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92화 (92/201)

< 그랬지, 이 세상은 약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

#092

아이는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여덟? 몸이 작고 가느다랗다.

봄이라고는 해도 해가 지면 아직은 날이 서늘했다. 벗고 다닐 정도의 기온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얇은 바지만 한 개 입고 있었다. 발에는 구멍이 뚫린 짚신 같은 것을 신고 있다.

짚으로 바닥을 엮어 만든 신발은 가난한 농민이나 도시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로 신는 것이다.

푸테그린의 대도시, 더구나 이 황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발이었다.

벌거벗은 아이의 상체는 얇은 피부가 그대로 몸에 달라붙어, 인체를 이루는 뼈의 형태가 어떤지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허옇게 부르튼 입술과 툭 튀어나온 아이의 눈이 횃불 아래에서 번득거렸다.

아이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루디를 노려보고 그대로 달려왔다.

아이의 손에는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철조각이 들려 있다.

무기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기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철조각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아이와 루디 사이에는 병사가 수십 명이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한 아이를 향해, 병사가 창을 번쩍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루디는 병사를 중지하려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보리스가 루디를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스윽 나서 그의 앞을 가리자, 입을 다물었다.

루디는 자신이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리스와 시종장이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루디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가진 해독의 힘이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중독된 아이들을 보면 병사에게 기절만 시키라고 명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나서야 보리스와 시종장의 말을 이해했다. 부랑아라는 단어에 실려있는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노예는 팔기 위해서 음식을 먹인다. 소 돼지보다 못한 걸 먹여도, 일단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은 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랑아의 생명에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없다.

거리에 내쫓긴 아이들은 살아도, 죽어도 보통 사람에게 하등 관계없는 일이다.

집 없고 보호자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면 단 한 끼의 음식도 마련할 수 없다.

저 아이는 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게 아니었을까. 약초가 다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신체가 가진 이상의 활력을 주어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랬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세상은 약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루디는 참담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아이는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없었다.

절걱절걱, 뛰는 모습이 약간 이상했다. 가느다란 아이의 몸 어딘가에 부러진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독된 약효가 떨어지면 필시 죽기보다 심한 고통이 밀려올 것이다. 어쩌면 죽여주는 게 오히려 자비일 정도로.

루디를 향해 오던 아이가 병사의 창에 쓰러졌다.

사람들 틈에서 다른 아이가 한 명 또 튀어나왔다. 거의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루디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흑마가 크게 울면서 앞발을 올려 허공을 박차더니, 주인의 뜻에 따라 앞으로 튀어나갔다.

루디의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가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며 튀어나온 아이의 몸을 횡으로 베었다. 아이는 달리는 모습 그대로 머리가 분리되었다. 툭, 힘없이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으로 찌르면 시간이 걸린다. 아이가 죽으면서도 고통스러울 거야. 앞으로 아이의 목숨은 내게 맡겨라."

루디가 말하자, 주변의 병사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먼저 루디에게 덤벼들었던 아이는 창에 찔린 뒤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약하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세워 루디를 죽이려고 작은 손을 움찔거렸다.

이미 그 손에서 철조각은 떨어져서 피와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루디는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검을 쳐들었다. 가볍게 내리치자, 땅이 깊게 파이면서 아이의 작은 머리가 톡 떨어졌다.

아이의 몸은 아주 조금 움찔거리다 마침내 동작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보자, 이미 폭도들의 상당수는 진압되어 있었다.

성전의 신도들은 약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지만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일반인들이다. 숙련된 병사들의 창칼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베어져 쓰러졌다.

시체가 쌓이는 거리 너머로, 멀리에서 유난히 깨끗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여러 명 보였다. 폭도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평민들 사이에 섞여 있지만 같은 편인 것 같다.

그들의 주위에는 용병 같은 남자들이 수십 명 있었다.

보리스가 곁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신관과 성전 기사입니다. 성전의 표식을 달고 있지 않군요."

루디는 다시 훌쩍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탔다.

