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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3화 (83/201)

< 사랑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083

창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는 걸 보며 꼬박 밤을 새웠다. 가슴이 활활 타올라 하룻밤 사이 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숨을 쉴 수 없다.

자신이 자리를 떠난 뒤, 황제가 곧바로 금색 아이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제 오후, 한동안 황후의 곁에서 시녀를 했던 제국 출신의 여자가 오랜만에 찾아와 눈물을 떨구며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말이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갔다.

마마, 어찌 폐하가 이러실 수 있을까요. 황후 마마께 너무 합니다.

여자가 몸을 비틀며 울었다. 그 눈에 흐르는 눈물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황후를 위한 게 아니다. 그 계집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황후는 자신의 앞에서 우는 계집이 몇 년 전 황제의 침실에 불려 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의 밤을 같이 한 뒤 황제가  냉정하게 다른 남자의 처로 만들어 쫓아냈었던 일도, 그것이 여자가 임신했다는 거짓말로 황제를 우롱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녀가 보이는 눈물은 황후를 위한 게 아니라 아무 이득도 보지 못한 채 쫓겨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물러나게 하고 시녀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았다. 그제서야 황태자가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궁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그녀의 손발을 모두 자른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 같다.

조금씩 몰아 우리에 가둔 뒤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건지도 모른다.

황후는 답답하게 가슴을 누르는 코르셋을 손으로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따위 나라, 망해버리면 좋다.'

황제가 사랑하는 이 나라를 망쳐버리면 그 냉정한 눈에도 눈물이 흐르겠지.

침실에 누워 죽어가면서 창밖에서 타오르는 전쟁의 불길을 보면, 그제서야 후회하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남편은 알게 될 거야.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사랑했던 것은 오직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고.

시녀는 모두 내보내, 안에는 아무도 없다.

황후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이마를 땅에 댄 채 오열했다.

이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밉고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물러가고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바깥에서 어수선한 발소리와 실랑이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안 됩니다. 전하. 면회 신청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오시면!"

"황후께서는 아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하, 제발."

"비켜라! 감히 누구의 앞을 가로막느냐. 비상 사태라 하지 않았는가!"

실랑이 하는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2황자가 거친 발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님!"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2황자가 소리쳤다.

"알고 계십니까! 어제 어머님이 나가신 직후 그 꼬마 녀석의 작위 수여식이 있었다는 사실을요."

황후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지만, 2황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계속해서 말을 쏟아낸다.

첫째는 우물쭈물 나약하기 그지없고, 둘 째 아들은 난폭한데다 머리가 나쁘다. 셋째는 똑똑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마력이 없다시피 할 만큼 적다.

어째서 모두 이렇단 말인가. 하다못해 하나라도 제대로 된 자식이 있었다면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흐르는데, 2황자가 거칠게 의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기 분을 자신이 다스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형님도 궁을 나갔다 하더군요. 아버님이 미치신 게 분명합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남편이다.

황후가 번쩍 고개를 들자, 입구에 황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시종장이 황제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황후의 시녀들이 얼굴색을 파랗게 만든 채 안절부절못하며 그 뒤에 서 있었다.

2황자가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아버님!"

의자에 걸려 2황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황제가 힐끔 2황자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저, 저는."

2황자가 말을 더듬자, 황제가 파리 쫓듯 손을 저어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남편의 그런 행동도, 바보 같은 아들도 싫다.

그녀의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황제를 두려워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무서워한다.

어째서 남편과 자신 사이의 아들은 모두 이런 것인가. 한심하다. 엔리코를 떠올리자 분노 섞인 슬픔이 다시금 밀려왔다.

2황자는 엎어질 듯 발을 움직이며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복도에서 넘어진 모양이다.

황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황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편의 쏘는 듯한 시선에, 황후도 오기가 생겼다. 평소와 달리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시선을 마주친 채, 뒤를 향해 말했다.

"레이, 너도 나가 있어라. 문을 닫아.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해라. 황후와 단둘이 할 말이 있다."

