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디의 첫번째 금색 노예 >
#085
나디아그라는 여전히 루디를 자기 자식으로 알고 있다.
저택에 들어가자 나디아그라는 평범한 어머니처럼 그를 반겼다.
마리를 불러 루디의 음료수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이 자수를 놓은 옷자락을 테이블에 펼쳐 보였다.
루디의 셔츠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은근히 이걸 즉위식에 입어줬으면 하는 것 같다.
차가운 음료수를 한 입 넘기자 속이 시원해졌다. 이 세계에서 봄에 시원한 음료수를 먹기는 쉽지 않다.
'역시 냉장 마도구를 만들어놓기를 잘했어.'
황제에게 능력을 밝힌 뒤, 루디는 저택에 있는 노예 목걸이 하나에 냉장 기능을 부여했다. 저택의 여자들이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모두 깜짝 놀랐지만 굉장히 기뻐했다.
지금은 깊숙한 원형의 나무통에 냉장 기능의 목걸이를 넣은 뒤 냉장고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전에 코레아의 마도구사가 시연할 때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고 기억해놓았다. 지구에서도 현대 문명의 최고는 냉장고와 에어컨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지.
황궁에는 아직 만들어놓지 않았다.
황제는 루디의 능력을 타인에게 알리는 시기를 약간 늦추자고 했다. 그편이 쥐새끼 같은 놈들을 꼬여내는데 좋다고 한다.
즉위식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 황제와 시종장은 누군가 반드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황제는 추측해봐라, 라고 말할 뿐. 두 사람이 누구를 예상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정세에 대해 공부는 했지만 루디는 아직 이 나라의 깊숙한 사정에 충분히 익숙지 않다.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가장 가능성이 많은 건 자신에게 올지 모를 자리를 빼앗긴 황자 중 한 명일까. 그 외에는 성전 정도?'
황제가 해준 이야기 중에 성전이라는 게 있었다.
치유의 여신을 모시는 종교라고 한다.
코레아 왕조의 시조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를 모시는데, 다른 점은 치유의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신비한 색깔의 구슬로 죽어가는 사람조차 순식간에 되살려냈다고 들었다.
그 종교의 정식 명칭은 지오그.
하지만 지오그에서는 칼을 들고 싸우는 신자들을 모두 '성전 기사'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느샌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되었다.
기사라고는 해도 그들이 말하는 '성전 기사'는 진짜 기사가 아니다. 지오그교에서는 단순한 평민도 칼만 들면 모두 성전 기사라고 불렀다. 교도의 대부분이 성전 기사인 셈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리나 행동이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데, 의외로 각국에 정식으로 진출해 신전을 두고 있다고 한다.
제국에서는 지오그 교가 큰 힘이 없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황자들보다 그들의 사상이 더 위험한 것 같지만, 과연 한 나라 황제의 즉위식에 참견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겠지.'
지오그, 일명 성전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치유의 여신과 비슷한 혈통이라고 믿는 코레아 왕조의 후손에 집착이다.
심지어 여러 번 코레아의 혈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런 성전의 눈은 당연히 와토린구의 후계자에게 향해, 디코콰리아와 카니아의 전쟁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황제가 말한 적이 있었다.
루디가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비밀이었지만, 최근 일 이년 동안은 쉬쉬하면서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전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루디에게도 눈독을 들일 터, 그들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황자들은 누구와 접촉하고 있는지, 아직 루디는 몰라. 그가 배운 것은 기껏해야 치세의 기본 정도로, 황제가 부리는 조직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조금씩 알아가야 한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루디는 나디아그라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무엇을 하였나요, 나디아그라가 묻고 있었다.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고 있다.
루디가 전전대 황제가 대관식에 입었던 옷을 줄여 몸에 맞추는 작업 중이라고 대답하면 큰일이네요, 라며 웃었다.
"가만히 있는 게 정말 힘들어요...어머니."
루디가 말하자 그렇지, 하며 나디아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황실 납품을 맡고 있는 재단사와 재봉사가 하는데, 힘들기는 루디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옷을 몸에 대고 핀을 꽂으며 크기를 맞추는 동안, 루디는 인형처럼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사정없이 핀이 몸을 찌른다. 혹은 실로 대강 형태를 꿰매놓은 곳이 터져 버렸다.
평상시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작업하지만, 이번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그런 배려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 일을 이야기하는 내내, 나디아그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리리샤의 옷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저택에서는 간단한 옷을 입고 있지만, 시종장은 그동안 리리샤를 위해 해마다, 계절마다 드레스를 만들어왔다.