"잡으러 간다."

루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달리기 시작했다.

루디의 말이 훌쩍 거리를 달리고, 병사들을 앞질렀다.

어느새 불길이 완전히 잡히고 한 쌍의 봉황이 루디 머리 위로 날아왔다.

비명이 난무하는 거리 곳곳에서 봉황을 우러러보며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그대로 지나쳐 신관과 성전 기사 앞으로 내달렸다.

루디와 봉황을 본 신관과 성전 기사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마리의 봉황이 훌쩍 허공을 튀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봉황 수컷이 날개를 펄럭여 제일 앞장서 도망치던 신관의 앞을 막는다.

봉황이 몸의 일부에 불기운을 띄운 모양이다.

살짝 닿은 신관의 손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화상을 입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신관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다른 신관과 용병이 겁을 먹고 걸음을 멈춘다. 어떤 이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빌고 있었다.

흑마가 허공을 날듯이 뛰어, 한달음에 그들의 옆에 도착했다.

루디는 고삐를 낚아채 말을 멈추었다.

조금 전 보았던 아이의 처참한 주검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이를 이용하는 간악한 자들이다. 분노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루디는 옆에 있던 보리스의 허리에 손을 뻗었다. 그의 허리에는 항상 사용하던 채찍이 매달려 있다. 루디의 뜻을 금방 눈치채고 보리스가 채찍을 건넸다.

휘리릭, 채찍을 허공 높이 휘둘러 신관의 몸에 내리쳤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신관의 얼굴에 긴 채찍 자국이 남았다. 살이 패여 얼굴 전체로 피가 흩어졌다.

채찍 한 대에 신관이 기절하고, 루디의 채찍은 바로 그 옆에 있는 신관과 용병을 향했다.

촥, 촥, 소리를 내며 채찍이 땅을 치고 신관과 용병을 연달아 때렸다.

"전하의 곁에 더러운 자들을 가까이하지 마라!"

그 사이 대장 한 명이 소리치고, 루디의 주변에는 어느새 수십 명의 병사들이 몰려와 사람 벽을 만들었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소리도 없이 그의 옆 바로 뒤에 딱 붙어 서 있다.

그 덕분에 뜨거워졌던 머릿속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자들을 포박해둬라. 보리스, 3황자에게 가자."

루디의 말에 병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몇 명이 도망치려고 하거나 무기를 휘둘렀지만, 신관과 용병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붙잡혔다.

여러 명의 병사가 성전 무리를 줄로 묶어 바닥에 꿇어앉히는 것을 보면서, 루디는 다시 어두운 거리로 말을 몰았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병사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도시의 거리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3황자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건물을 뛰쳐나와 성전의 관계자를 찾았다.

하지만 반란 소식을 전했다던 관계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저택에는 측근 한 명 만이 따라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사람이다.

측근이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황자 전하, 안으로."

"무슨 일이냐. 성전에서 연락했다던 사람은 어디에 있어!"

"전하, 일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안에서 설명합니다."

"왜."

말하려는 3황자의 팔을 측근이 잡았다. 측근이 귓가에서 작게 속삭였다.

"저택은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뭐라구."

황망히 정원 너머에 시선을 주었던 3황자는 어쩔 수 없이 측근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서재에 접근하지 마라."

측근이 노예와 하녀들에게 당부하고 3황자에게 서재로 향할 것을 촉구했다.

허둥지둥 서재로 들어가자, 측근이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야! 설명을 해라. 대체 반란은 또 뭐고, 연락했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느냐."

하지만 측근은 대답 대신 조용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전하, 어째서 조금 전에 하녀가 가져다준 술을 드시지 않았습니까."

3황자의 바로 앞까지 온 측근이 조금 슬픈 듯 말했다.

"뭐?"

그렇게 묻는 순간, 측근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순식간에 측근의 몸이 3황자의 등 뒤로 돌고 몸이 딱 붙었다.

벗어나려고 해봤지만 움직일 수 없다. 이 남자의 힘이 이렇게나 강했던 걸까. 몰랐다.