황제를 신처럼 숭상하는 시종장이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몰았다.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했지만 황제의 말에 이의를 말할 수도 없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시녀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히 문이 닫혔다.

황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먹을 움켜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남편은 무슨 염치로 이곳에 얼굴을 디민 것일까.

아내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꺾고 후계자 아들까지 내쫓아 버린 뒤, 그 꼴을 보며 웃고 싶은가.

늙은 몸뚱어리를 남편이 진심으로 원한다 생각하고 아양 떨던 지난 날을 비웃으러 왔나.

보기 흉하게 소리치지 않은 건 오랫동안 황후로 가면을 쓰고 있었던 덕분이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울고 불며 황제에게 달려 들어 손톱으로 얼굴을 긁고 있었을지 모른다.

황후가 노려보자, 황제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그녀 앞에 던졌다.

밀랍 봉인이 깨진 편지가 바닥에 흩어졌다.

자신이 모국의 오라버니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

들켰다.

이제 끝이다.

황제는 제국을 배신하려 했던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을까.

황후는 편지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차피 끝이라면 하고 싶은 말을 참을 필요도 없다.

황제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황후, 그대가 여를 배신하는가!"

"먼저 배신한 것은 당신일까요? 나의 손발을 하나씩 잘라내고 내 자식을 떼어내 기쁘십니까! 늙은 소첩이 당신의 속내도 짐작하지 못한 채 몸을 열며 황홀해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요."

종이를 움켜쥔 채 일어나 황제에게 달려갔다. 두 손으로 남편의 가슴을 힘껏 치며 소리친다.

"당신이 미워!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손목이라도 내놓겠어. 당신이 나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 편지를 보내게끔 한 것은 당신일 터인데!"

울면서 남편의 가슴을 두드리자, 황제가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래! 여가 그리하였다. 그대의 손발을 내가 다 잘라냈어. 의지하던 대사는 본국으로 송환되어 몰락했고, 친밀하던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영지로 돌아갔다. 끝까지 저항하던 자는 은거시키고 새로이 후계자가 뒤를 이었지. 이제 그대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 이제 나를 고립시키고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나디아그라를 옆에 세우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를 리리샤와 짝지었나요! 내게 남은 마지막 자리까지 빼앗으시렵니까."

황후가 울부짖자, 황제가 그녀의 머리를 잡아 비틀어 올렸다.

늙고 병들은 몸이지만 평생을 단련해온 남편의 몸은 강하다.

황후는 움직이지 못한 채 남편이 하는 대로 머리를 위로 제쳤다.

"그것이 그대와 자식들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왜 몰라! 여가 그대를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왜 모르느냐."

황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왜 나디아그라에 그리 신경을 써! 그녀는 한낱 후궁일 뿐이다. 그저 지나가는 여자일 뿐, 여의 아내는 그대다. 그대 외에 누가 내 옆에 설 수 있느냐."

황후는 손을 올려 손톱으로 황제의 얼굴을 긁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이 한 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한데 모아 꽉 움켜쥐었다. 움직일 수 없다.

"거짓말! 그런 말을 하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사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압니까. 소첩은 황후이기 전에 여자입니다. 거짓말쟁이! 항상 내게 돌아오겠다 약속했으면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잖아. 거짓말쟁이."

황후는 손톱이 부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황제의 옷을 손으로 긁었다.

손을 황제의 옷 사이로 넣어, 남편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남편에게 펜던트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 여자를 사랑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압니까! 밤새워 나를 사랑한 뒤, 돌아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죽어가는 이 순간에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 내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여자를 바라보던 그 눈으로 나를 보고 거짓을 말하시나요."

황제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녀의 머리를 움켜쥔 채 한 손으로 펜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보아라."

"싫어!"

남편이 들이대는 펜던트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다. 두 손으로 밀어냈지만, 황제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눈을 떠! 이것을 보아라. 이 여자를 봐!"

"싫어요. 제발 그만!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보게 하지 마. 너무 잔인합니다. 당신은 너무 잔인...."

마지막 말이 흐느낌이 되는데, 갑자기 얼굴이 위로 들렸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가 부딪칠 정도로 거칠게 입이 뭔가에 막혔다.

