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디, 너만의 나라를 만들어라 >
#093
황궁으로 돌아오자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어둠을 밝히고 있는 것은 넓은 연병장 곳곳에 설치된 횃불뿐이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을 받으며, 시종장은 늘 함께 다니던 시종들도 없이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흑마 위에 앉아있던 루디는 시종장과 보리스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보았다.
시종장의 눈매가 아주 조금 둥글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둘 사이에 뭔가 교환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루디가 3황자의 죽음에 대해 눈치챈 것도 보리스는 이미 알고 있는 걸까.
힐끔 보리스를 쳐다보자 시치미 뗀 모습으로 모른척한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시종장이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밤이 깊었는데 아직 안 주무시느냐?"
"조금 전까지 황후 마마와 함께 계셨습니다."
시종장이 담담히 말했다.
스스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아내를 위로하는 건가.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인가.
루디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거야.'
황후의 모습 대신 어린 리리샤가 둥실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아이의 심장을 고통으로 도려내는 일을, 아마도 자신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황제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보리스는 루디가 성군이 될 거라 추켜세우지만, 자기 자식까지 버리는 게 황제라면 그 자리에 루디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구에 대한 그리움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현대 지구의 상식과 개념은 여전히 루디를 이 세계 사람과 구별짓고 있었다. 평생을 보내도 루디는 이 사람들이 바라는 황제의 상과 맞지 않을 것이다.
보리스가 고삐를 잡고, 루디는 훌쩍 말에서 내렸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 황제의 침실에 도착하자, 방안에 있던 시종들이 조용히 밖으로 물러났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황제의 얼굴을 본 순간, 루디는 속으로 약간 놀랐다.
고작 몇 시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황제의 모습은 몇 년 정도 늙은 것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다지 애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생각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단 몇 시간 만에 이런 몰골이 될 정도라면 냉정해 보이는 황제의 속에도 부모와 자식의 정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황제는 루디가 들어오자 손을 약간 흔들어 자신의 앞으로 불렀다.
"이리로 오라. 가까이."
루디가 가까이 가자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다. 말하는 대로 맞은편 의자에 앉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명을 받고 움직이는 것과 군주로서 병사를 이끄는 것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땠느냐?"
루디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황제를 보았다.
"폐하, 저는 그간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저는 폐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문득 황제의 시선이 문가에 서 있는 보리스와 시종장에게 향했다.
루디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폐하처럼은 될 수 없어요."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깨달았을까. 아니면 보리스와 눈짓을 교환한 덕분에 알았던 걸까.
황제는 루디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것 같다.
황제가 바싹 마른 손을 내밀었다. 황제의 뜻에 따라 루디가 손을 내밀자, 가만히 잡고 황제가 말했다.
"깨달았구나. 그래, 잘 했다. 그런 걸 눈치챌 수 있다면 괜찮아. 나도 편히 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지켜볼 수 있겠다."
"...."
"루디, 얘야."
황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디가 고개를 들자,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보였다.
"네가 다른 이의 모략을 눈치챌 수 있으면 되는 거다. 그걸 모른다면 문제가 될 테지만, 알고 있으면 괜찮아. 네가 나를 흉내 낼 필요는 전혀 없단다."
황제가 루디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겁 많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약자일수록 더욱 잔인하게 상대를 다루는 법이라고 말하며, 황제가 쓸쓸히 웃었다.
"우리 제국은 여전히 대륙을 지배하는 가장 큰 세력이지만, 계속 쇠퇴하고 있었다. 마력의 크기가 작아지면 다룰 수 없는 마도구도 늘어나는 법이지."
다른 나라가 제국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강력한 마도병기에 있다.
코레아 왕조가 서기 전부터 제국은 강한 마력과 무기를 손에 넣고 주변을 압박해왔다.
가장 먼저 코레아의 시조를 발견해, 제일 강한 무기를 만들어내 소유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코레아 왕조가 가지고 있던 무기조차 야금야금 상당수 빼앗았다.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마도 병기를 소유한 나라다.
지금의 코레아 왕조는 제국이 가지고 있는 마도 무기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그들은 견본이 있어야만 원본과 똑같은 걸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제국이 그걸 제공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그런 무기를 만들어낼 사람은 더 이상 없는 거다.
그래서 제국이 세계 최강이다. 누구도 제국과 같은 병기를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하지만 마력소유는 물론이요 황제조차도 가지고 있는 마력이 작아졌어. 지금은 너에게 건넨 검과 마도병이 지닌 무기를 제외하면 거의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루디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서 내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황제로서 냉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자기 자식조차도 잘라내버릴 정도로 무정해지지 않으면 제국을 지킬 수 없었던 거야. 가진 힘이 없으면 인간은 겁이 많아진다. 그러면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타인을 억압하지."
황제의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너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힘이 있어. 더 이상 겉모습을 강하게 꾸밀 필요가 없다."
황제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더욱 힘이 담겼다. 루디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쥐고 황제가 말했다.
"얘야, 나를 닮으려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너의 뜻대로 행하면 돼. 아무도 네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다. 너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으냐?"
"저는, 아이가 굶어 죽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난하지 않게라든가, 모두가 행복한 나라 같은 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어린 아이가 뒷골목에서 혼자 굶어죽지 않는 나라이고 싶습니다. 아이가 굶고 있으면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적어도 그런 여유가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나라에 사는 이는 행복하겠구나."
