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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6화 (86/201)

< 엑스칼리버가 튀어나왔다 >

#086

하루 무리를 하면 이틀을 쉬어야 한다.

젊을 때는 며칠을 밤새우고 온몸을 다해 싸워도 다시 밤새워 술을 마시던 사람이지만, 지금의 폐하는 단지 여자와 하루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열을 내고 드러눕는다.

레이놀드는 땀에 젖은 황제의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상체를 닦았다.

몸에 열이 나면 춥다. 보통은 이불을 꼭꼭 덮어 추위를 피하지만, 의국의 파블로가 안 된다, 그러면 더 열이 난다고 말렸다.

지난날, 딱 한 번 그의 말을 어기고 황제가 원하는 대로 이불을 덮은 적이 있었는데 하루 내내 열이 펄펄 끓었다.

그 이후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파블로가 말하는 대로, 열이 나면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늙고 병들은 몸은 형편없이 야위어있었다. 바삭바삭 습기 없는 피부는 뱀이 벗어놓은지 한참 된 허물 같다.

단순히 몸을 움직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거듭되는 마음의 침체가 몸에 영향을 미치는 거겠지.

조심조심 피부를 닦아 열을 떨구면서, 레이놀드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식히기 위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레이, 사내놈이 질질 짜지 마라."

"안 짭니다."

"쯧쯧, 허약한 놈. 어릴 때부터 질질 울면서 쫓아다니더니 나이 들어도 똑같구나."

"...."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자 황제가 힘없이 웃었다.

황후와 펜던트로 실랑이한 뒤, 황제는 가급적 움직이지 않고 방에서만 지냈다.

그동안 황제를 대신해 정무를 본 것은 루디였다.

11살 어린 소년이건만, 루디는 생각 이상으로 잘 해냈다.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에 톡 앉아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고 분류한 뒤 판단을 내리는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그런 작업을 해온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 자체도 아이 같지 않게 능숙했다. 단순히 똑똑하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다. 아이의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이런 업무에 익숙한 어른 같았다.

'비록 엉덩이 밑에 두툼한 방석을 깔아 앉은키를 높여야 했지만 말이야.'

루디의 모습을 전해 들은 황제는 만족해했다.

저녁이 되면 루디는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러 찾아온다. 그 아이와 대화하며, 황제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그냥 이렇게 지내면 좋을 텐데. 황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멈추지 않는다.

살짝 한숨을 쉬는데, 황제가 물었다.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가느냐."

"정말 진행하시렵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황제가 희미하게 웃더니 눈꺼풀을 덮었다.

잠시 뒤 눈을 뜬 황제가 히죽 웃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그놈을 구석으로 몰아야지. 잘못하면 사자가 쥐새끼한테 물려서 죽는 꼴을 보게 될 거다."

황제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담담히 레이놀드를 보았다.

"루디는 자질이 좋은 아이지만 어딘가 허술한 면이 있어. 보리스의 눈이 정확했다. 그 아이는 악독하지를 못해. 황후를 나에게 맡기고 놓아둔 것만 봐도 그렇지. 내가 루디 입장이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황후를 죽여버렸을 거다."

열 때문에 황제의 눈동자에는 습기가 약간 어려있다. 꿈을 꾸는 것처럼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아이는 상대가 죄를 지은 만큼만 벌을 부과하겠다는 생각이 강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한, 공명정대한 황제가 될 거다. 한 가지만 보완하면 제국을 잘 이끌어갈 거야. 그 아이 뒤에서 더러운 일을 맡을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레이, 네가 그 아이를 뒷받침해 줘."

황제가 앙상한 손으로 레이의 팔뚝을 잡았다.

"나한테 네가 있었던 것처럼, 그 아이의 뒷면에 서 있을 사람이 필요해. 레빈의 교육에 더 공을 들여라. 빛나는 태양 뒤에는 그림자가 있어야 균형이 맞게 되지. 네가 레빈에게서 보았던 어둠의 일면을 잘 조각해서, 루디에 맞도록...."

너무 흥분한 모양이다. 황제가 약간 숨을 헐떡거렸다.

