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과 황이라 봉황이다 >
#091
루디와 병사들이 향하는 길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놀란 뒤에는 신의 새라고 난리를 피우며 넙죽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루디를 본다.
그때마다 불새는 뽐내 듯 사람들의 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루디에게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불새의 눈매와 표정이, 뭐랄까, 조금 심술궂고 조금은 의기양양이다. 자랑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신령스러운 동물을 기초로 한 거라 군자 같은 성품이 아닐까 했지만, 의외로 뽐내기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다.
"지오그의 신전은 이쪽과 이쪽, 그리고 여기에 있습니다."
보리스가 루디의 곁으로 와 지도를 펼치고 몇 군데 장소를 짚었다.
황도에 있는 성전의 신전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신전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좁기 때문이다.
푸테그린 제국에서, 성전은 오랫동안 비주류였다. 현재의 황제는 물론이요, 그 이전의 황제들도 지오그교를 은근히 배척했다고 들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성전을 꺼리는 황제의 의향을 살펴 누군가가 손을 쓰는지, 아니면 건물의 주인이 알아서 피하는 건지, 웬만한 건물은 성전에서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전은 제국에서 한 번도 성대한 신전을 가진 적이 없다. 대신 성전에서는 일반 주택을 여러 개 임대해 신전으로 사용했다.
"이곳이 도시에서 가장 큰 신전입니다."
보리스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다.
각 신전으로는 이미 병사가 출발했다.
하지만 성전의 폭도들 역시 움직인 뒤였던 것 같다.
멀리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의 것과는 다르다. 비정상적으로 악을 쓰는 소리가 여럿 합쳐 있었다.
동시에 먼 하늘에서 불길이 솟은 것이 보였다.
시커먼 연기가 불과 함께 올라가 어둠 속에 삼켜졌다.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미 불을 낸 자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것은 신전이 아닌 다른 장소다.
"신전까지 태우다니, 예상과는 다르군요. 이번 일에 모든 걸 걸고 결사적이 된 모양입니다."
보리스가 중얼거렸다.
현대적인 소방시설이 없는 시대에서 불이 나면 상황은 절망적이 된다.
게다가 다른 곳과 달리 이 근방은 상업지역이 밀집되어 있었다. 불이 번지면 피해가 너무 커진다. 사람이 수십 죽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루디는 혀를 차고, 보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3황자의 저택은 포위되어 있다고 했지?"
"예, 전하. 그곳은 완전히 봉쇄하고 있습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곳을 먼저 처리하고 가자. 잘못하면 도시 경제가 몇 년 전으로 후퇴하고 말 거야."
보리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디는 곧바로 방향을 바꾸어 말을 달렸다.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그의 뒤를 따라왔다.
불새가 루디의 마음을 읽고 그의 바로 앞으로 내려와 날개를 펄럭인다.
루디가 한 손을 뻗자 그 팔을 감싸는 것처럼 날개를 오므렸다.
커다란 연꽃 봉우리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루디의 팔 전체가 빛으로 감싸였다.
강하게 마력을 주입하자, 불새의 몸이 크게 부푸는 것처럼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뻗어갔다.
덩어리인 마석과 달리, 마잉크에 들어가 있는 마석의 양은 적다.
그 때문에 담을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계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 담을 수 있다.
여러 가지 마석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푸른색의 물 마석은 더욱 적을 것이다. 불을 끌 만큼 물을 내려면 최대한 마력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담다 불새에게 부담이 되면 어쩌지. 혹시 지나친 마력이 담겨 마석이 부서지면? 약간 망설여졌다.
루디는 손을 펼쳐 손바닥을 보였다. 힘차게 뻗어나가던 마력을 약간 줄이고 힘을 조절했다. 그래도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몰라 약간 불안해졌다.
불새가 어리광을 피우듯 날개 속에서 머리를 손바닥에 부벼댔다. 그 접촉면에서 불새의 소리 없는 말이 전해져왔다.