뱀처럼 미끄러운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굳어있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나이 든 몸에 새겨져 있던 기쁨이 하나씩 솟아나, 이것이 오랫동안 자신이 갈망해오던 감각이라고 머릿속에 속삭이는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남편이 귓가에 속삭였다.

"레베카!"

그녀의 이름이다. 혼인한 이후, 남편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항상 황후, 혹은 그대라고만 불렀다.

"레베카!"

남편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코레아의 공주를 만나기 이전의 어린 시절, 둘만이 서로의 사랑이었을 때가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보라."

남편의 말이 잔인하게 귓가를 울렸다.

"...싫어. 제발 내게 잔인하지 마세요. 늙고 추해졌어도 여전히 당신의 사랑을 구하는 여자일 뿐입니다."

눈물이 넘쳐흐른다.

남편이 그녀의 눈 바로 앞에 펜던트를 들이댔다.

어쩔 수 없이 눈을 깜박이자, 흐릿하던 눈에 작은 초상화가 들어왔다.

펜던트 안에는 갈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를 한, 어두침침한 여자가 있었다.

차가운 인상에, 잘난 척 코를 들고 있다.

자신의 모습이었다.

황후가 40이 좀 안되었을 무렵인 것 같았다.

"...?"

황후가 눈을 깜박이자, 황제가 말했다.

"이 여자가 내 마음에 사는 사람이다. 그대가 이 안을 본 것은 필시 젊었을 무렵이겠지."

말을 못 하고 눈만 껌벅이는데,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항상 보았던 여자는 이 안에 있는 사람이다. 여의 아내, 그대야. 벌써 오래전에 이 안의 내용은 바뀌어 있었다. 그걸 몰랐는가."

"...."

강하게 그녀를 붙잡고 있던 황제의 손은 어느새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레베카, 내 생명은 길지 않다. 내가 가장 그대를 필요로 할 때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 줘. 지금 나는 절실하게 그대가 필요하다."

"...폐하."

그날의 시간은 온화하게 흘러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둘만이 앉아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침대에서 어우러졌다.

격렬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부드럽고 따스했다.

몇 번이나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레베카.

레베카.

여의 아내.

오랫동안 사랑해오던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

"수고하셨습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황제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힘들었어."

황제의 눈 밑은 시커멓게 들어가 있었다. 피곤해 보였다.

"폐하, 그렇게 몸으로 어우러지실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아닐까요."

"레이, 비록 내가 늙고 병들었어도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폐하, 그러시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남자는 허세 빼면 시체라는 말도 모르느냐. 그 자리에서 그냥 나올 수는 없었어."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황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이놀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잘 되었지요. 펜던트에 넣을 그림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황후가 나를 사심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통한 거다. 조금이라도 계산이 있는 여자였으면 통하지 않았을 거야."

황제가 씁쓸히 웃었다.

펜던트는 밤새도록 그림 교체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코레아 공주의 그림이 약간 손상되었다.

황제는 아쉬워했지만, 그걸 남겨놓았다 황후가 발견하면 위험하다 싶었는지 결국 태우게 했다.

그 뒤로, 황제는 계속 기분이 나쁘다.

"가끔 폐하를 사랑하는 여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 행복해진 여성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레이놀드는 속아도 다시 속는 황후의 얼굴을 떠올리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황제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싶은 거야. 거짓이라고 의심해도 어쩔 수 없이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거지. 황후한테는 못할 짓만 하다 가는 것 같다."

그 뒤로,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황후의 방에 들어갈 때는 아침해가 떠 있었는데, 어느새 캄캄해졌다.

오늘 황제는 약이든 와인을 한 잔도 먹지 않았다.

아픈 걸 숨기기 위한 거짓 웃음도 없었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퉁퉁거리는 황제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모처럼 좋은 날이구나.'

레이놀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 사랑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끝

(83)

작가의 말

표지 축하, 감사합니다.

표지 제안서를 내면서, 흑마에 대한 건 제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댓글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림을 바꿀 수는 없으니, 나중에 글에서 바꾸......크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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