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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10화 (110/201)

#110 강자가 되는 것도, 약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엿 같아

붉은 깃털을 머리에 꽂은 남자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가장 안쪽에 두고, 소년과 자신들이 그걸 둘러싸듯이 엎드려 있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소년과 남자들은 일정한 동작을 하고 있다.

바닥에 이마와 무릎을 대고, 두 팔을 나란히 하여 팔꿈치부터 팔목까지 바닥에 붙인다.

손등은 바닥에 딱 붙인 채 손바닥을 위로 드러냈다. 손가락은 서로 떨어지도록 사이를 벌려 약간 오므린 상태였다.

무기를 전혀 들지 않았다, 죽여도 살려도 상대의 뜻대로 하겠다는 항복 표시였다.

고루카가 말했던 대로다.

근처에 있던 야만족 몇 명이 그 모습을 보고 엎드린 남자들에게 험악한 고함을 질렀다.

"겁쟁이 같은 놈들!"

그중 몇 명이 시퍼런 칼을 들고 달려왔다.

가장자리에 엎드려 있던 남자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했지만, 붉은 깃털의 남자들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앙에 있는 여자 중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엎드려 있는 남자들은 여전히 미동도 않는다. 석상처럼 굳은 채 그대로였다.

고루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항복하는 자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미리 항복에 대한 조건을 흥정하는 경우도 있고, 족장과 상위 전사들이 모두 죽어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지요. 항복한다고 엎드리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상대편에게 줍니다. 죽여도 살려도 노예로 삼는 것도 상관없이, 모두 상대편의 뜻에 따릅니다.]

그 말이 정말이었나. 이대로 놔두면 엎드린 남자들은 죽을 것이다.

루디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엎드린 남자와 달려드는 야만인들 사이에 빛이 퐁퐁 터지며 생쥐가 여러 마리 튀어나왔다.

생쥐가 칼 든 남자들의 몸 여기저기에 붙었다.

서늘한 빛의 불꽃이 튄다.

칼을 든 남자들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으며 통나무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엎드려 있는 남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먼 곳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천막 뒤편으로는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남자도 있는 모양이다.

야만족의 말로 뭔가 떠드는 소리와 여자들의 울음소리, 말발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병사들이 야만족과 칼을 부딪치는 소리도 요란하다.

루디는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엎드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와 아이들의 숫자가 많다. 천 명은 족히 되는 것처럼 보였다.

루디는 제일 앞쪽에 엎드려 있는 늙은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남자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깃털을 꽂고 있다. 아마 책임자일 것이다.

"그대들의 부족은?"

늙은 남자가 서툰 제국어로 대답했다.

"붉은매 부족입니다."

검은 바위나 포효하는 바람이 아니다.

루디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붉은매 부족이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새 고루카가 가까이 와 있었다.

"그대가 족장인가?"

루디가 묻자 늙은 남자가 이번에는 야만족의 언어로 대답했다. 할 줄 아는 제국어가 조금뿐인 것 같다.

"아닙니다. 저는 족장이 없을 때 부족을 맡는 자, 대전사입니다."

곁에 있던 고루카가 재빨리 끼어들어 통역을 했다.

"그렇다면 족장과 전사들의 결정이 그대와 다르면 어떻게 할 텐가? 내 명령에 따라 족장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느냐?"

"항복은 족장의 명령입니다. 조금이라도 여자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항복하라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만일 다른 곳에서 그들과 만나면, 붉은매 족장과 전사들은 제국의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그리 약속되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너희 성인 남자를 모두 죽여도?"

"그리하여 원적 몰살을 피할 수 있다면."

'이 남자, 용케 이것이 원적 몰살이라는 걸 알았구나. 고루카가 흔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루디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제국의 병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붉은매 부족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야만족이 제국에 항복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항복은커녕 지금까지는 제대로 부딪쳐본 적도 없다. 워낙에 야만족은 치고 빠지는 게 빠른 부족이니까.

그런 실패의 연속에서 모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오자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 높이 무기를 들었다.