황제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루디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며칠만 있으면 너는 제국의 아버지요, 보호자가 된다. 이 제국은 이제 너의 것이다. 누구의 흉내도 내지 말고,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마라. 너만의 나라를 만들어. 너에게는 그렇게 만들 힘이 있다."
"알겠습니다, 폐하."
피곤한 듯, 황제가 문득 눈을 감았다. 숨이 약간 가쁜 것 같다.
시종장이 다가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폐하, 이제 그만 쉬시는 게 어떨지요."
"그래, 조금 피곤하군."
황제는 그렇게 말한 뒤, 루디를 보았다.
"하지만 얘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태양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러운 곳에 생기는 그림자를 지우고 너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시종장과 그늘에서 움직이는 시종들이다."
황제는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대며 루디에게 약한 미소를 보였다.
"때로 그들의 행동이 더럽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황제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예, 폐하."
루디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 때문인지, 황제는 마치 몸 전체가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시종장이 조심스레 황제를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하지만 루디가 밖으로 나와 조금 걷자, 시종장이 뒤쫓아 따라왔다.
루디를 안내하던 시종이 물러가 거리를 약간 두고 서자, 시종장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전하, 죄송합니다. 이번에 전하를 속인 것처럼 되어 버린 일, 가슴 깊이 사과드립니다."
루디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황제와 이들이 하는 일이 모두 제국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밖에서 느꼈던 분노나 기분 나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걱정 마라. 보리스와 폐하께서 나를 가르쳤어. 그대가 나를 업신여겨 숨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시종장, 이후 내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 그대의 속뜻을 안다 해도 누군가가 나를 속이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내가 그대를 곁에 두는 걸 꺼리게 만들지 마."
시종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시종장은 귀족이다. 죄인이나 평민이 아닌 이상, 이 나라 귀족에게 이런 습관은 없었다.
루디가 놀라 일으키려 했지만 시종장은 오히려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전하."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보리스가 히죽 웃으며, 자신도 마찬가지 심정이라는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것 조차 상대를 달래기 위한 술수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이 풀어져 버렸어.
루디는 어깨를 으쓱하고 피식 웃었다.
"그래, 믿고 있어, 시종장.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줘.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
복도 저편에서 시종들이 일손을 멈추고 바라본다. 시종장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내리며 일어섰다.
"궁으로 모실까요?"
시종장이 말하는 것은 루디가 머물고 있는 별궁이다.
"아니, 공주에게 간다. 오늘은 말도 없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릴지 몰라."
"하지만 너무 피곤하지 않으실지요. 황도에 도착한 귀족들의 면회 신청이 밀려 있습니다. 오늘도 날이 새면 곧바로 일하게 되실 텐데, 몸을 상하십니다. 귀족들의 면회를 조금 미루어 틈을 만들까요?"
"괜찮아. 이 정도는 끄떡도 없다. 시종장도 직접 겪어 봤을 테니 알 것 아닌가. 보리스가 나를 얼마나 호되게 훈련시켰는지.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피곤한 것도 아니지."
시종장이 드물게 표정을 펴고 웃는다.
"후궁에는 어두울 때 혼자 가면 안 되는 거지? 함께 할 사람을 좀 불러 줘."
루디가 걸음을 옮기자 시종장이 약간 멀리 있는 시종 몇 명을 손짓으로 불렀다.
건물을 나가자 루디 전용의 화려한 마차가 와 있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여러 명의 시종이 다른 마차를 타고 뒤를 따랐다.
루디는 마차에 앉아 등을 쭉 폈다. 뼈를 늘이고 어깨를 움직여 몸을 풀자, 조금 쌓여있던 피곤이 물러가는 것 같았다.
'공주가 기다렸을 텐데.'
황궁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CCTV를 확인하지 못했다. 뒤늦게 영상을 불러오자, 공주가 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오늘도 많이 울었나 보네.'
공주의 뺨이 구정물로 약간 시커먼 것 같다.
유모나 시종장은 공주가 너무 루디에게만 매달리는 것 같다고 은근히 걱정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공주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루디에게 안심을 주는 걸 그들은 모른다.
루디는 마차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보았다. 캄캄한 하늘에 가끔 봉황의 불빛이 번쩍였다.
평소처럼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지만 가끔 불빛이 춤추듯 허공에 나타났다.
이제는 남의 이목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렇게 이른 뒤부터, 봉황은 루디가 시선을 주면 종종 저런 식으로 불꽃을 튀겼다.
멍하니 봉황의 불꽃이 피고 다시 지는 걸 보다가 눈을 감았다.
리리샤 공주가 자신을 애타게 찾아주면 마치 이 세계가 그에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이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이 세계에 온 것은 전생에 죄를 지어 벌받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해서 불러온 거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찾는 것에 안심하다니, 아마 자신은 이기적이고 나쁜 어른일 것이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약한 사람은 강한 자에게 유린당한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통용되는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루디와 공주처럼 선한 관계를 쌓고 있는 사이에서도.
순수한 어린아이의 호의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것조차도 공주를 만나면 눈 녹듯 사라지니, 참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영악한 존재다.
루디는 씁쓸히 웃으며 잠깐이나마 눈을 감았다.
< 루디, 너만의 나라를 만들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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