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09화 (109/201)

#109 원적 몰살

족장이 없는 동안 부족의 일은 은퇴한 전사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맡아서 결정한다.

붉은매 부족에서는 현재 족장의 동생인 대전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붉은매의 대전사는 제국 약탈을 위해 전사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족장의 명령 대로 거주지에 남은 남자들을 부족과의 경계선을 따라 몇 명씩 배치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니나 다를까. 족장의 예상대로였다.

검은 바위 부족의 남자 몇 명이 부족 간 경계에 와 있었다.

이 경계는 부족의 여자들이 물을 길러 곧잘 다니는 곳이다. 그런 길목에 다른 부족의 남자들이 와 있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저놈들은 이곳에 거주지 천막을 세운 뒤 가끔 보았던 자들이다. 종종 붉은매의 여자들에게 험한 시선을 던지곤 했다.

붉은매의 여자 몇 명이 물동이를 이고 천막 뒤로 나왔다. 남자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주춤한다.

붉은매 부족의 남자들이 여자들을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오고, 양측에 흉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멀리서 삐, 하는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습격이라는 신호다.

조금 전까지 여자들에게 신경이 가 있던 검은 바위의 남자들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달린다.

여자들도 물을 길러 가던 걸음을 멈추고 허둥지둥 거주지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천막 너머 여기저기서 다른 부족의 남자들이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매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곧바로 무기를 찾아 들고 적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대전사는 그들과 달리 붉은매 거주지 안쪽으로 들어갔다.

붉은매 천막 사이에서 활을 든 전사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뒤를, 아직 전쟁에 나가지 못하는 십 대 소년들과 나이든 남자들이 쫓는다.

"아니, 너희들은 이쪽을 지키고 있어라."

대전사는 붉은매 소년과 남자들을 멈추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적의 맞이는 전사들이 한다. 너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고 있어. 적이 거주지에 가까이 오면 곧바로 모두를 데리고 도망쳐라. 이건 족장님의 명이야."

근처에서 나이든 여자들이 아이와 젊은 여자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대전사는 남아있는 말과 수레의 수를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말을 탈 수 있는 여자는 가급적 말을 사용하는 게 좋다. 여자와 아이를 함께 태워. 말을 못 타는 사람만 수레에 태워라. 수레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게 지금 말을 묶어 놔."

"확실합니까? 이곳이 더 안전한 거 아닌가요?"

올해 육십이 다 된 남자가 물었다.

평상시라면 그럴 것이다. 이곳은 여러 부족의 거주지가 몰려 있기 때문에 남자들도 많다. 당연히 방어에는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대전사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초원에 나간 전사가 전멸한 일이 있었다. 만일 거주지 안쪽까지 적이 들어온다면 그들일 거야. 도망쳐야 해."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알리죠."

"그래, 부탁한다."

대전사의 명령을 받은 남자들이 달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다. 곧바로 남자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수레를 확인하러 뛰어갔다.

명령이 제대로 전해진 것을 확인한 뒤, 대전사는 활과 화살통을 들었다.

곧바로 피리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린다.

어느새 피리 소리가 늘어났다. 방향도 한 방향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7개 부족이 모인 거주지에는 여자와 아이가 더 많다고 해도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남자들은 실전에서 물러났지만 충분히 강하다. 초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쳐들어올 리 없었다.

대전사는 천막을 여러 개 지나쳐 달려갔다.

초원은 대부분 평야라 시야가 넓지만, 이번에는 여러 부족이 함께라 천막도 사람도 평소보다 많았다. 다른 때보다 사방을 확인하기 어렵다.

조금 달려 외곽 쪽으로 향하자, 붉은매 전사들이 다른 부족에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기마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횡으로 길게, 간격을 둔 채 넓게 퍼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초원 부족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년이 있었다.

멀리에서도 다른 자들과는 많이 다른 걸 알 수 있다. 머리색도 피부도 다른 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하지만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제국?'

대전사는 여러 번 눈을 껌벅거렸다. 틀림없다. 제국의 기마병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겁쟁이들이 이렇게 쳐들어올 리가.'

뭔가 이상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앞에서 오는 기마병 외에, 몇 명이 말을 탄 채 기마병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었다.

그들은 화살이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에 위치를 잡고, 긴 막대를 거주지 쪽에 겨누고 있다.

"저건 뭐야?"

대전사가 묻자, 근처에 있던 다른 부족의 남자가 대답했다.

"몰라. 하지만 저런 놈이 거주지 전체를 띄엄띄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아. 다른 쪽에 갔던 놈이 그렇게 말하더군."

초원 부족의 남자들은 침착하다.

습격한 것이 제국의 병사라는 걸 알고 히죽 웃는 놈도 있었다.

대전사는 붉은매 전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앞으로 약간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기마병이 물러가고 난 뒤 남는 무기와 말은 전공에 따라 나누게 된다.

모처럼 좋은 무기를 손에 넣을 기회다.

