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9화 (89/201)

< 짧고 굵게 치욕스러움 >

#089

"잘 어울리십니다. 천상에서 내려온 전쟁의 신 같군요."

눈이 부신 듯, 시종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루디를 보았다.

지금까지 시종장이 이런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즉위식이 가까워지면서 진짜로 이 아이가 황제가 되는구나, 실감이 온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루디가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에는 이미 시종장의 얼굴에서 그 표정은 사라져 있었다.

시종들이 벗은 옷을 모두 가져가고, 한 명이 루디의 어깨에 붉은 망토를 걸쳤다. 시종 두 명이 양옆 뒤쪽에 서서 버클과 장식으로 단단하게 고정한다.

그 사이, 시종장은 평상시와 같은 표정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상황은 명확해 보였다. 이야기만 들으면 완벽하게 반란이다.

3황자와 성전은 몇 년 전부터 연락을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반 년쯤 전이었다.

3황자는 몇 년 전 황도의 외곽 지역에 저택을 마련했는데, 반란의 아지트로 삼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3황자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보낸 정황도 발견했다.

성전 쪽에서도 그 무렵 신도를 조금씩 늘리기 시작해, 반 년 전부터는 적극적으로 돈을 풀어 신도들을 모으고 무기를 사들였다. 3황자가 보낸 돈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그들이 성전기사라 부르고 있는 거친 남자들이 제국으로 상당수 들어왔다.

그들은 평민 신도를 훈련하기 위해 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성전 내부는 물론이요, 가끔은 외곽 지역에서 훈련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성전기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오합지졸입니다. 용병 출신을 성전에서 고용한 형태로 시작되어서 나중에는 약간의 돈과 여자 때문에 정착하게 된 자가 많지요. 성전에서 여자 신도는 대부분 그 종교를 위한 몸의 제물입니다."

"그건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잖아."

루디의 말에 시종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런 종교가 어떻게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거지?"

"그들이 치유의 여신이 사용했다는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모든 걸 치료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일컬어지지요. 그들은 여신의 보물이 신의 나라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신의 나라에서 온 물건.

어쩌면 지구의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시종장의 얼굴을 보았다.

성전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시종장은 분명 황제의 병을 위해 그것을 가지려고 했을 것이다. 한데 어째서 성전을 적대시 하는 거지?

루디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았을 텐데, 시종장은 모른 척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합지졸이긴 하지만 그들은 죽는 걸 개의치 않고 덤빕니다. 그들에게 위협은 통하지 않아요. 죽여야만 끝이 납니다. 성전에서는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약을 사용합니다. 이번 반란군에도 그 약이 사용되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겁니다."

시종들이 망토 위에 루디의 긴 머리를 내리고 치장을 마쳤다.

"지금부터 만나는 반란군을 평범한 평민이나 종교인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 혹은 무해해 보이는 아이라 해도 성전의 광신도는 위험하니, 부디 곁에 두지 마소서."

3황자는 현재 도시 외곽에 있는 저택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약간의 사병과 노예가 저택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지만 평소와 다른 기미가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나게 왕래하지 않았던 성전에서 전투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그 저택으로 향했다.

3황자와 성전을 감시하던 파수꾼이 곧바로 그 사실을 황궁에 알려온 것이라고 했다.

"3황자는 군부와 연계가 있나?"

"없습니다. 하지만 3황자는 황도에 상주하는 귀족 젊은이들과 연계가 있습니다. 각 가문에서 외면당해 불만이 많은 자들을 규합해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지요"

시종장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황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에 없는 자들 중 일부는 체포하기 위해 이미 병사가 출발한 상태입니다. 영지로 돌아간 자들이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 중 일부는 해당 가문에서 체포해 스스로 내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보리스가 문 근처에 서 있다. 루디가 시선을 주자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보리스는 황도로 돌아온 뒤부터 루디에게 깍듯하다. 이전의 불량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으면서 루디는 무기고를 나섰다.

이야기에 허점은 없다.

반란을 꾀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3황자로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생면부지의 노예한테 황제 자리가 넘어가는 걸 보고 있는 건 분통 터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군부의 동조가 전혀 없었던 건 의외지만, 제국 전체에 흩어져 있는 귀족 자제와 폭넓게 연계하고 있다면 훗날을 도모하기에는 적당하다.

처음부터 지금 일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죽은 뒤에 일을 벌이는 것이 쉽다.

하지만 성전이라는 종교가 규모보다 엉성한 조직과 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자의 계획이 틀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인생사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항상 예외가 있고 상상도 못했던 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황제와 시종장이 나를 함정에 빠뜨릴 리는 없으니 믿고는 있지만....'

뭔가 위화감이 남는다. 아주 작은 조각, 뭔가가 하나 빠져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수가 많다. 얼핏 보아도 2천 명 정도는 충분히 되어 보였다. 그 옆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횃불을 든 병사가 천 명 정도 더 있었다.

"반란 규모가 이렇게 크지는 않을 텐데? 병사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

루디가 묻자, 보리스가 대답했다.

"차기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즉위식은 가두행진없이 식만을 간단히 치룹니다. 차후 국민에게 새 황제를 선보이는 행사를 하겠지만, 한동안 국민이 전하를 볼 기회는 없을 겁니다. 모처럼 황도 전체의 국민에게 얼굴을 알릴 기회를 날릴 필요가 없겠지요."

위화감이 커진다. 시기가 너무 딱 맞는다. 반란과 전혀 상관없는 즉위 전의 선뵈기가 마치 미리 만들어진 세트처럼 아물려 있었다.

