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8화 (88/201)

< 치유의 여신을 믿는 사람들 >

#088

제국은 다른 나라보다 황제의 권력이 강하다.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이전에 다른 나라였던 곳까지 지배하기 때문에 뚝 떨어진 지역조차 있다.

그런데도 황제의 눈과 힘은 어디에나 미처 있어서, 지오그 교가 세력을 넓히려고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막혀버렸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한다. 먹기는커녕 손만 뻗으면 손가락이며 손모가지를 몽땅 접힌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매번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지오그에서는 계속 신관을 제국에 파견해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창고를 그냥 포기한다는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푸테그린 제국은 성전에 있어 고난의 장소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제국에 파견되는 신관은 다른 곳에서 말썽이 있었던 사람이나 이제 막 신관이 된 신참뿐이었다.

베일이 제국에 파견된 것은 자신 때문에 왕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지오그에서는 신도들을 조금 더 심도 있는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 종종 최음과 환각 효과가 있는 약초를 사용하는데, 그 나라 왕녀가 약초에 과잉반응하면서 그냥 콱 죽어버린 거다.

아니, 왕녀면 왕녀답게 궁 안에 처박혀 있던가. 왜 민간에 있는 신전까지 나와서 일반 귀족인 척 하고 버적버적 기어들어와.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손대고 싶어지는 게 남자 아닌가. 자기 신분을 속인 계집이 잘못한 거지, 자기 신전에서 평소대로 가르침을 베풀려고 했던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베일로서는 할 말이 많다. 억울하다.

그 왕녀가 다른 나라로 시집갈 예정이었다는 것도 불리한 정황이었다.

하지만 그 나라 고위층에 성전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과 왕녀의 일이 밝혀지면 추문이 된다는 사실도 있어서, 사건은 무난하게 덮어졌다.

베일과 몇 명의 신관이 그 나라를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으로 조용히 덮인 것이다.

하지만 고난 끝에 행복이 온다고, 제국에는 보이지 않는 성전 지지자가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신분의 사람이.

제국의 신관에게 물어봤지만,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저 가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서신이 도착한다.

그 서신의 지시대로만 하면 제국의 급작스러운 검열을 피하거나 상당한 신분의 신도를 포섭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제국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던 성전 관계자들도 일 년, 이 년 서신이 이어지면서 그 사람이 확실하게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국은 제아무리 평민 신도라 해도 성전에서 사람이 죽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일반 귀족이 했으면 웃으며 넘어갈 일도, 성전이 했다고 알면 눈초리가 달라졌다. 왜 그렇게 성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모른다.

그런 고난의 땅에서 서신을 보내주는 지지자는 그야말로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요,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한 잔의 물이었다.

베일은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치유의 여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치유의 여신이여.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지지자를 보내주시어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고...블라블라...블라블라.... 아, 헛소리.

베일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도록 기도문을 중얼거리면서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단 말인가. 이 헛소리를 정말 믿는 놈들이 대단하다. 아무리 들어도 헛소리 같은 신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치유의 여신이 언젠가 되살아나 기적을 보여줄 거라고 믿는 신도들은 머리가 장식인가.

치유의 여신은 다른 신들과 달리 본래 인간이다.

하지만 강하게 원하면 방금 죽은 사람조차 살려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오묘한 빛을 내는, 투명한 구슬을 사용해서 힘을 쓸 수 있다.

그 구슬은 성전의 중앙 본부 깊숙한 곳에 모셔져 있었다. 경력이 오래된 고위 신관들조차 평생에 몇 번 볼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베일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듣기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다르다고 한다.

코레아 왕조의 마도구와 비슷한 용도인 것은 틀림없지만 마석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들었다.

검은 머리에 낮은 신장, 치유의 여신은 분명 코레아 왕조와 관련이 있다.

다만 그녀는 마법문을 쓸 수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성전에서는 여신이 신의 나라에서 왔다고 가르치지만, 글쎄, 정말로 그런 게 존재하는 걸까. 의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치유의 여신이 가진 힘과 구슬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래서 각 나라에서는 성전을 우대해 준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죽은 자까지 살려내는 건 코레아 왕조도 불가능했다. 오직 치유의 여신이 가진 구슬만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코레아 왕조의 핏줄은 그걸 실현시킬 수 있다고 고위 신관들은 믿고 있다.