조금이라도 붉은매 부족의 몫을 늘리려면 다른 부족보다 많은 적을 죽여야 할 것이다.

어느새 제국의 놈들이 가까이 왔다. 사정거리다.

"쏴!"

대전사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부족에서도 명령이 떨어졌다.

거주지에서부터 수많은 화살이 제국 놈들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얇은 막 같은 게 제국 기마병 전체를 감싸며 펼쳐졌다.

막이 호수의 물처럼 투명하기 때문에 본래라면 눈에 보일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의 표면에서 파직파직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막이 기마병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크고 거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뭔지 모른다. 그저 두려운 것, 인간의 힘을 넘어선 것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부족 남자들이 쏜 화살이 투명한 불꽃 막에 부딪치자, 놈들의 몸에는 가까이도 가지 못한 채 먼지처럼 부스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

경악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허둥지둥 부족 남자들이 다시 활에 화살을 메겨 날린다.

하지만 두 번째도, 세 번째 화살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누군가가 비명처럼 중얼거렸다.

"대지의 정령이여, 우리 초원의 민족을 도우소서."

제국 놈들은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닥쳐왔다.

더 이상은 화살을 쏠 수 없다.

투명한 막이 사라지고 놈들의 군마가 부족의 전사들 앞으로 달려왔다.

'이놈들이구나.'

약탈 나갔던 180명의 전사를 죽인 건 이놈들이 분명하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초원의 부족은 약탈하던 중 자신보다 더 많은 적병이 나타나면 피해가 생기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한다. 도망치는 거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켜야 할 대상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이곳이 무너지면 바로 뒤에는 여자와 아이, 가축이 있다. 지켜야 한다.

대전사는 활을 버리고 칼을 바로 들었다.

'제발 내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도망쳐 줘. 제발 우리가 여기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때 도망 가.'

여자와 아이들이 제대로 도망칠 수 있도록 이놈들의 발을 이곳에 묶어야만 한다.

다른 부족의 남자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몇 명이 요란한 함성과 함께 제국의 놈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정령이 나타나셨다! 대지의 정령이다. 우리에게 정령이 내려 오셨다."

하늘을 보자, 아름다운 두 마리의 새가 햇빛에 반짝이며 날고 있었다.

커다란 날개를 우아하게 펄럭이며 크게 원을 그린다.

두 마리의 새가 높은 하늘에서 점차 아래로 몸을 낮추며 내려왔다.

차갑던 심장이 다시 뜨거워졌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용기가 치밀어 오른다.

대전사는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정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여자와 아이를 정령께서 지켜주신다!"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말과 말이 맞부딪치며 얽혔다. 말 등에 앉은 부족의 남자와 제국 기마병이 서로 칼을 휘둘러 상대의 목을 노렸다.

개인의 실력과 힘으로 보면 이쪽이 다소 우위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군데, 초원의 부족이 상대도 안 되는 곳이 있었다. 검은 머리의 소년과 그 근처에 따라 붙어 있는 늙은 남자다.

특히 검은 머리 소년은 이상한 빛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

검이 웅웅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를 때마다 부족 남자의 몸이 반동강이가 되었다. 마치 무게가 전혀 없는 눈송이를 베는 것처럼 순식간에 베였다.

'아까의 그 이상한 막을 만들어냈던 게 저 소년인가.'

생각해보면 그 막은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것처럼 보였다. 바로 저 소년의 손에서부터.

대전사는 말머리를 돌려 소년을 향했다.

본능적으로 저 소년을 죽여야 이 침입자들이 물러간다는 것을 알았다.

대전사가 말을 거칠게 몰아 막 소년의 근처에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빛나는 정령새가 그들의 바로 위쪽으로 날아왔다.

초원 부족의 사기가 급속히 오른다.

대전사의 팔에도 힘이 실렸다.

'이길 수 있다. 정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하지만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지의 정령 중 새하얀 몸을 가진 새가 다소곳이 검은 머리 소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양한 빛을 뿜어내는 새가 소년의 바로 앞에 몸을 멈추고 공중에 머물렀다.

초원의 부족을 위협하듯, 빛나는 새가 날개를 크게 벌리며 입을 크게 벌렸다.

새 앞에 있던 부족 남자들과 말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말똥처럼 푸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지의 정령이, 정령이."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초원 부족의 사기가 절망적일 만큼 낮아지는 것이 보였다.

초원에서 대지의 정령은 큰 의미를 가진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지의 정령은 몇 번이나 나타나 큰 가뭄 때는 물을 내리고, 제국의 병사가 초원을 유린하러 들어올 때는 위험해진 여자와 아이들을 구했다.

지독한 추위가 닥치고 눈이 모든 것을 뒤덮을 때도 순식간에 그 눈을 녹여 부족의 사람들을 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런 정령이 초원 아닌 제국 병사의 편을 들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생겼다.

한두 명이 도망치자, 이내 도망자는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바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데, 혼란이 너무 커서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도망치는 자들은 멀리 가지 못한 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령이 한 게 아니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남자들이 긴 막대를 겨누자, 거기에서 이상한 빛이 쏘아져 남자들의 머리를 맞췄다.