레이놀드는 황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레빈은 잘하고 있어요. 뒷면의 조직에서도 다음 우두머리로 잘 받아지고 있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레빈을 발탁한 것은 레이놀드다.

어느 날 뒷면 조직에서 괜찮은 아이를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외모만 예쁘장한 약한 아이로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남자에게 구석까지 몰리자 본성이 드러났다.

연약해 보이는 면 뒤에는 무자비할 정도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숨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가족과 친구에게는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리지만 괴로움을 한계까지 견뎌내는 인내심도 있다.

잘 가꾸면 양면성을 지닌, 좋은 시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 레빈은 시종장 후보였다.

황제가 숨을 고른 뒤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레이. 그 두 아이를 부탁한다."

"예."

"즉위식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일을 계속 진행해라."

"...."

레이놀드가 가만있자,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황제가 말을 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괜찮아. 그 아이들은 그저 줄에 묶여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와 같다. 하지만 3 황자는 나를 닮았어. 그 녀석은 발톱을 숨기고 조용히 다가오는 교활한 육식동물이지."

황제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3 황자는 단지 즐거움만을 위해서 상대를 찢어발긴다. 지금 누르지 않으면 분명 루디가 모르는 사이에 이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황제의 표정이 조금 전과 달리, 완전한 황제의 것으로 돌아갔다.

"레이놀드, 덫을 놓았으면 그리로 몰아넣어라. 기회가 있을 때 숨통을 끊어야 해. 절대로 동정하지 마라."

레이놀드의 마음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렸다. 마지막 말, 동정하지 말라는 건 3황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황제에 관한 말이었다.

레이놀드! 절대로 나를 동정해서 그 아이를 놓아주지 마라, 그런 뜻이다.

황제의 소리 없는 말이 레이놀드의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알겠습니다. 사람을 한 시간 정도 물릴 테니 잠시 쉬십시오."

레이놀드는 사방에 신호를 보내 벽 안에 숨은 자들조차 모두 물렸다. 방안에 있는 시종들과 함께 자신도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목 놓아 울지 못할 황제를 위하여....

문을 닫기 직전, 이불에 눌려 희미해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얼마나 불행한 황제일까.

자식을 죽여라 제 입으로 말하고 숨죽여 우는 불쌍한 아버지여.

한 시간 뒤 다시 황제의 방을 찾았을 때, 황제의 얼굴은 눈물 젖은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한 황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레이놀드는 조용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쥐굴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래, 루디를 불러라."

***

황제의 일상은 의외로 회사원과 비슷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한다.

날 밝기 전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하는 건 서류작업이었다.

책상에 앉아 보좌관들이 추스러놓은 서류를 읽고 분류하고 읽고 또 읽는다. 수수하다.

볼 서류가 너무 많고 수수하게 할 일이 첩첩이 쌓여 있어서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껴 써야 했다.

수수함을 넘어서 괴롭다. 분명히 황제는 과로사가 주된 사망 원인일 거다.

단 며칠 황제 대행으로 일했을 뿐인데, 벌써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서 복작복작 일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루디한테 한 장 서류를 디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다.

자신이 잠시라도 일을 멈추면 그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루디는 묵묵히 시종이 내미는 비스킷을 한 조각 씹으며 펜을 움직였다.

그가 확인한 서류는 책상 한쪽에 놓인 예쁜 수레에 차곡차곡 쌓였다.

루디가 작성하고 기입한 서류의 서명란은 아직 비어있다. 루디가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까지는 현재의 황제 사인을 받아야 한다.

수레에는 황제가 누워있는 방까지 운반해서 서명을 받을 서류가 놓여 있었다.

급하지 않은 서류는 따로 분류해서 즉위한 뒤에 서명할 종이 더미 위에 던졌다.

한창 펜을 종이 위로 달리고 있을 때, 황제가 부른다는 소식이 왔다.

마침 서명 받을 서류도 얼추 쌓여 있었다. 아파 드러누워도 일을 쉴 수 없다니, 황제라는 건 정말 극한 직업이다.

루디가 집무실에서 나오자 십여 명의 시종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서류 수레도 돌돌 바퀴를 움직이며 루디 뒤를 따라왔다.

