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머리의 소년 황제 >
#101 검은 머리의 소년 황제
시종장을 거느리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햇빛은 화사하게 밝은데, 황궁의 복도에는 음침함이 깔려 있는 기분이었다.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시종장, 내가 없는 동안 황후는 밤에 후궁의 저택으로 돌려보내게. 저택에서 생활하고 공부할 때만 별궁으로 오게 해."
"폐하!"
약간 뒤에서 걷던 시종장이 당황한 듯 곁으로 다가왔다.
"황후 마마를 후궁의 일개 저택에서 머물게 하다니, 거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리리샤 혼자 별궁에서 지내는 건 너무 외로울 거야."
"하지만."
"시종장, 나는 리리샤를 다른 황후나 비빈처럼 기르지 않을 걸세."
루디는 시종장을 보았다.
시종장이 처음 리리샤의 공부 스케줄을 짜서 허가를 바란다며 가져왔을 때는 많이 놀랐다.
식사, 대화 시의 예절, 중요 교역국의 예절 등의 교육은 물론 각종 외국어, 댄스 강의 등으로 하루를 빽빽하게 채워 놓았던 것이다.
이제 겨우 9살짜리 아이를 새벽부터 밤까지 그런 공부로 채워서 뭘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루디는 시종장이 짠 스케줄을 모두 비우고, 가장 필요한 것만 오전 오후 나눠 약간씩 배우게 했다.
일상의 매너는 남작 부인과 한 명의 예절 교사를 항상 붙어있게 해서 평상시에 수시로 교정하고 있다.
"시종장, 황후는 이제 겨우 9살이야. 자네는 혹시 나를 기준으로 황후를 보는 게 아닌가?"
"...."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는 보통의 아이와는 다르네. 하지만 황후는 평범한 9살의 여자아이야. 너무 급하게 다그치지 마."
이 세상에서 평범한 귀족이나 왕족, 황족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고 있다.
친 어머니의 모유를 먹는 대신 유모의 젖을 빨고, 집사가 알아서 짜주는 스케줄에 의해 공부를 한다.
친부모의 얼굴은 하루 한 번 보기도 어렵고,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아이도 있다.
밖에서 뛰어 노는 아이는 당연히 없었다.
귀족은 귀족이기 때문에, 평민은 평민이라서 일하고 먹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리리샤는 그런 아이처럼 기르지 않는다. 활발하고 행복한, 그리고 평범한 아이처럼 기를 거야.
루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시종장에게 웃어 보였다. 태상황제의 싸우지 말라는 충고는 이 상황에서도 들어맞는 것 같다.
"황후는 내 취향대로 기를 테니, 왈가왈부하지 말게."
시종장이 약간 놀란 듯 루디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의 뜻대로."
조금 전까지 난처한 기색이던 시종장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이 세상을 가장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처세술이 아닐까 싶어졌다.
*
며칠 뒤, 제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토벌대가 조직되어 황궁을 출발했다.
천 명의 기병대와 어린 황제, 그리고 빛나는 새 두 마리가 황도의 가도를 지나갈 때마다, 도시 안 주민들이 모두 몰려나와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4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속았다.
고루카는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루카와 거래하던 제국의 관리는 정보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약속한 대가는 곧바로 받았지만, 다른 때보다 훨씬 좋은 정보였다며 추가 보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도시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관리는 항상 약속을 지켰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긴 기간이지만 경계도시에 머물면서 물건을 보충하고 다음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가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여러 날이 지난 뒤부터였다. 제국의 황제가 온다는 말이 들렸다.
경계도시에는 상반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약탈자들을 모조리 몰살해버릴 거라며 기뻐 날뛰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번에도 제국의 병사들은 실패하고 돌아갈 거다, 오히려 전쟁을 벌이는 동안 먹는 길만 막막해졌다고 걱정을 했다.
경계도시에서 노예상을 하는 이들은 신이 났다. 모처럼의 호황이 온다고 난리다.
그런 분위기로 도시 전체가 술렁이자, 고루카는 떠나려고 했다. 잘못하면 초원 부족인 자신도 날벼락을 맞는다. 보상이 아까웠지만 기다릴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시를 떠나려고 성문으로 가자, 병사들이 그를 붙잡아 이 작은방으로 데려왔다.
교활한 놈들. 완전히 속았다.