그러한 사정이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도 지오그교와 완전히 연을 끊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정말이라면,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베일은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서신의 지지자는 그 전설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어지는 정보를 보고 높은 신분의 사람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상상도 못한 신분의 사람이었다.

3황자였던 것이다.

베일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제국에 오게 된 건 좌천이요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위로 올라갈 수 있는 천국의 계단이었다.

반 년쯤 전에 평상시와 달리 서신과 함께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3황자의 측근이라고 밝혔다.

서신은 평소와 똑같은 봉투, 똑같은 필체로 적혀 있었다.

다만 내용만이 조금 달랐다. 매우 엄청난 쪽으로 달라졌다. 누군가한테 서신을 빼앗기면 큰일이니 보안을 위해서 자신이 보내는 말에 대한 답변은 글자로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서신을 가진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듣고 구두로 답하라 했다.

그리고 귀에 들려온 내용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3황자 수행원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대단했다.

아,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운이 좋았다. 정말 좋았어.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일은 입으로 경건하게 기도문을 읊었다. 머리와 입이 능숙하게 다른 말을 뱉는다. 얼추 헛소리로 점철된 기도문이 끝나갔다.

베일은 경건하게 여신상을 향해 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신전 앞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는 신도들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외친다.

"성전 기사들이여! 칼을 높이 쳐들어라! 창을 들어라! 우리의 여신께서 이 나라에 자비를 내리고자 계시를 내렸다. 우리가 지금 떨쳐 일어나면 반드시 성공하리니, 신도들아, 우리를 핍박하고 여신을 반대하는 황제를 끌어내리자. 여신께서 선정하신 우리의 새로운 황제를 영접하러 가자!"

"와아!"

"여신을 위하여!"

"여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환각을 보는 약초에 약하게 중독된 신도들이 벌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칼을 든 여신의 모습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도 여신이 되살려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멍청한 중독자 놈들.

성전의 본부에서는 이미 이곳의 움직임을 허락하는 취지의 서신이 도착했다.

3황자가 가담하고 있다는 말은 숨겼다. 보안 문제도 있지만 잘못해서 다른 놈이 이곳에 와 공을 가로채면 곤란하지 않은가.

베일은 자신이 대단한 신분의 신도를 포섭했다고 말을 조금 바꿨다.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포섭했다고 하는 게 훨씬 낫다. 이 일이 성공하면 대신관이 될 지도 몰라.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계획도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대단한 권력을 쥔 사람의 끈을 붙잡았는데 그를 이용하면 제국 전체에 신도가 퍼질 가능성이 있다고만 전했다.

날짜? 당연히 말해주지 않았다. 공을 가로채면 곤란하잖아, 공을 가로채이면. 신관이라는 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탐욕이니까.

베일이 본부에 요구한 것은 상당수의 성전기사와 환각을 보여주는 약초였다.

돈을 내놓으라고 했으면 고위신관들도 꺼려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돈은 3황자가 대주었다. 포교활동을 하고 신도를 신전에 모아 먹이거나 무기를 구입하는데 충분한 돈을 받았다.

본부에서는 자신들의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지원할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별다른 제한 없이 그가 원하는대로 성전기사와 상당한 양의 약초를 보냈다.

몇 달 사이 경험 있는 성전 기사가 여럿 도착해 신도들을 훈련시켰다.

뭐, 훈련시킨다고 돼지가 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의 신도들은 양면 작전을 위한 희생양일 뿐, 진짜는 황궁 안에 있으니까.

우리가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3황자가 황궁을 장악하고 와토린구의 후계자를 붙잡는다.

일이 성공하면 3황자는 황제의 자리를 얻고, 성전은 와토린구 후계자를 얻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신도들의 생명을 모두 없애게 된다 해도 남는 장사다.

베일은 여러 곳에 서 있는 진짜 성전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뭐, 이 사람들도 진짜 기사인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온 성전 기사는 대부분 용병 출신이거나 기사가 되려다 만 작자들이다. 그래도 나름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평상시의 행동은 기사보다는 도적에 가까운 게 옥의 티려나.

성전 기사들의 임무는 반란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신관을 보호하는 것이다.

제국의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할 무렵, 신관들은 성전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를 피할 예정이었다.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를 사람은 미리 자신이 맡은 장소에 가 있다.

