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95화 (95/201)

< 나디아, 내 사랑, 나의 비여, 그대가 행복하기를 빌고 있다 >

즉위식이 성큼 내일로 다가온 날, 갑작스럽게 황제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해가 떨어지고 모두가 잠든 시간이 될 즈음 행차한다는 전언이었다.

나디아그라는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아주 약간 화가 난 것과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

몇 년간 황제의 방문이 전혀 없었는데 하필이면 왜 이렇게 바쁜 시기에 갑자기, 그런 느낌이었다.

즉위식이 바로 코앞이라, 저택에 있는 여자들은 누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장 바쁜 사람은 모두의 옷을 담당하고 있는 마리지만, 나디아그라도 엔리코가 입을 셔츠의 자수 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 유모와 남작 부인은 엔리코의 신부가 될 리리샤 공주 때문에 하루 종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기쁘게도 엔리코가 나디아그라가 자수를 놓은 셔츠를 입어준다고 말했던 것이다. 착한 아들이다.

문득, 나디아그라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네.'

사랑하는 아들 엔리코의 신부는 왜인지 이 초라한 저택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이 저택 한구석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가끔 그 여자아이와 눈이 맞는다.

그 아이가 어릴 때는 가끔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가만히 나디아그라를 쳐다보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보는지 모른다. 왠지 끔찍한 기분이 들어서 그 아이의 눈을 싫어했다. 뭔가 안 좋은 생각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말이 없던 여자아이는 자라면서 말괄량이처럼 변해갔다.

엔리코가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면서 그리되었던 걸까.

지금은 전혀 다른 아이 같다.

너무 활발해서 가끔은 진짜 여자아이인지, 아니면 폐하께 말로만 들었던 원숭이가 사람 시늉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다.

유모와 마리는 엔리코의 신부가 너무 말괄량이라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나디아그라는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이전의 조용하던 얼굴은 무서웠다. 마치 끔찍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리리샤 공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원숭이 같은 모습은 괜찮다. 무섭지 않아.

전혀 다른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활기찬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흥겨워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작은 동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리리샤 공주를 보면, 저 아이는 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왠지 마음에 흡족하다.

'그렇지. 엔리코의 신부가 너무 약하면 곤란해. 아이도 낳아야 하니까. 그래, 튼튼하면 좋은 거지.'

아무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리리샤 공주에게는 황후다운 행동을 주입해야 한다.

남작 부인뿐 아니라 요새는 나디아그라도 조금씩 차를 마시는 방법이라든가 우아하게 동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도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리리샤 공주는 강아지가 사람 옷을 입고 행동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굴었다.

그 상태로는 후궁의 여자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게 아닐까 가끔 걱정이 된다.

황후의 오점은 그대로 황제의 오명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엔리코를 위해서도 리리샤 공주는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여성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디아그라도 요새는 마음이 다소 조급하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황제가 온다고 하니, 말은 하지 못하지만 조금 번거롭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엔리코가 황태자로 낙점받기 전에는 어떻게든 황제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오만하게 이런 투정도 부린다. 물론 마음속으로 혼자만 하는 생각이지만.

나디아그라는 씁쓸하게 웃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머리를 만졌다.

목욕을 방금 한 터라 머리가 아직 축축하다.

옷은 폐하가 보낸 것으로 입고 있었다.

시녀 없이는 코르셋과 드레스를 입고 벗기 어렵다.

그걸 생각해서인지, 황제가 보낸 것은 아름다운 레이스로 장식된 느슨한 옷과 가운이었다.

황제가 오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라는 의미인 것 같다.

'오늘도 역시 그런 거겠지.'

날이 어두워지면서 저택 안에 있던 여자들은 모두 시종이 와서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황제가 와 있는 동안은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한다고 들었다.

내일을 생각하면 일찍 자고 싶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하는 황제와의 동침이니까 그냥은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문이 열렸던 모양이다. 사람 발소리가 들리더니 황제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디아그라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하다. 기억 속에 있는 황제 폐하와 모습이 달랐다.

전에는 더 크고 무섭게 생겼었는데, 지금은 왠지 작고 조금 덜 무서운 할아버지처럼 되었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

'바로 옆에 시종장이 서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폐하일 것 같은데.'

