했는가

그 많은 야만족의 전사는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등 돌린 자가 없다. 모두 목숨을 버리고 덤벼들었다.

결국 마지막 한 명의 전사까지 모두 죽은 뒤에야 살육은 끝이 났다.

너른 들판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제국병뿐이다.

와아! 피 묻은 대지에서 요란한 함성이 올랐다.

제국병들이 저마다 무기를 하늘로 쳐들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너른 대지 여기저기에 흩어진 시체에 눈이 멀미를 한다. 토할 것 같다.

하지만 루디는 감정을 누르며 자신 역시 빛나는 칼을 높이 들었다.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 높아졌다.

"푸테그린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병사들의 함성을 들으며 루디는 말머리를 돌렸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과 눈을 맞추고 다시 한번 검을 높이 든다.

와아아아아!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함께 초원의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미친 듯이 환호하는 병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 루디는 붉은매 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선혈로 찌든 옷에서 코가 썩을 듯한 피비린내가 진하게 피어오른다.

뒤에서 따라오던 보리스가 말을 옆으로 붙였다.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폐하, 괴로우십니까? 근처 강에 가서 좀 씻는 게 좋겠습니다."

경험 많은 보리스는 루디가 거의 한계까지 다다른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병사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괜찮아."

"폐하는 아직 어린 소년입니다. 다소 그런 모습을 보여도 병사들에게 나약해 보이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글쎄, 실제로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어쩌면 자신은 실제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루디는 보리스에게 빙긋 미소를 돌려주었다.

"정말 괜찮아."

"너무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래."

보리스가 곁에 있어 다행이다. 그가 없었다면 루디에게 이 전쟁은 조금 더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고마워, 보리스."

루디가 말하자, 보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막 근처로 가자, 붉은매 족장과 대전사, 몇 명의 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루카도 함께다.

뭔가 험악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는 전후 협상이랄까, 배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

루디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보리스와 고루카, 붉은매 족장이 따라 들어왔다.

외부와 차단된 장소에 들어서자, 들판에 가득하던 시체의 냄새가 약해졌다. 토할 것 같던 것이 조금 진정된다. 방금까지 날이 서 있던 마음도 아주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천막 안에는 깨끗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상석이라 생각되는 자리에는 방석처럼 약간 도톰하게 만들어진 천 제품이 놓여 있었다.

천막 구석에 어려 보이는 소녀가 한 명 서 있다.

위에서부터 뒤집어써 허리를 끈으로 묶는 식의 간단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녀는 사람들이 들어오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더니 일어나 허리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뭘 하는 거야."

루디가 깜짝 놀라 말하자, 소녀가 동작을 멈췄다. 겁을 먹은 듯하다.

그제서야 눈치챈 거지만, 소녀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고루카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회의하는 동안 시중을 들 사람입니다. 옷을 벗는 건 몸에 무기를 숨기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한 겁니다."

고루카가 힐끔 족장과 소녀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족장의 딸인 것 같군요."

루디는 소녀에게 손을 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옷을 입어라. 그냥 봐도 무기는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혹시 네가 그런 걸 가졌다 한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그걸로 죽을 사람도 없다."

소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붉은매 족장의 눈치를 보았다.

족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둥지둥 옷을 다시 입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누가 좋아서 스스로 옷을 벗어 보일까.

루디가 중앙으로 가자 소녀가 재빨리 방석을 매만져 자리를 만들었다.

그곳에 앉으라는 것 같다.

루디가 앉자, 다른 사람도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붉은매 족장은 앉는 대신, 루디에게서 약간 떨어진 앞에 엎드렸다. 어제 보았던 항복 표시다.

루디가 고루카를 보자, 그가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제는 족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전사가 대리를 한 겁니다. 오늘 정식으로 붉은매 부족이 항복한다는 의사표시를 보인 거지요. 폐하가 수긍하시면 배상 협상이 시작됩니다."

루디는 족장에게 시선을 주고 입을 열었다.