고루카는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한 번 초원을 배신하면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생계가 곤란해져요. 안내는 할 수 없습니다."
고루카가 제국과 약속한 것은 초원에서 약탈에 관한 정보를 얻으면 알리는 곳까지다. 안내를 맡는 건 계약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경계도시의 관리는 막무가내였다.
"미천한 야만인 주제에 감히 우리 제안을 거절하는 거냐?"
관리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 쳤다.
고루카는 기죽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와 거래하던 관리는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하고만 말하겠습니다."
항상 고루카와 이야기했던 관리에게 속기는 했지만 이 관리보다는 나을 것 같다. 이 높으신 관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협박하고 윽박만 질러댔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
약탈 정보를 제국에 주는 것과 그들 병사의 안내를 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초원의 부족에서도 상인 중 일부가 제국에 정보를 주고 있다는 건 은근히 알고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고루카의 경우에도 때로 제국에 정보를 건네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부족이 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일이었다.
고루카나 부족들과 교류가 깊은 상인들이 제국에 주는 정보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초원의 부족은 알고 있다.
고루카와 일부 상인은 초원 누구나 아는 정보를 제국에 넘김으로써 물건을 싸게 매입하거나, 초원 부족에게는 판매하지 않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
보통은 창칼과 같은 무기다.
고루카도 제국에 정보를 판매한 대가로 그런 무기를 드러나지 않게 몇 개씩 구입해서 다시 초원의 부족에게 팔았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원 부족은 정보의 판매를 모른 척 눈감아줬다.
하지만 제국 병사를 안내해 초원을 짓밟는다면 완전히 적으로 돈다. 고루카가 다시 초원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관리는 고루카가 끄떡도 하지 않자 화가 난 모양이다.
"이, 이런 고약한! 미개한 야만족 놈이 감히. 어디까지 버티나 한 번 보자. 당장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고문 받으면 생각도 달라지겠지."
"...."
이대로 끌려가 고문당하기 시작하면 끝이다.
고루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발 안쪽에 숨기고 있던 작은 칼을 뽑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채우며 관리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이곳은 삼층이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조금 다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도망칠 기회를 얻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문실에 끌려가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 너는 죽이고 간다.'
어차피 이제 제국과 일하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이놈을 죽여도 상관없을 거다.
그대로 관리의 목을 찌르는 순간, 구석에 서 있던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들어왔다.
관리가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가고, 당황한 병사들이 관리에게 달려왔다.
고루카는 그 틈을 이용해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뒤늦게 몇 명의 병사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병사들이 고루카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의 손은 멀었다.
창문 밑은 맨바닥이었다. 착지할 때 발목을 약간 삐었다. 고루카는 고통을 참으며 뛰기 시작했다.
병사가 몇 명 있었지만 거리가 멀다. 삼 층 창문에서 병사들이 소리치자, 몇 명의 병사가 이쪽을 보고 달려왔다.
'젠장!'
고루카는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이곳은 영주관의 외곽이었다.
놈들은 더러운 야만인이라 부르는 고루카를 영주관 안쪽에 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금만 앞으로 가면 영주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리에 숨어들 수 있다.
그때 어딘가에서 희미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구간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초원의 민족은 제국과 달리 아장아장 걷기만 해도 말을 탄다. 고루카도 마찬가지였다.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다.
고루카는 몸을 숨기면서 말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렸다.
멀리서 길쭉한 건물이 보였다. 말들을 모아놓는 마사다.
근처에 사람들이 좀 있었지만, 말을 손에 넣기만 하면 따돌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삔 다리로 달리는 것보다는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고루카는 가장 외곽에 있는 말을 목표로 몸을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조용조용 다가갔다.
뻥 뚫린 공간에 도착하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주 작은 차이, 단 한 발 정도만 저 사람들보다 먼저 말에 닿으면 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잠시 숨을 고른 고루카가 몸을 낮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에 있던 병사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 뭔가 외쳤다. 조금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몸을 돌린다. 고루카를 보고 놀란 듯하지만 이내 달려왔다.
점점 고루카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졌다.
'조금만 더.'
고루카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았다.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에는 몇 명의 병사가 바로 고루카를 잡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승리다.
고루카는 문을 잡아 뜯듯이 열고 훌쩍 말 위로 몸을 날렸다.
안장은 없지만 문제없다.