다른 부족에서도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곳이 있었지만, 그들은 족장의 의사는 물론이요 자기들 끼리도 의견이 엇갈렸다. 그런 부족의 항복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이번의 원적 몰살은 초원을 향해 보내는 제국의 경고다.

이 한 번의 경고가 엄중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토벌대가 오게 된다.

그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복은 신중히 받아야 했다.

그 뒤로 야만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기세가 오른 제국의 병사들과 봉황 앞에서, 야만족의 많던 남자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떨어뜨렸다.

여자와 아이들이 사방으로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도병과 빛의 생쥐들에게 막혔다.

전장의 열기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몇 시간 전까지 선하고 순박한 얼굴로 루디와 대화하던 병사들이 서슴없이 다섯 살 남자아이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여기저기에서 아이와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린다.

병사들은 루디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제국의 병사 외에 서 있는 성인 남자는 없었다.

피 묻은 천막과 모래 위에 뒹구는 시체들을 보다가, 루디는 문득 자신의 몸을 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조끼 형태의 갑옷과 망토에, 뿌린 것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자신 역시 병사들처럼 수많은 아이의 목숨을 두 손으로 빼앗았다.

누구를 잔인하다 말할 처지가 아니다.

어디에선가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안 돼, 싫어, 제발, 애원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자, 병사 몇 명이 여자를 어깨에 멘 채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리스가 가까이 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 적은 모두 섬멸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보상의 시간입니다. 원하신다면 금지할 수는 있습니다만, 병사들은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루디는 포로처럼 한데 모여 앉아있는 붉은매 부족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붉은매 부족의 남자들은 대부분 표정을 없애고 조용히 바닥만 보고 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이 우는 아이도 있었다.

"저들 역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폐하의 뜻에 따릅니다. 여자가 적다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저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여자는 마음대로."

"알겠습니다."

"보리스!"

몸을 돌려 떠나려는 보리스를 불렀다.

루디는 그의 눈빛을 피해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 그를 보고 평범한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었다.

"너무 어린 여자는 삼가하라."

모래땅 위에서, 보리스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폐하가 명하시는 대로."

보리스의 말이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멀어지고, 훌쩍 사람이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스가 누군가를 발로 찬 모양이다.

병사가 우는 목소리를 내며 뭔가 말하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놈들! 너무 심하게 해서 여자를 망가뜨리지 마라. 적당히 해. 어이, 거기, 그래, 네놈 말이다. 그 여자는 너무 어리잖아."

보리스가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기분이 저하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의를 주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루디에게 말을 걸거나 가까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보리스가 잠시 혼자 두라고 말했던 건지도 모른다.

*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정탐을 보냈던 봉황 중 한 마리가 돌아왔다.

전투가 한창일 때, 몇 명의 야만인이 도망치는 것을 일부러 놓쳤다.

거주지를 습격하면 누군가가 약탈 나간 전사들에게 알리러 갈 거라고 미리 고루카가 귀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빠져나간 몇 명은 무사히 약탈 나간 자들의 흔적을 쫓고 있는 모양이다.

봉황의 수컷은 그들이 가는 방향이 도망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뒤 루디에게 왔다.

문득 루디는 봉황 수컷의 눈을 보았다.

이 봉황 역시 자신의 암컷이 뭔가에게 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분노하는 것일까.

루디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린 듯, 봉황이 목을 가늘게 진동시키며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리되면 나도 살지 못 한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

봉황이 다시 제 짝에게 돌아가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루디는 펄럭펄럭 날개를 움직이는 봉황을 올려다보았다.

초원의 민족에게 하지 못하는 입속의 말을, 마음속으로 봉황에게 건네본다.

'미안해. 용서하지 마라.'

이 세상이 싫다.

강자가 되는 것도, 약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엿 같아.

*

일반 도시도 그렇지만, 초원에서 밤은 금방이다.

어느 정도 흥분을 다스린 뒤, 완전히 저물기 전에 제국병은 자리를 약간 이동했다.