하지만 왜? 왜 갑자기.

거기까지 생각하던 3황자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문득 깨달았다.

아, 아버지구나. 이 남자, 아버지의 앞잡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어릴 때부터 그를 곁에 두도록 한 것이다.

이 남자 한명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곁에 있던 자들은 몇 명이나 더 있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입김이 닿은 자였을까.

이들이 사 왔던 노예 중에도, 어쩌면 이 저택에서 일하는 노예조차 아버지의 하수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알겠다. 성전의 반란과 한데 묶어 나를 제거하려는 거구나. 아버지, 벌써 내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제국에게 내가 방해라고 생각했나.'

이 측근은 종종 3황자 자신의 서신을 대필하기도 했다. 서류를 만들면 서명만 3황자 자신이 하는 식이었다. 그것조차 아버지가 의도했던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서류를 조작할 날을 위해서.

하하. 정말 아버지는 못 이기겠다.

한동안 숨을 쉬지 못한 몸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측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약을 드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 고통 없이 잠자듯이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측근의 말을 끝으로, 3황자의 의식은 완전히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3황자의 저택은 병사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체포해라."

루디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저택의 문을 강제로 떼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3황자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3황자는 서재의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입에서는 독이 든 것으로 보이는 술을 약간 흘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자신의 음모가 모두 발각 난 것을 알고 자살한다는 취지의 유서가, 아버지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혀 있었다.

저택 안에는 노예와 평민 하인만 몇 명 있을 뿐 다른 이는 없었다.

루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서재를 나왔다. 보리스가 조용히 뒤를 따른다.

"모두 수고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 아직 성전의 잔당이 남아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체포해라. 시민의 피해를 더 이상 늘리지 마."

루디의 말에 병사들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상당수의 병사는 다시 도시 속으로 향했다.

루디는 보리스를 보지 않았다. 지금 보면 뭔가 가시 돋친 말을 할 것 같다. 속았다,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씁쓸하게 남아있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뭔가 안 맞는 부분이 있었다.

얼핏 들으면 모서리 없이 둥글게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데, 어딘가가 어색했다. 이제야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3황자의 죽음은 만들어진 거야.'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3황자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이 일을 벌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보리스도, 시종장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르는 건 루디 한 사람뿐이다. 오늘의 그가 꼭두각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뒷맛이 나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병사들이 목록에 적혀 있는 신관을 모두 체포한 뒤에야 오늘의 작전은 끝이 났다.

수습을 위해 약간의 병사를 남기고, 동이 트기 전 루디와 병사들은 도시를 가로질러 황궁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빛을 뿜는 봉황의 소문이 어느새 퍼졌는지, 사람들이 넘쳐흐를 만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루디와 봉황을 보고 환호성이 터진다.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새로운 소년 황제 만세, 여러 가지의 말이 루디의 귀에 들려왔다.

몰려온 군중 사이로 아이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통통한 아이, 마른 아이, 아이들이 힘차게 손을 흔든다.

부랑아로 보이는 아이들은 없었다.

이렇게 구경하는 자리에조차 그런 아이들은 접근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걸까.

보리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 사람들에게 전하의 모습을 뵈는 건 일생에 몇 번 없는 영광입니다. 부디 손을 흔들어 주세요. 저들에게 평생의 자랑이 될 겁니다."

루디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손을 올렸다.

거리가 떠나갈 듯,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루디의 눈길을 끌기 위해 요란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루디는 보리스를 보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보리스, 어떤 황제가 될지 나는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결심했어."

"전하는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자애롭고 동시에 냉정한 분이십니다. 분명 성군이 되실 터,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두 마리의 봉황이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위를 난다.

루디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처럼, 봉황은 아이들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몸을 낮춰 그 손에 자신의 날개를 살며시 부딪쳤다.

사람들의 환호성 사이로,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까르륵 들려왔다.

< 그랬지, 이 세상은 약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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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2/4 오타 및 표현(오활하다)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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