그 빛을 맞는 순간, 살이 타며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끝이다. 그대로 죽어버렸다.

제국의 기마병들이 어느새 대열을 맞췄다. 옆으로 길게 한줄로 서서 발맞춰 점차 다가온다.

가끔 정령새가 초원의 부족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면 사람과 말이 힘없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부족 측 남자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대전사는 부족의 전사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단 여자와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든 그들을 피난 시켜야 했다.

그때, 빛을 쏘는 막대를 들고 초원 부족을 지켜보는 사람 근처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초원 부족의 옷을 입고 있다.

고루카였다.

'아!'

그 순간, 제국의 병사들이 왜 거주지를 습격했는지 알았다.

'원적 몰살이다.'

이건 원한이 많은 부족의 남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일 때 초원의 부족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초원의 전사들은 용맹하지만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적이라고 생각하면 일단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틈을 봐서 습격했다.

하지만 열세에 몰려도 도망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들 바로 뒤에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이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때와 거주지가 유린당했을 때다.

특히 두 번째의 경우, 가장 지켜야 할 존재를 잃은 초원의 전사들은 오히려 적을 찾아가서라도 싸운다. 죽음이 눈앞에 있어도 절대로 도망가지 않았다.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가장 지켜야 할 여자와 아이를 잃은 전사는 전사가 아니라 그저 바보 멍청이에 불과하다. 거주지를 유린당한 부족은 초원에서 가장 멍청이로 비웃음 당했다.

원적 몰살은 원한 있는 부족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후퇴! 모두 거주지의 여자에게 돌아가! 돌아가라!"

대전사는 큰 소리로 붉은매 전사들에게 외쳤다.

다른 부족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붉은매 부족은 모두 꽁지가 빠져라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거주지로 퇴각했다.

***

고루카에게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봉황을 불러내 보았는데 효과가 크다. 봉황이 루디의 편에 서서 자신들을 공격하자, 야만족들은 눈에 띄게 사기가 꺾였다.

"전진!"

"핫!"

루디가 팔을 앞으로 내밀자, 기마병들이 힘찬 고함을 질렀다.

기마병이 속도를 맞춰 앞으로 나간다.

난생 처음 보는 무기와 봉황 때문에, 야만족은 혼란에 빠진 것 같다. 도망치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거주지 천막 쪽으로 제국의 병사가 가까워지자 다시 덤벼들었다.

고루카의 말대로다.

여자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 같다.

말을 타고 곧바로 루디의 앞을 향해 야만족이 달려왔다. 야만인의 눈에 핏발이 서있었다.

루디는 그를 맞아 허공으로 검을 휘둘렀다. 비스듬히 검을 내지르자 남자와 말이 함께 잘리며 피를 뿌렸다.

보리스가 옆에서 현란하게 검을 움직이고 있다. 그는 루디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말, 훈련할 때 사지에 마구 던져 놓았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다수의 야만족 전사가 갑자기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자들과는 반대의 행동이다.

왠지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머리에 둥글게 띠를 두르고 한쪽에는 붉은 깃털을 꽂고 있었다.

모두 같은 부족인 것 같다.

'도망갈 생각인가.'

루디가 그들을 바라보자, 하얀 암컷이 금세 눈치 채고 날개를 퍼덕였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 그들을 향한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그들의 모습을 살피고, 하얀 암컷이 다시 루디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자와 아이가 있는 거주지로 향했던 것 같다.

눈처럼 하얀 암컷이 루디의 얼굴을 향해 부드럽게 목을 부비는 행동을 했다.

암컷과 몸이 닿으면서 그녀의 생각이 조금 루디에게 흘러들어왔다.

[여자, 아이, 여자, 아이, 그들을 지켜.]

그런 사념이 느껴졌다.

'뭐, 도망칠 수도 없었겠지만.'

반대편에는 마도병과 생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아무도 이 자리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그 사이, 봉황 수컷과 기마병, 마도병은 착실하게 적의 숫자를 줄여갔다.

점차 앞을 가로막는 남자들이 적어졌다.

마침내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거주지 천막이 바로 코앞이다.

수가 적어진 남자들이 더욱 결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손에 사정을 두지 마라. 이자들은 우리의 여자를 끌어와 욕을 보이고, 아이들에게서 제 엄마를 빼앗아간 무리다!"

루디의 말은 병사들에게 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와 달리, 이제는 열몇 살 어린 소년까지 나무창을 들고 덤벼들었다.

그 모습에, 자칫 불쌍함으로 마음이 무너질 것 같다.

루디는 자신의 망설임이 보이지 않도록 입가에 힘을 주고 검을 내질렀다.

자신과 비슷한, 혹은 조금 더 작은 아이의 허리가 힘없이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보지 마라. 보면 망설임이 생긴다.

루디는 애써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머리에 붉은 깃털을 꽂은 남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한데 모아 바닥에 넙죽 엎드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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