[괜찮아요, 마음껏 내보내도 망가지지 않아. 시간이 되면 스스로 몸을 뗄 테니 겁내지 않아도 됩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런 뜻이다.
루디는 조금 마음을 놓고 다시 마력을 손으로 내보냈다. 넘실넘실 마력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달리는 말위에서 잠시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목적지 근방에 도착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도, 불새가 보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새가 몸을 파르르 떨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불새의 동그란 눈이 더 둥글게 되더니 두어 배로 커졌다.
평소와는 다르다.
루디는 당황해서 마력을 거두며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루디가 미처 행동하기 전에, 불새의 빛나는 몸 전체가 가늘게 진동하더니 크게 흔들렸다.
"맙소사!"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과 루디의 마음은 아마 같았을 것이다.
루디는 멍하니 눈앞에서 떠오르는 불새의 몸을 쳐다보았다.
하나였던 불새의 몸이 서서히 분리되면서 두 개가 되고 있었다. 모습도 본래는 공작과 거의 흡사했는데,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없던 꼬리가 굼실굼실 생겨나 허공으로 뻗어갔다.
불새의 겹쳐 있던 몸이 거울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조금씩 분리되더니 마침내 완전히 두 개가 되었다.
둘 중 하나는 몸이 크고 꼬리가 화려하다. 얼핏 보면 공작새와 비슷하지만 형태가 조금 달랐다. 공작보다 몸이 훨씬 큰 데다, 깃털의 모양이 날카롭고 풍성하다.
보통 공작새가 꼬리를 펼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꼬리가 아니다. 허리 뒤쪽에 붙어 있는 날개였다. 그 날개에 화려한 눈동자 모양의 장식이 수도 없이 달려 있는 것이다.
공작새는 단지 그뿐이지만, 봉황인 불새에게는 그 외에 진짜 꼬리가 새로 생겨나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구미호의 꼬리처럼 여러 가닥으로 된 꼬리는 가시로 만든 굵은 채찍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가시 같은 것 하나하나는 모두 기묘하게 생긴 빛의 깃털이다.
머리에는 아름다운 수술이 왕관처럼 수북이 돋아 있었다. 옛 여인네가 머리에 꽂는 장식처럼, 아름다운 구슬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파르르 흔들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러 가지의 색으로 빛나고 있다.
이전에는 그저 밝은 빛으로만 되어 있었을 뿐, 색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불새는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다.
조금 전까지의 아름답던 모습이 초라해질 정도로 화려해 보였다. 푸르고 붉고, 하늘의 오로라처럼 영롱하다.
다른 하나의 새는 크기가 조금 작았다.
구미호의 꼬리 같은 구불구불 채찍 모양의 긴 깃털은 길게 나 있지만, 수컷 공작처럼 화려한 눈 모양의 장식은 없었다.
머리의 수술도 약간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것은 색깔이었다.
먼저의 불새가 화려한 여러 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쪽은 단색이다. 머리도, 깃털도, 장식과 눈동자도 모두 눈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두 불새는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봉황...봉과 황이라 봉황이다. 과연, 그런 거구나.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황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하나의 몸에 암컷과 수컷이 모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마력을 한계까지 불어넣으면 비로소 암수가 분리되는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전하는 알고 계셨습니까?"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보리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아니, 나도 몰랐어. 지금 처음 보았다."
문득, 사방을 돌아보자 불 때문에 당황해 울부짖고 떠들던 사람 대부분이 놀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개중에는 부들부들 떠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성전의 폭도들은 이곳까지 닿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향한 건지, 아니면 바람 때문에 불이 먼저 번진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멀리에서 폭도들의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불이 먼저 번졌던 것 같다.
엎드린 채 불새를 보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신이, 신이 내려오셨다."
"신의 새가."
"성전 때문에 신이 분노하셨다."
"신이 분노를...."
군중 속에서 몇 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성전 놈들을 죽여버려야 해!"