키가 많이 컸다고는 해도 아직 성장 도중이다.

몸집이 작은 루디가 키 큰 성인 무리를 이끌고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눈이 둥그레지고, 그 뒤에는 아 저 소년이 차기 황제로구나 깨닫고 당황해서 몸을 숙였다.

너무 급작스럽게 황제 퇴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국 전체가 혼란 속에 빠졌다.

영지에 머물고 있는 귀족들은 어떻게든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짐을 최소화하고 황도로 몰려들었다.

먼 길 여행에는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런 걸 모두 무시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하고 달려온다.

하지만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귀족들은 결국 어디에선가 물건을 보충하고 먹고 자야 한다.

그런 귀족들 덕분에 여행자들이 많이 들리는 도시에서는 단기간에 상당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들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다음 황제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누구나 알 수 있게 옷차림을 화려하게 하고 시종들을 데리고 다니는 데도, 루디에게 "다음 황제가 누구인지 아는가" 묻는 사람까지 있다.

어중간한 정보를 듣고 달려와서 와토린구의 검은 머리 차기 황제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이전의 황태자가 즉위하는 걸로 아는 사람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역사가 왜 왜곡되어 전해지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한 다리만 건너도 '아'가 '똥'이 되어 전해지니, 몇 백 년, 몇 천 년 전의 일 따위 정확하게 전해질 리가 없다.

하지만 황제의 양위가 알려진 것은 불과 며칠 전이다.

혼란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 정도로 빨리 달려와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능력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황제의 방 앞에 섰을 때, 맞은편 복도에서 수십 명의 시종과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 부라도프가 길쭉한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황제의 침실 문이 열리고 루디가 먼저 들어가자, 상자를 든 부라도프가 뒤따라왔다. 호위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시종과 병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루디를 부른 목적은 저 상자 안에 있는 것일까. 예전에 황제만이 만질 수 있는 마도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황제는 침대 머리에 여러 개의 베개를 두어 등을 받치고 앉아 있었다.

루디를 보고 빙그레 웃더니 손을 까딱해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자, 부라도프를 향해 말한다.

"그것을 펼쳐 보여라."

부라도프가 상자를 열어 루디의 눈에 잘 보이도록 기울였다.

안에 있는 것은 1미터가 넘는 커다란 양날검이었다. 보통 두 손으로 잡고 싸우는 칼이다.

다른 검과 다른 점은 검신 중앙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개의 마석이 깊숙이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마석의 색이 황금에 가까운 진한 노란색이다. 전기의 성질을 띠고 있는 마석이다.

"그 검은 푸테그린 제국의 황제에게 전해지는 보검이다. 이 나라에서는 황제와 그 후계자의 문장을 가진 사람만 쓸 수 있지. 다른 사람이 들면 반역죄로 처형된다. 한 번 들어보아라."

부라도프가 칼을 뽑기 쉽게 상자를 루디 앞으로 낮추었다.

막상 검을 들었을 때, 약간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가볍다. 이런 검이 보기보다 무겁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보통 이렇게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이건 뭘 어떻게 했는지 한손으로 들고 휘둘러도 될 정도로 가벼웠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 말했던 단 한 명의 특별한 코레아 왕조가 주문을 넣은 검이다."

그 말에 검을 뒤집자, 검신 전체에 걸쳐 빼곡히 한글이 적혀 있었다.

하.하. 황제가 말했던 최초의 코레아 왕조는 나이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남겼다는 마법 주문을 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긴 했는데, 이 검의 주문을 보니 확실해졌다.

'중학생이면 이 세계에 와서 그리 잘해갈 수 없었을 테고, 고등학생? 어쩌면 조금 정신연령이 어린 사회 초년생이었으려나.'

검을 정의하는 이름은 [엑스칼리버]였다.

검의 성격을 정의하는 설명 문구에는 스타워즈의 광선검 속성, 경량화, 번개 속성 등 다양한 말을 모두 때려 넣었다.

루디가 흥미롭게 검을 보고 있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 엑스칼리버가 튀어나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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