반란 준비가 다 되었다는 기별도 이미 3황자에게 보내두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댕, 댕, 댕, 댕.

황도에 있는 커다란 종탑에서 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 정말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없던 일로는 할 수 없어. 아, 여신이시여, 치유의 여신이시여. 부디 굽어 살피소서.

아주 조금 심장이 떨려왔다. 이렇게 큰일은 처음이다.

베일은 크게 숨을 마시고 스스로를 격려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3황자에게는 황궁 경비를 맡고 있는 병사들은 물론이요, 상당한 병사들이 따르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노예를 황제로 받드는 것보다는 정통한 황자를 황제로 삼는 게 제국 귀족들에게도 바람직하게 보일 것이다.

분명히 성공한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베일은 자신도 검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반드시 그 나라로 돌아가고 만다. 내 저택, 내 노예, 내 여자들, 내 돈....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이곳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어.'

그 나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되찾고 만다. 쓰레기 치우듯 그를 이쪽으로 보내버리고, 베일 자신이 힘들게 모아 놓은 재산을 가로채 떵떵거리고 사는 놈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엉덩이부터 입까지 긴 꼬챙이를 꿰어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여주마. 기다려라, 네 놈들.

"가자, 성전의 기사들이여!"

베일의 굵은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

루디는 황제의 방을 나온 뒤, 시종장을 따라 다른 장소로 향했다.

검은 상자에서 빼낸 상태로 부라도프가 들었다. 여러 명의 시종과 병사가 조용히 루디의 뒤를 따라왔다.

시종장이 안내한 곳은 황제의 침실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간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몇 군데에 빛나는 갑옷이 서있고, 벽에는 손질이 잘 된 무기들이 여러 개 걸려 있다.

창이 거의 없다 싶을 만큼 적다. 그나마 있는 창문도 빛이 직접 무기에 닿지 않도록 여러 겹의 커튼이 늘어져 있었다.

방 곳곳에는 은은하게 빛 마도구가 켜져 있다. 무기 때문인지, 방 안은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황제의 개인 무기고입니다. 안쪽에는 따로 작은 창고가 있어서, 관리가 까다롭거나 정말 귀중한 물건은 그곳에 놓고 있습니다."

시종장이 설명하면서 루디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원형의 나무 고리가 천정에 매달려, 그 아래로 둥근 공간을 만들며 천이 늘어져 있다.

시종장이 천의 틈새를 벌려 열자, 어른 것과 확연히 다른 작은 갑옷과 투구가 보였다.

상체만 가릴 수 있는 갑옷인데, 어깨와 가슴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은은한 마도구의 빛이 닿자, 가슴의 가장자리와 등 부분이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면 얇은 사슬처럼 짜여진 부분이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다.

투구는 더욱 요란하다. 얼굴은 모두 드러나게 만들어져 있는데, 햇빛에 반짝이면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금과 보석이 붙어 있었다.

투구 중앙에는 뒤쪽으로 늘어지는 깃털까지 꽂혀 있다.

갑옷도, 투구도, 보호구라기보다는 화려한 장식품으로 보였다. 몸을 보호하기는커녕, 표적이 되라고 말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띈다.

시종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진짜 전쟁이라면 조금 생각해봐야 할 물건이겠지만, 이번 일에 위험은 없습니다. 전하의 주변은 보리스와 호위병으로 굳힐 테니까요. 오늘은 국민에게 루디 전하의 모습을 처음 보인다는 의미가 큽니다. 처음의 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끝까지 가니,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부디...."

이런 갑옷에 엑스칼리버까지 들고 가는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거야 원, 모습 자체가 중2병 걸린 꼴이 아닐까.

하지만 시종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물건은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루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들이 다가와 주변에 아름다운 비단으로 만든 병풍을 둘렀다.

시종들이 재빠른 솜씨로 옷을 벗겼다. 속옷까지 모두 벗은 뒤에는 차곡차곡 새로운 옷을 입혀갔다.

갑옷과 투구를 모두 착용했을 때, 황궁 안에 있는 종탑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댕.

붉은 황혼의 빛이 겹겹이 드리워진 커튼을 물들였다.

< 치유의 여신을 믿는 사람들 > 끝

(88)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연재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가급적 12시 전후로 올리고 있는데, 가끔 늦어져요. 12월 중반쯤부터는 고정할 예정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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