눈을 깜박이고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자, 황제가 고개를 들어도 좋다고 허락을 내렸다.

시종장은 아무 말도 없이 폐하를 침대까지 안내한 뒤에 문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디아그라는 황제를 위해 옮겨놓은 침대 옆 테이블을 눈으로 확인했다.

테이블에는 황제가 마실 술과 다과가 약간 놓여 있다. 시종장이 오늘 밤을 위해 아침 일찍 보낸 것이다.

황제가 의자에 앉자, 나디아그라는 조용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느냐."

"예, 폐하. 폐하의 성은에 넘칠 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

황제는 이전과 달리 말없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가만히 나디아그라를 보았다.

나디아그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황제가 뭔가 말하고 곧바로 침대로 이끄는 순서로 시간이 지나갔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오늘이 처음이 아닐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굉장히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 같다.

역시 이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살짝 시선을 올려 바라보자,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는데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나디아!"

"예, 폐하."

"이리로, 조금 가까이 오너라. 멀구나."

바로 앞에 앉아있는데 무엇이 그리 멀다 하는 걸까.

나디아그라는 약간 주춤했지만 곧 황제의 바로 앞으로 몸을 옮겼다.

황제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가느다랗다. 황제의 옷 사이로 드러난 손목도 얇다. 이상하다. 어째서 이 남자는 이렇게 가늘어졌지?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무릎에 올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황제가 가만히 나디아그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디아, 그대는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 것은 아니냐?"

"...."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역시 이상하다. 황제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디아그라는 잠시 생각하고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 나라에 와 처음으로 황제가 무섭지 않았다. 항상 부리부리하게 그녀를 쏘아보던 눈동자가 오늘은 온화하고 다정하게 보였다.

"엔리코가 있고, 폐하의 온정이 있사옵니다. 제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디아는 행복합니다."

"정말 그러하냐. 내가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 않느냐?"

약간 기운 없는 황제의 목소리에, 나디아그라는 살짝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오늘은 이상해. 황제한테 자신이 생각한 말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말도 못 하게 긴장하던 때와는 달랐다.

"폐하, 남들은 이 저택을 초라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첩이 간신히 후궁 귀퉁이에 작은 집을 얻어 찰나의 총애를 입고 있다고 업신여기지요. 나디아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디아그라는 황제의 가슴에 살짝 머리를 댔다. 어쩐지 그러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디아는 알고 있어요. 이 저택의 문 하나, 곳곳에 놓여 있는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나디아의 고국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는 거, 그것이 모두 폐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디아그라는 눈을 감았다. 아,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살면서 문득 알게 되었다. 혼수품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놓인 모든 물건이 나디아의 고국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제가 이 먼 나라에서 외롭지 않도록 폐하가 신경 써 주심을 아는데, 나디아가 불행할 리 없습니다. 진심으로 나디아그라는 행복합니다."

"고맙구나."

황제가 나디아그라의 입술에 수염에 파묻힌 입을 댄다.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가 입술에 전해졌다. 항상 싫었던 이 행위가 오늘은 괜찮은 것 같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날 밤 황제는 더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서로 껴안고 온기를 나눴다.

황제가 나디아그라의 피부를 쓰다듬고 가끔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틈이 없을 만큼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황제와 만나 처음으로 함께 자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시종장이 와 황제를 부르자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떠나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문득 진심으로 말이 나왔다.

"폐하, 사모하고 있사옵니다."

문을 막 나서려던 황제가 뒤돌아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디아, 내 사랑, 나의 비여, 그대가 행복하기를 빌고 있다."

황제는 조용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마차로 향했다.

나디아그라는 멀어지는 황제의 마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 드디어 즉위식.

아들 엔리코가 황제가 되는 날이다.

이처럼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몸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거리며 가슴이 뛰었다.

난생처음으로 마차를 탔다.

루가 항상 타고 다니는 지붕 없는 마차가 아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지붕이 둥그런 마차였다.

햇빛이 닿을 때마다 마차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커다란 창이 여러 개 있고, 예쁜 천이 창문 가장자리에 묶여 있었다.

굉장히 예쁘고 커다랗다.

마차 안도 예뻤다. 엉덩이에 닿는 것은 쿵 뛰어들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푹신한 쿠션 의자였고, 벽에는 반짝거리는 것들이 별을 뿌린 것처럼 붙어 있었다.

