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나니 황제의 결론 >
#081
"폐하,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습니까?"
루디가 묻자 황제가 눈을 뜨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얘기를 한 적이 없었구나. 여기에 있는 시종들은 모두 훗날 너를 위해 일할 사람들이다. 황실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많지. 이들은 네가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조언할 뿐 아니라, 뒷면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연결해 줄 것이다."
황제가 손짓하자, 구석에 있던 시종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황제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여러 군데에서 벽이 열리더니 몇 명의 시종이 나왔다.
루디는 표정에 내지는 않았지만 약간 놀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벽 안에 황제를 지키기 위한 시종이 항상 있었는가. 전혀 몰랐다.
'불새는 알고 있었을까.'
항상 루디의 주변에서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는 불새라면 능히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루디를 해치려는 기색이 있었다면, 불새는 반드시 경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디에게 적대하는 감정이 없으면 불새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일에는 조금 무딘 면이 있었다. 뭐, 마생물에게 인간다운 주의를 요구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황제의 근처에 온 시종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넓은 공간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있는 줄은 몰랐다.
"시종은 황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동시에 황제의 모든 업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조해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만큼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어도 좋다."
황제가 시종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종장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정중하게 한 손을 가슴에 댔다.
"저의 제일은 황제 폐하이십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충성은 루디 전하에게 바칩니다. 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다른 시종들도 시종장과 똑같은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시종장이 고개를 들어 루디를 보았다.
"만일 저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자리를 비우면 저쪽에 있는 자가 대리로 지휘를 맡을 겁니다."
시종장의 말이 떨어지자, 일전에 나디아 마마의 처소에 함께 갔던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외에도 앞으로 루디 전하의 곁에 붙이는 시종은 믿을 수 있는 자뿐입니다. 그때마다 한 명씩 얼굴을 기억해 주십시오."
시종장이 정중히 말한다.
루디는 그 자리에 있는 시종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루디의 말이 떨어지자, 시종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만히 앉아있던 황제가 물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예, 폐하. 진작에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루디는 약간 긴장하여 숨을 들이마시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코레아의 마도구사들이 시연을 보였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들이 쓰는 마법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
황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가만히 루디를 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해주겠느냐."
루디는 아까와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황제가 묻는다.
과연, 황제는 사람의 말 뒷면에 있는 뜻을 금방 알아챈다.
루디는 약간 긴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읽을 수 있습니다."
황제의 얼굴에서 일순간 표정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허깨비를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읽을 수 있다고."
황제가 중얼거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벽 쪽으로 가서 전등 마도구를 손에 들었다.
납작한 모양의 마도구는 꺼져 있었다. 사용하지는 않지만 비상시를 위해 놔둔 것이다.
"폐하!"
시종장이 재빨리 그것을 받아 든다.
황제는 시종장은 신경 쓰지 않고 루디를 보았다.
"루디, 여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그 의미를 알겠느냐?"
루디는 가까이 다가가 전등 마도구의 글자를 보았다.
이곳의 마도구에도 후궁에 있는 것과 똑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전등, 점등과 소등]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점등]은 불을 켠다는 의미이고 [소등]은 끈다는 뜻입니다."
전등이나 점등, 소등 같은 말은 한국어다. 아마 황제나 시종장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단어가 조금 괴상하게 들렸는지 황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점차, 핼쑥한 황제의 얼굴에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황제가 흥분을 누르며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아보았느냐?"
루디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정직하게 대답했다.
"후궁에 있는 마도구를 보았을 때 알았습니다. 그때는 유모가 마도구사가 아니라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황궁 시연회에서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걸 알았습니다."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냥 의미가 떠오릅니다."
루디가 조용히 대답하자,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하게 뭔가 생각하는 것 같다. 움푹 들어간 눈으로 뚫어지게 루디를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황제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그 뒤가 달라진다. 더 밝힐지, 아니면.
루디의 심장의 두근두근 뛰었다.
황제는 아마 루디가 약간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을 위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다소의 안 맞는 말이나 상황은 캐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루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아니라면....
긴장으로 손끝이 약간 차가워졌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걸 불새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커튼 뒤, 어두운 구석의 공간 일렁이는 불빛 속에, 불새가 빠르게 이동하며 깃들고 있었다. 가끔 불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정전기 같은 게 튀었다.
황제가 루디에게 적대하는 순간, 불새는 움직인다. 아마 루디의 명령이 없어도 그럴 것이다.
문득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래, 보리스가 그런 말을 했었지. 가끔 네가 있으면 이상한 불빛이 튄다고."
촛불이 어른거리며 황제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든다. 황제가 강렬한 눈빛으로 루디를 보았다. 조금씩 황제의 몸이 흔들리더니 웃기 시작했다. 점점 웃음소리가 커진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는 모양이다.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한참 동안 웃고 있었다.
평상시와 전혀 다른 황제의 모습에 레이놀드가 당황한 듯 황제를 보았다.
"폐하!"
황제가 시종장을 보더니, 루디를 향해 한 팔을 펼쳤다.
"보아라! 제국이 날개를 얻었다. 그대는 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젊을 무렵 한 번 보았지. 사자에서 날개가 돋아난 거야!"
귀신처럼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황제가 미소 지었다.
"저승 가는 길, 훌륭한 선물을 받았다."
황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힘 빠진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힘 있는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책상의 윗면을 주먹으로 통통, 가볍게 두드리며 황제가 웃는다.
"레이, 계획을 변경한다. 나는 열흘 뒤 퇴위! 루디를 즉위시킨다. 11살 소년 황제의 등극이다."
"폐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게다가 열흘이라니, 시간도 모자라요. 즉위하려면 최소한 몇 년의 준비 기간이...."