리리샤가 가만있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마리가 만드는 옷의 치수를 이용하고 있다.
마리가 옷의 기본 뼈대를 만들어 가봉을 하면, 그것을 이용해 황실 여성의 옷을 만드는 업자가 재생산하는 것이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나디아그라가 문득 주저하면서 그를 불렀다.
"저, 리코! 혹시 폐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지는 않을까? 그, 즉위식에 말이야. 나도, 유모도, 마리도.... 물론 그런 일이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요."
루디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디아그라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나디아그라의 손은 이제 11살이 된 루디의 손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아니, 나디아그라 쪽이 조금 작을까.
어릴 때는 커 보였던 나디아그라는 이제 힐을 신고 있어도 루디의 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가 싶어졌다.
"그 일로 황제 폐하와 벌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유모와 마리를 대중 앞에 내보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층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괜찮다면."
"갑니다, 가요!"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 서 있던 유모와 마리가 보였다.
소리친 것은 유모였다.
그녀가 이 빠진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맙소사! 내가 루디님이 즉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죠."
유모가 큰 소리로 말하며 옆의 마리와 손을 꼭 잡았다.
마리도 기뻐 보였지만, 이내 머뭇머뭇하며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루디님. 저는 노예인데, 정말 가도 될까요? 잘못하면."
"괜찮아. 그리고 마리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 잠깐 나갈까?"
루디가 일어나 마리를 부르자, 어리둥절한 그녀가 주춤거리며 따라나왔다.
루디는 밖으로 나와 정원에 섰다.
마리가 가꾸는 밭에 새싹이 나고 있었다.
중요한 작물은 겨우내 실내에서 싹을 틔워 밖에 이식한다. 루디가 어설프게 기억하고 있는 일을 마리에게 전해, 그녀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착시킨 방법이었다.
"밭이 많이 늘었네."
루디가 말하자, 마리가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의 생계가 여기에 달려있으니까요."
하지만 곧바로 마리의 어깨가 조금 쳐졌다.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요. 루디님이 황제 폐하가 되시면 이런 것도 필요 없어지겠죠."
"그렇지 않아, 마리. 오늘은 그것도 포함해서 이야기하려고 불렀어."
루디가 바닥에 앉자, 마리도 그 곁에 앉는다.
예전에는 둘이서 곧잘 이렇게 앉아 돌을 고르곤 했다. 그때 일이 생각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일 먹을 걸 걱정하던 그 시절, 만능에 가깝게 이것저것 모두 해내는 마리는 이 집의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리,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혹시 결혼하고 싶지 않아?"
마리가 파뜩 고개를 돌려 루디를 보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평범하게 남편과 살면서 애를 낳고 사람들을 만나는 평범한 인생. 지금이라면 줄 수 있어. 노예에서 풀어 줄게. 이곳을 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괜찮은 남자를 물색하고."
"나, 나, 쫓겨나는 건가요? 이제 필요 없어요?"
마리가 부들부들 떨면서 묻는다.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루디는 약간 당황했다.
"마리, 그게 아니야. 마리가 원하는 삶을 주고 싶어. 전에는 그럴 수 없었지만, 지금은 줄 수 있으니까.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아?"
마리가 루디의 진심을 엿보는 것처럼 가만히 쳐다보았다. 루디의 말이 정말로 자신을 위한 거라고 판단 내렸는지, 마리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직 어린 루디님께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는 말이죠, 한때 성노예였어요. 아버지가 노예상한테 팔아넘기고, 다시 변태 재단사한테 팔렸죠. 루디님한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는데 여기에 와서야 겨우 숨 쉴 수 있게 된 거예요."
마리는 가만히 땅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남자는 싫어요. 거칠고 폭력적이고. 모처럼 벗어났는데 왜 남자하고 살고 싶겠어요."
마리가 루디를 보고 약간 웃는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거요. 하지만 밖에서 나는 밥만 축내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죠."
마리가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이 세상에서는 여자가 재단이나 옷 만드는 재주가 있어봤자, 아무도 그걸 재능이라고 생각해 주지 않거든요. 그냥 못생긴 여자가 매력도 없다고만 여기죠. 여기에서 리리샤 공주님 옷을 만들거나 헌 옷을 잘라 나디아 마마 옷을 다시 만드는 건 즐거워요. 내가 만들지 않으면 공주님도, 나디아 마마도 입을 옷이 없다는 게 나한테는 사정이 좋았죠."