"붉은매 부족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족장이 동작을 풀고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저희 부족에서는 여자 백 명과 가축의 절반을 배상으로 내놓고 싶습니다. 부디 관대히 부탁드립니다."

루디는 무심코 고루카를 보았다.

초원에서 가축과 여자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들었다.

가축은 생명과 직결되고, 여자는 부족의 인원을 늘리는 데 필수적이다.

초원과 같이 노동력이 곧 힘인 장소에서는 사람이 줄어들면 그 역시 생존에 직결될 것이다.

심지어 올해는 가뭄이 심해 가축이 말라죽은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가축을 절반이나 내놓으면 이 부족의 생존은 치명적이 되는 게 아닐까.

루디의 생각을 고루카도 눈치챈 것 같다. 고루카가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다른 곳보다 배상하겠다는 내용이 조금 크긴 합니다만, 초원에서 배상은 중요합니다. 이걸 받지 않거나 줄여주면 이 부족에서는 아니라도 다른 부족에게 우습게 여겨져요. 필요 없어도 배상은 받아야 합니다."

고루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승자 측에서 너무 가혹한 조건을 내미는 것도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런 경우 다른 부족에게 인색하고 가혹한 자들로 인식된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는 아무도 관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고립되고 우습게 여겨질 거라고 말했다.

루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배상의 내용은 저쪽에서 제시하는 걸 그대로 받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붉은매에서 다소 무리하여 좋은 배상 조건을 내놓은 것은 폐하가 자신들에게 더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폐하는 어떤 걸 원해도 상관없습니다."

고루카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붉은매 족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더욱 목소리를 줄였다.

"저쪽은 폐하가 너그러운 성품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알면 배상을 저렇게 많이 내놓지 않았을 겁니다."

이상하다. 이 남자는 어째서 그런 걸 모두 세세히 알려주는 걸까.

"고루카, 자네는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지. 나라조차 달라. 한데 어째서 내게 그토록 성의를 다하는가?"

루디의 질문에 고루카가 히죽 웃었다.

"검은 바위 부족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게 하셨으니까요. 본래라면 제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못 이루고 그냥 허무하게 죽었을 테지요. 폐하께는 그걸 이루어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단지 그걸로? 초원의 부족은 이상하다. 어쩌면 고루카가 괴팍한 건지도 모르지만.

루디는 붉은매 족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자와 가축은 다른 부족의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런 것보다 다른 걸 원해."

족장은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마에 땀이 배었다.

고루카는 루디를 너그럽다고 표현했지만, 그렇지 않다.

루디는 단지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거나, 자신이 한 일 때문에 고통받는 게 싫을 뿐이다.

그것은 너그럽거나 인자한 것과는 다르다.

단순히 겁쟁이일 뿐.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괴로워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짓눌리는 게 싫은, 그저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만일 그런 걸 진심으로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이 사람들의 삶이 너무 불행하고 고달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겠지.

게다가 루디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아마 가축과 여자를 내놓는 것 이상으로 괴로운 일일 거다. 그러니 너그럽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루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더 이상 우리 제국의 국민이 초원의 부족에게 짓밟히는 것이 싫다. 그대들은 우리 제국의 파수꾼이 되어줘야겠어. 그것이 내가 내미는 조건이다."

족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정확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들의 부족이 경계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기를 원해. 초원에서 쳐들어오면 그대들이 가장 먼저 싸우고,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면 제국에 알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그대들이 이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지원하지."

유목민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렇게 묻는 루디의 말에, 족장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우리의 목숨은 당신의 것입니다."

"좋아, 나머지 세세한 일은 다른 사람이 협의할 것이다."

족장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사람들 앞에 차를 내놓는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아이는 제 여식입니다. 저 아이를 맹약의 증거로 당신께 드립니다."

루디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고루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아이를 받지 않으면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 맹약은 거절한다는 뜻이 됩니다. 받은 뒤 그녀의 처리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폐하의 마음대로이니, 일단 이 자리에서는 받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어떤 조건으로 내게 오는 거지?"