"잘못하면 신의 분노가 우리 몸에 내려온다."
"죽여버려!"
군중 심리라는 것은 무섭다. 한 사람이 뭔가 주장하고 그 옆 사람이 동조하면 그 의견은 순식간에 퍼져 버린다. 특히 공포가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심하다.
불새를 보고 놀라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멀리에서 폭도의 모습이 보였다.
불새 때문에 고무된 평민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어디에선가 몽둥이를 찾아와 들었다. 낫을 들거나 도끼를 든 사람도 있었다.
루디는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성전의 반란자들을 제압하라. 하지만 평민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우리가 지키는 것이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옛! 전하!"
병사들이 우렁찬 소리로 대답하고 달려갔다.
건물은 그냥 태운 것이 아니라 먼저 기름을 뿌렸던 것 같다. 동물 기름을 썼는지, 공기 중에는 역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뜨거운 불길과 물건이 타는 냄새로 가득하던 거리는 이내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비명과 악을 쓰는 고함 소리로 뒤덮였다.
루디는 그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두 마리의 불새를 올려다보았다.
불새가 막 태어난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있었다.
"둘 다 괜찮니?"
루디의 물음에 불새들이 포로롱 포로롱 빛의 방울을 터트리며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루디는 안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저 불을 꺼줄래?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물을 내 비를 내려줘. 하지만 마력이 모자라게 되면 무리하지 말고 이리로 와."
루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마리의 불새가 긴 목을 우아하게 움직여 몸을 쭉 폈다. 동그란 눈으로 루디를 보고 머리를 약간 숙여 절을 한다.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 기이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혼란스러운 소리들이 사람들 틈에서 새어 나왔다.
신의 새라고 생각했던 생물이 사람의 명령을 듣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 대개는 그런 반응이었다.
불새는 곧바로 날개를 퍼덕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오!"
사람들의 탄성이 울렸다. 그들 중에는 타오른 집의 주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처지의 사람들조차 현재의 불행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무지갯빛의 불새와 하얀 눈의 빛을 뒤집어쓴 불새가 동시에 허공을 날아 긴 빛을 뿌리며 날아갔다.
불새들은 곧바로 불이 타오르는 건물 위로 향했다.
불새가 지나간 길에 후둑후둑 비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봄비처럼 부슬부슬 내리던 물방울은 이내 거세져, 잠시 뒤에는 소나기처럼 강한 물줄기가 되어 불타는 건물을 뒤덮어 갔다.
마잉크에 섞여 있던 푸른색의 마석이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다행이다.
솔직히 마잉크에 섞여 있는 물 마석이 너무 적어서 제대로 될지 약간은 의문이었다.
아마 다른 마생물이었다면 이 정도의 힘은 내지 못했을 것이다.
태생도 신령스러운 생물인데다 오랜 시간을 루디와 함께 보낸 만큼, 불새의 위력은 다른 마생물보다 확실히 뛰어났다.
하지만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새는 불타는 건물들 위를 천천히 날아 비를 내리고, 다시 물을 뿌리며 되돌아갔다.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한 뒤에야, 무서울 정도로 물건을 태우며 옆 건물로 번져가던 불길이 멈출 기미를 보였다.
이미 타버린 건물과 물건은 안타깝지만 몇 개의 건물로 피해를 막은 건 다행이다.
루디는 안도의 숨을 쉬며 사방으로 시선을 보냈다.
병사들이 가차 없이 성전의 신도들을 베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주춤할 만도 한데, 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신도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병사들의 창칼에 몸을 던졌다.
몇 명의 신도가 가슴과 등에 창을 맞고 쓰러진다.
그 틈으로 작은 몸집의 아이가 쏙 빠지며 튀어나왔다. 아이는 곧바로 루디를 향해 달려왔다.
'맙소사!'
루디의 심장이 서늘해졌다.
< 봉과 황이라 봉황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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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2/4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