마리가 머리를 기울이며 미소를 띠었다.
"루디님하고 밭을 경작하는 것도 좋아해요. 함께 밭에서 돌 고를 때 생각나세요?"
마리는 벌써 30을 훌쩍 넘었다. 나이를 얘기해 주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40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거친 피부는 굳은살 하나 없는 귀족 여성에 비하면 분명 흉할 것이다.
그래도 햇빛 아래에서 웃고 있는 마리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꽃은 꽃이라 아름답지만, 인간은 인간이라 사랑스러운 것 아닐까.
루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리를 보았다.
"마리, 그러면 여기에서 살아줄래? 나디아 마마한테 새로운 시녀를 붙이거나 환경을 바꾸고 싶지 않아. 이대로 이렇게, 조금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살아도 좋아?"
마리가 환하게 웃는다.
"물론이에요. 루디님. 지금처럼 살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고마워. 즉위식을 치르자마자 마리는 금색 노예가 될 거야."
"에엑?"
갑자기 마리 입에서 괴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의 따뜻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그, 금색 노예요?"
"응, 나의 첫 번째 금색."
"마, 말도 안 돼. 나는 할 줄 아는 게 재봉이랑 농사밖에 없는데. 전투는 할 줄 몰라요."
"금색 노예가 전투 노예라는 건 어디에서 나온 생각이야?"
"다들 아는 얘기에요. 금색 노예는 황제의 전투 노예라는 거. 게다가 내가 금색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잖아요.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마리가 허둥지둥 손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마치 팔다리가 당황해서 머리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루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 내게는 나디아 마마와 유모, 마리, 그리고 리리샤 공주님만이 가족이야. 이 세상에는 나를 낳아준 사람도, 황제로 만들어준 사람도 있지만,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여기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뿐."
이건 진심이었다.
지구에서의 삶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루디에게는 이곳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의식이 거의 없다.
그저 지구에서 살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엉뚱한 인물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보낸 이 저택의 사람이 진정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위해 죽어간 와토린구의 경비대장이나 유모에게는 미안하지만, 감정이 그렇다. 어쩔 수 없다.
루디가 내민 손을 보고, 마리가 주춤하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을 잡으면서 루디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격 없다는 말은 하지 마. 마리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금색이나 은색 노예가 되는 거니까, 부디 받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마리가 고개를 숙이고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손을 잡고 건물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원단이든 씨앗이든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원한다면 여기에 농장을 지어도 좋다구."
"그게 뭐예요, 루디님. 후궁에 그런 게 생겨서 좋을 일이 없잖아요."
마리가 울면서 웃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리리샤 공주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루디를 향해 달려와 머리를 박았다.
"공주님!"
마리가 깜짝 놀라는데, 리리샤 공주가 종이를 높이 쳐들었다. 루디의 코에 종이를 문지들 듯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내 서명! 이게 내 이름이야! 틀리지 않고 잘 썼다고 남작 부인한테 칭찬받았어요."
종이에는 중간 이름이 몇 개나 들어간 긴 글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글씨체가 아름답지는 않다. 어린아이가 힘을 잔뜩 주어 쓴 것 같은 글씨였다.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몸을 낮춰 시선을 마주했다.
"잘 했어요, 공주님."
"칭찬!"
리리샤가 이마를 불쑥 내밀었다.
그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떼자, 그제서야 마리 뺨이 젖은 걸 보고 리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리, 왜 울어?"
"공주님이 위험하게 뛰어다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다칠까 봐 걱정돼서요."
리리샤 공주가 루디와 마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점잖게 말했다.
"싸우지 마!"
손가락을 한 개 올리더니 탁탁 털면서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유모의 흉내를 내는 것 같다.
"그렇게 자꾸만 싸우면 염소가 되어 버려요. 착하게 굴지 않으면 신한테 벌을 받아 짐승이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리리샤 공주가 어릴 때 읽어준 신화에 저런 게 있었다. 나쁜 행동을 해서 짐승이 되어버리는 일화가.
리리샤 공주의 잔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한데 싸우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설교를 듣고 있는 걸까.
설교하면서 기쁜 듯 반짝반짝 미소를 보이는 리리샤 공주의 뒤쪽에서, 남작 부인이 서명이 적힌 종이를 보며 살짝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마음 알지요.
이 글씨로 혼인 서약을 할 거라 생각하면 루디의 마음에도 먹구름이 조금 끼었다.
< 루디의 첫번째 금색 노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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