시체가 많으면 늑대가 꼬인다. 낮에는 수많은 병사를 보고 늑대도 조심하지만, 밤은 그들의 세상이었다. 소리 없이 놈들이 다가와 병사를 물어가도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항복한 붉은매 부족이 피가 덜 묻은 천막을 거두어 다시 설치하고, 일부는 새로운 걸로 세웠다. 천막을 세우는 속도가 깜짝 놀랄 만큼 빨랐다.

사방에 화톳불이 밝혀지고, 병사들이 천막마다 여자를 끌고 들어갔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두꺼운 천막에 막혀 약하게 들려왔다.

루디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톳불 앞에 앉아 흔들리는 그림자에 조용히 시선을 주었다.

옆에는 보리스가 앉아 있다.

보리스는 여자를 안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았다.

만약 보리스까지 그랬다면 이렇게 함께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의외였던 것은 고루카 역시 다른 부족의 여자를 끌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던 점이다.

같은 민족인데 상관없었을까.

그 남자의 감각을 모르겠다.

"괜찮으십니까?"

보리스가 묻는다.

루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리스가 말없이 화톳불 위에서 끓고 있던 물을 내려 한 잔 따라주었다. 고루카가 끓여준 초원의 차다.

약탈 나갔던 야만족과 소식을 알리러 도망쳤던 자들이 만난 것 같다.

봉황이 다시 알리기 위해 루디에게 왔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반나절은 걸릴 겁니다. 내일 정오 이후에 도착하겠군요."

"병사들은 괜찮을까?"

이렇게 깊은 밤까지 자지 않아도 되는지 묻자,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보리스는 가만히 그의 곁을 지키고, 루디는 말없이 화톳불만 바라보았다.

*

다음 날, 드디어 야만족이 도착했다.

봉황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지만, 반나절 걸릴 거라고 생각한 길을 그들은 두 시간 정도 단축해서 달려왔다.

말도, 사람도 지쳤을 것 같은데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전혀 피곤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붉은매 부족이 항복한 것을 모른다. 알리러 갔던 남자들이 항복하기 전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주지 습격을 들은 뒤, 붉은매 부족에서는 항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에 붉은 깃털을 달고 있는 남자들은 다른 야만족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것도 약간 뒤쪽으로 처져서 달리고 있다. 이쪽에서 야만족과 싸울 때 뒤에서 배신할 모양이다.

'전공을 세워서 자기 부족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올리려는 건가.'

초원의 민족은 순박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교활하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오자, 야만족 측에서 화살을 비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루디가 마력의 방패를 펼치자, 화살은 이쪽에 닿기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졌다.

하지만 놈들은 그걸 보고도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제국병도 서서히 앞으로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마력의 방패는 계속해서 펼치고 있다.

조금씩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져 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화살보다 칼을 써야 할 거리다 싶은 지점까지 왔을 때였다.

상대편에서 달려오던 붉은매 부족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리며 야만족의 뒤로 돌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함께 달리던 초원의 민족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퍽퍽 화살이 전사들의 몸에 박히면서 남자들이 땅에 떨어졌다.

"배신이다!"

"붉은매! 이놈들!"

야만족 중 상당수가 당황해서 뒤에 있는 붉은매 부족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붉은매 부족의 전사들의 수는 다른 야만족보다 적다.

가까운 거리에서 화살을 맞은 붉은매 전사들이 여러 명 말에서 떨어졌다.

더 이상 화살을 쏠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루디는 마력을 거두었다.

저희들끼리 싸우는 난투 장소에 제국병이 더해지면서 조금 전까지 깨끗하던 대지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주지에 있던 전사와 달랐다. 더 강하고, 더 무자비하다. 거기에, 자신들의 여자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국병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마도병과 마의 생물이 있다.

마도병은 거리를 두고 선 채 싸움에 뛰어난 자들을 하나씩 저격해 말에서 떨어뜨렸다.

먼저 싸움에서는 도망자를 감시하기만 하던 생쥐들까지 가세해, 전황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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