반란을 행하는 것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인데, 마치 이 모든 일이 루디를 위해 만들어진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 같다. 거대한 황도는 그걸 공연하는 무대.

'지나친 생각일까.'

문득 루디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어느새 황혼이 짙어져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빛은 붉은색을 띄고 있는데, 피부와 옷에 닿는 색은 어느새 검어졌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대에 불이 붙여졌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빛이 천여 개가 되자 그것 또한 장관이었다.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폐하의 전언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면 마의 새를 내놓아 위엄을 보이기에 가장 좋은 날이 아닐까 하셨습니다."

밝은 날, 불새가 화려하게 빛을 내본들 그다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어두운 밤에는 누구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인다.

루디가 허공에 시선을 보내자, 허공을 빙빙 나는 불새의 모습이 조금씩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앞만 쳐다보던 병사들 중 누군가가 하늘을 본 모양이다. 엇,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랄 것 없이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저기!"

"하늘에 빛의 새가."

"저, 저것은 뭐지?"

경악에 가득 찬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전체로 퍼져갔다.

보리스조차도 눈을 부릅뜨고 불새를 쳐다본다.

"맙소사! 저건 전설 속에만 있는 생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리스가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병사가 그 말을 들었다. 순식간에 전설의 생물이라는 말이 병사들 속에 퍼졌다.

불새는 인간의 놀라는 모습 따위는 관심없는 듯, 허공을 몇 번 크게 회전한 뒤 루디를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커다란 빛의 날개가 우아하게 펄럭거리다 루디의 어깨에 내리며 접혔다.

"우와아아아아아!"

갑자기 병사들의 함성이 황궁 안으로 울려퍼졌다.

병사들이 창을 거꾸로 든 채 바닥을 쿵쿵 내리찍었다. 어떤 병사는 방패를 흔든다. 쿵, 쿵, 쿵, 쿵, 소리가 점점 커진다.

"루디 전하! 루디 전하!"

병사들의 외침 소리에, 보리스가 히죽 웃는다. 어느새 그의 낯짝은 경악에서 평소처럼 바뀌어 있었다.

보리스가 루디의 흑마를 끌고 앞으로 다가왔다.

말의 옆에 몸을 굽히고 두 손을 모은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은 뒤, 그의 손바닥에 발을 올렸다. 손을 밟으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말 위에 올라앉자, 부라도프가 엑스칼리버를 공손히 내밀었다.

아, 드디어 이 부끄러운 짓을 해야 하는구나.

루디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부끄러운 거야, 망할 놈의 중2병 코레아 시조 놈아.

한글로 된 명령어 옆에 있는 제국어를 말할까 생각도 했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인지, 명령어는 한글 외에 제국어로도 적혀 있었다.

[불타는 하늘의 번개와 태양의 빛이 검신에 머무니, 오라, 저 하늘 너머의 거대한 세계, 그 너머에 있는 신비여, 내려라 신의 나라에서 온 빛의 검아. 엑스칼리버의 정령이여 검신에 머물라!]

아니, 저건 못하겠다. 가늘고 길게 치욕스러운 것보다는 짧고 굵게 치욕스러운 게 나을 것 같다.

루디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 쑥 잡아뺐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제국어를 포기하고, 억지로 입을 벌려 외친다.

"스타워즈의 광선검!"

순간, 검신에서 웅웅, 소리가 나며 은은한 빛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혹시 검신도 사라지나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검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다만 검 전체에서 광선검처럼 강한 빛이 뿜어졌다.

검이 빛을 뿜자, 병사들은 물론 멀리에서 지켜보던 황궁 안 사람들까지 함성을 질렀다.

부라도프가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저 검이 저토록 밝은 빛을 뿜는 거였군요. 게다가 저런 소리를.... 저런 게 가능하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검은 그저 빛나는 검이라고만 알았는데."

한국어 명령과 제국어 명령은 위력이 다르다. 부라도프는 물론 역대 황제 누구도 이 검이 이런 식으로 발동하는 걸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시종장과 보리스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문득 황궁의 건물로 시선을 올리자, 창에서 황제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종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다. 저녁의 찬 공기는 몸에 괴로울 텐데, 일부러인지 커튼을 모두 열어젖히고 있었다.

루디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병사들의 창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루디는 고삐를 살짝 흔들어 흑마를 앞으로 몰았다. 흑마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루디의 작은 몸이 거대한 흑마 위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며 병사들 사이를 걸어간다.

루디가 자신들 가운데로 들어오자,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귀가 먹먹하다.

루디는 병사들의 중앙에 멈춰선 채, 검을 높이 쳐들었다.

"이 나라, 이 도시를 위협하는 놈들이 저 밖에 있다. 성전의 탐욕스러운 놈들이 황제폐하를 욕보이려 무기를 들었다. 평화로운 우리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조각 내려 하고 있느니, 어찌 용서할 수 있을까. 제국의 병사들아! 나를 따르라. 반역자들을 남김없이 모두 처단하라."

아, 조금 과장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디론가 전쟁을 하러 가는 줄 알겠다.

루디가 말을 움직여 밖을 향해 움직이자, 불새가 쑥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를 탔는지, 아니면 그새 사람의 마음속을 읽는 신기라도 익힌 건지 모르겠다.

마치 루디와 병사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불새가 루디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날개를 부드럽게 펼치며 허공을 날았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른다.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빛의 날개가 펄럭펄럭 허공에서 춤추자, 불씨가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근데, 불새야, 너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는 거 아니냐.

< 짧고 굵게 치욕스러움 > 끝

(8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