루디가 묻자, 고루카가 대답했다.

"초원에서 항복의 조건으로 내미는 여자는 가장 최하위의 아내가 됩니다. 제국에서는 첩에 가깝습니다."

루디는 표정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족장이 겨우 안심한 듯 숨을 내쉰다.

그 뒤에는 소녀에 의해서 맹약의 술이 루디와 족장에게 건네졌다.

초원에서 만든 술이라고 한다. 막걸리처럼 탁하다. 독특한 냄새가 풍겼다.

아직 십 대 어린 소년인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루디는 상당히 독한 술을 단숨에 마시고 잔을 비웠다.

밖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천막 밖에서 크게 외쳤다.

"폐하! 빛의 생물입니다. 먼 하늘에서 빛의 생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하다.

루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건 뭐야!"

"저것도 폐하의 것인가."

"아니야. 뭔가 이상하다."

당황한 병사들이 허공을 손가락질하면서 소란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반면 붉은매 부족과 다른 부족의 여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대지의 정령이다! 진짜 대지의 정령이야."

붉은매 족장이 중얼거리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루디는 먼 하늘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빛으로 가득한 생물이 펄럭펄럭 커다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마생물이다.

멀리서 날아오고 있는 것은 거대한 빛의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루디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마생물과는 달랐다.

본래 질량이 없어야 할 마생물인데, 빛의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찌릿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공기가 밀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드래곤은 순식간에 근처까지 거리를 좁히며 날아왔다.

가까이 오자, 실제로 바람이 세차게 일어 병사와 루디를 덮쳤다.

'맙소사, 이건 누구의 마생물이지? 이 세상에 나 말고 마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믿을 수 없다.

루디가 멍하니 드래곤을 보고 있는데, 봉황과 빛의 생쥐들이 찌릿찌릿 전기를 일으키며 앞으로 나섰다.

정체 모를 드래곤을 적대하며 루디를 지키기 위해 한껏 몸을 부풀린다.

두 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허공에서 드래곤을 막아섰다.

제국의 병사들도 저마다 창칼을 들고 루디의 주변에 몰려와 섰다. 보리스가 잔뜩 긴장하여 비스듬히 루디의 앞을 가로막았다.

드래곤이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파충류의 좁고 기다란 눈동자가 루디를 먼저 잡고, 그 뒤에 봉황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어린 새야, 물러서라. 주인을 지키려는 기특함은 알겠으나,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말을 할 수 있다니, 루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봉황은 드래곤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바짝 놈에게 다가갔다.

안 돼. 확실히 드래곤의 말대로다. 봉황은 저 거대한 마생물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뒤로! 물러서."

루디는 봉황과 생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리스에게 손짓했다.

"제국의 병사는 모두 물러서라."

"안 됩니다, 폐하."

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병사 모두가 싸운다 해도 드래곤을 이길 수 없다.

봉황조차 사람을 우습게 죽일 수 있다. 드래곤이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저것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루디의 말이 끝나기 전, 드래곤의 기색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담담한 공기 같던 드래곤의 기운이 갑자기 짙어지더니 사방으로 답답함이 퍼져나갔다.

공기가 무거워진다.

마치 공기 속에 돌덩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드래곤의 몸을 이루고 있던 빛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슬퍼서, 슬퍼서, 너무 슬퍼서 우는 것처럼 보였다.

[마녀는 실패했는가.]

드래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제국의 병사 절반 이상이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바닥에 엎어졌다.

말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보리스는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지만, 얼굴색이 푸르다.

루디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주변은 고요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공기의 답답함도 없어졌다.

드래곤이 하늘을 보고 울부짖듯 말했다.

[모두가 희생하여 힘을 주었는데, 마녀는 정녕 실패하였는가.]

드래곤이 슬퍼하고 있다.

봉황과 빛의 생쥐들이 드래곤에게 이끌리듯 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을 보았다.

봉황과 생쥐들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의식이 끊겼다.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루디는 자신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슬픈 목소리,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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