전날 밤에는 유모, 마리와 함께 다른 건물에서 지냈다. 황제가 오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유모와 마리는 어디론가 가버린 뒤였다. 나디아 마마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고 한다.

대신 리리샤와 함께 마차에 탄 것은 남작 부인과 처음 보는 시녀였다.

이건 마차를 탄 기쁨을 약간 없애는 소식인데, 남작 부인은 앞으로 리리샤의 시녀가 된다고 한다. 처음 보는 여자도 리리샤의 시녀라고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남작 부인의 잔소리를 들으며 공부해야 하는 건가. 우울하다.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게다가 지금 리리샤가 입고 있는 것은 움직이기 정말 어려운, 답답한 드레스였다. 온몸을 꽉 죄어서 숨을 쉬기도 어렵다.

하아, 정말 죽을 것 같아.

크기만 작을 뿐, 나디아 마마가 입는 코르셋과 똑같이 생긴 것도 속에 입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지만, 안 된다. 오늘은 참아야 해. 결혼하는 날이니까.

리리샤는 창에 얼굴을 내밀고 밖을 보았다. 경치가 자꾸만 바뀌었다. 처음 보는 커다란 건물이 여러 개 지나갔다.

"공주 마마, 그런 행동은 품위가 없습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남작 부인이 바짝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차를 처음 타보는 걸. 저런 건물도 처음 보는걸. 구경하고 싶어."

리리샤가 그렇게 말해봤지만 남작 부인은 엄한 얼굴로 안 됩니다, 라고 말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후궁을 나온 마차는 앞으로 루디가 있는 황궁에 간다. 루디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루도 리리샤만큼이나 불쌍하구나. 그러다 힘들어서 지쳐 쓰러지면 어쩌지. 걱정이다.

일 시키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린 뒤에, 마차는 굉장히 커다란 건물이 여러 개 있는 곳에 멈췄다.

사람들이 많다.

항상 보았던 것과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남작 부인은 더욱 가까이 와서 작은 소리로 계속 말했다.

앉으세요, 미소를 띠셔야 합니다, 눈을 두리번거리지 마십시오, 시선을 똑바로, 그 사람이 공주 마마를 보고 뭐라고 했다고요? 무시하세요, 등등.

남작 부인은 마차 안에 숨듯이 창문을 보며 계속 리리샤에게 말했다.

너무 하라는 게 많아서 그냥 마차 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그림자가 리리샤의 얼굴에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와!

리리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이 딱 벌어진다. 리리샤의 눈앞에는 어릴 적 한 번 보았던 환상의 왕자님이 서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예쁘다. 멋있다. 왕자님은 처음 보는 하얀 옷에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왕자님이다."

멍하니 중얼거리자, 왕자님이 쿡쿡거리고 웃었다.

"리리샤 공주님도 어린 신데렐라 같아요. 정말 예쁘네요."

"...루?"

"그새 내 얼굴을 잊어버렸나요?"

"하지만."

예쁘다. 정말 예쁘다. 리리샤는 말하다 말고 멍하니 루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예쁘다니, 루가 공주님 같아.

루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남작 부인과 시녀는 어느새 마차 밖으로 나가 있었다.

왜 내린 거냐고 묻자, 루가 그녀들은 단지 리리샤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동행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루가 바로 옆에 앉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각 달각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고, 루가 리리샤의 손가락을 잡더니 입술을 눌렀다.

"공주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리리샤도 똑같이 말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말이 막혔다. 얼굴이 뜨겁다. 왜인지 모르겠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마차를 탈 때부터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정말로 목구멍까지 뭔가가 벌컥벌컥 움직이며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공주님, 얼굴이 빨갛네요. 열이 있나?"

중얼거리며 루가 자신의 이마를 리리샤의 이마에 갖다 댔다.

꼴까닥, 소리가 나며 침이 넘어가고 리리샤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공주님!"

루가 깜짝 놀라 리리샤를 안아 올렸다.

루의 무릎에 앉아, 리리샤는 생각했다.

코르셋과 드레스가 너무 꽉 조여서 숨이 막힌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 나디아, 내 사랑, 나의 비여, 그대가 행복하기를 빌고 있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