초원의 부족은 야생마를 잡아 길들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고삐나 안장이 없어도 제 몸처럼 다룰 수 있었다.
고루카는 말 등에 납작 엎드렸다. 말은 그를 태운 채 사람들의 머리 위로 훌쩍 날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모습이 멀어지고 영주관을 벗어났다.
적당한 곳에서 말을 내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뭔가가 날아와 고루카의 목을 감았다.
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몸이 허공을 훌쩍 날았다.
고루카는 말에서 떨어져 보기 흉하게 바닥을 굴렀다.
촤악, 요란한 파공음이 바로 옆에서 들리고,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자신을 낚아챈 것이 긴 채찍이라는 것은 그때 알았다.
기침하며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의 소년이 거대한 흑마에 올라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에 말 탄 병사들이 여러 명 있지만, 고루카의 눈에는 소년만 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다.
초원의 부족도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 소년과 같은 색상은 아니었다.
이 소년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하얀 피부에, 암흑 같은 검은색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갈색과 검은색으로 되어 있는 초원 부족과 달리 소년의 눈은 전체가 검은 것으로 보였다.
초원에서도, 경계도시에서도,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아름다웠다.
정말 남자일까. 혹시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얼핏 볼 때는 호리호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단련한 사람의 몸이었다.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얼굴은 아름다워도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가녀리거나 약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에게서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풍기고 있었다. 방심하면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귀족일까.'
분위기로 볼 때는 신분이 높을 것 같지만, 옷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색깔 있는 옷이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저렇게 먼지 붙은 옷을 입지 않는다. 고루카가 겪어본 결과, 번쩍번쩍 빛나는 게 제국 귀족의 특징이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늦게 영주관에서 쫓아온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 야만인 놈!"
눈이 벌게진 병사가 소리치며 고루카를 발로 차려는데, 소년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말을 몰아 가까이 오더니 소리쳤다.
"무엄하구나!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다니! 당장 고개를 숙이지 못할까!"
병사의 얼굴색이 단번에 변하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주변에 몰려와 있던 사람들도 대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들 엎드린 상태에서, 고루카만이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다.
소년 황제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그 모습, 혹시 자네가 고루카일까? 하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구나. 나에게 올라온 보고에는 고루카 자네를 내 손님으로 영주관에 머물게 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 꼴은 범죄자 취급이 아닌가?"
따각따각, 말보다 훨씬 작은 몸집의 소년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손을 내밀어 고루카의 팔을 잡더니 일으켰다.
"채찍질은 미안하네. 자네 말이 내 앞으로 튀어나오니 부하가 순간적으로 떨어뜨려 버렸어."
제국에서 황제는 굉장히 높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야만족이라 폄하하는 자신을 만져도 되는 걸까.
하지만 소년 황제와 함께 온 병사들은 아무도 그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경계도시의 높으신 분들은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얼굴을 찌푸리고 코를 막는데, 이 소년 황제께서는 닿아도 괜찮은 모양이다.
'재미있는데.'
발목이 시큰거리는데 왠지 웃음이 나왔다.
소년 황제가 손을 까딱해서 고루카에게 채찍을 날렸던 남자를 불렀다.
"보리스, 이 사람, 발목을 삔 것 같아. 좀 봐주게."
보리스라는 사람도 아마 높은 사람일 거다. 행동이 이곳의 귀족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고급이었다.
하지만 보리스 역시 고루카를 만지는데 주저하는 모습은 없었다. 손수 그의 다리를 만져 보더니 히죽 웃는다.
"이 정도라면 그냥 놔둬도 낫습니다. 폐하 때가 훨씬 심했죠."
"나는 자라나는 소년이니 치유도 빠르지만, 저 사람은 이미 성장이 끝난 어른 아닌가. 게다가 우리의 소중한 안내인이야. 저 사람이 없으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못할 뿐더러 초원에서 말라죽을 거야. 봐 줘."
점점 재미있다.
이 소년 황제는 이곳에서 살고 있는 높으신 분들보다도 초원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소년이라면 검은 바위를 씨조차 남지 않게 몰살시키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고루카는 우뚝 선 채 소년 황제의 모습을 보았다.
오랜 원한을 풀 수 있다면 제국이 아니라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아 보이겠다. 다시는 초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 검은 머리의 소년 황제 > 끝
작가의 말
100화 축하 감사합니다. 축하말 들으니 정말 기뻐요. 와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