"새 황제의 즉위를 반대하는 자는 극형으로 다스린다. 레이, 자네도 마찬가지야!"
"폐하!"
시종장이 비명처럼 외치자, 황제가 비쩍 마른 얼굴을 루디에게 향했다.
"얘야, 우리 제국의 황실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있다. 아주 먼 옛날, 황제가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기이한 말을 하고 이상한 문자를 썼지. 그자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거대한 불을 일으키고 물을 만들어냈다. 기묘한 물건도 만들었지."
신비한 남자는 돈이나 다양한 물건을 받고 황제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점차 남자의 세력이 커지면서 황제는 그를 위험시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남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방어 도시를 만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남자의 손자가 코레아 왕국을 세워 왕이 된 것이다.
"그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투명하게 빛나는 기묘한 동물을 데리고 다녔다."
황제는 루디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황제가 루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남자를 적대시했던 황제는 죽었다. 부친의 복수를 갚으려던 황태자도, 신하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약속한 뒤 새로 황제가 된 사람도 죽었다. 증거는 없지만 그 남자의 짓이라는 걸 그 당시 제국의 고귀한 신분 사람들은 모두 알았지."
아! 루디의 몸이 약간 굳었다.
황후의 시녀를 죽인 게 루디의 마생물이라는 걸 황제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황제의 눈동자에 귀기 서린 빛이 어렸다.
"그 뒤 황제가 되는 자는 누구나 전대의 황제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되면 적대시하지 마라. 한편으로 끌어들여라. 그의 핏줄을 황실에 넣어라. 그를 내 것으로 만들어라. 그런 거지."
황제의 앙상한 손가락이 루디의 손목에 파고들었다. 깡마른 병자의 힘 같지가 않다. 루디의 눈을 들여다보고 황제가 웃었다.
"그 남자만이 마법 문자를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도, 손자도 볼 수 있을 뿐,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그 문자를 이해 못 해. 그 남자가 자식들에게 뜻을 가르쳤지만 문자를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볼 수 있는 자에게조차 마법 문자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거야. 아지랑이가 글자 앞에 꿈틀 거리는 것처럼 혼란을 주어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나는 그 남자가 아닙니다, 폐하."
루디의 말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같은 것이다. 그 남자도, 너도,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다."
황제가 목소리를 약간 낮추고 말했다.
"얘야, 나에게 그 생물을 보여다오. 빛나는 마법의 동물. 부탁한다."
황제는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명령한다. 지금까지 황제가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시종장도 같았던 모양이다. 더 이상은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눈이 커져 있었다.
루디는 작게 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불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섬세한 깃털의 모습이 먼저 어둠 속을 밝히며 나타났다. 깃털에서 깃털로, 빛이 번져간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몸통이 먼저 드러나고 그 뒤에 가느다란 목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그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새의 얼굴이....
모습이 모두 나타난 뒤, 불새가 날개를 펄럭였다. 허공에 작은 불꽃이 흩어져 빛나다 사그라들었다.
황제가 꿈꾸는 것처럼 불새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이 마의 생물. 아름답구나!"
불새가 빛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황제와 시종장, 그리고 실내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루디에게 돌아왔다.
루디의 어깨에 내려앉은 불새가 머리를 아래로 낮춰 루디의 뺨에 비빈다. 그것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아 보였다.
루디가 잘했어, 라고 말하자 불새의 동그란 눈이 깜박깜박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약간 기쁜 듯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것은 너의 말을 듣는구나."
황제가 신기한 듯이 말하자, 루디는 빙긋 웃었다.
"처음부터 명령을 듣기는 하지만, 이렇게 친밀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슷해요."
루디가 손을 뻗자, 불새가 뜻을 알아채고 포로로 날개를 펼쳐 그 위에 올라앉았다.
황제에게 불새를 내밀며 묻는다.
"한 번 만져보시겠습니까? 감촉은 없지만 뭔가가 지나가는 느낌이 나요."
당연히 수긍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하지 마라. 그 생물은 특별한 것! 누구에게도 접하지 못하게 해. 그것은 온전히 너의 위엄을 높이는데 사용해야 한다."
황제가 힐끔 시종장을 보았다.
"레이놀드, 즉위식이라고 해도 거창할 필요는 없다. 단지 엄숙한 분위기에서 해. 각국의 대사들은 빠짐없이 불러라. 코레아 왕조의 마도구사들이 어제부터 와 있지? 그들도 불러라."
시종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폐하, 혼란이 엄청날 겁니다. 정말로 그리하시렵니까?"
"그래, 혼란한 게 좋겠다. 이 기회에 몇 놈은 죽는 게 좋아. 그러면 더 이상 불평도 나오지 않겠지. 썩은 부위는 잘라내버리는 거야."
처음에는 쩔쩔매며 반대하는 듯 보이던 시종장의 입가가 어느새 삐죽삐죽 올라가고 있다. 눈썹은 치켜 올라가 있는데 얼굴은 웃는 것 같았다.
"폐하, 당신은 정말!"
"뭐! 난폭한 망나니라고?"
"그래요. 폐하가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제가 항상 고생이었죠. 기억하십니까?"
"그래, 당연하지. 젊을 때는 즐거웠다. 너도 나도 다 망나니처럼 이리저리 날뛰었지."
"그건 즐겁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골칫덩이라고 말하는 부류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새 활기를 띠었다.
루디는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웃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몇 년,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한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황제가 루디를 보았다.
"앞으로는 그리 쉽지 않을 거다. 디코콰리아와 카니아는 결국 타국의 침략을 받을 거야. 그때 제국도 참전하게 된다. 그 나라를 다른 곳에 빼앗길 이유가 없어. 어쩌면 대륙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게 될지 모르지."
그 외에 야만족의 문제도 있다.
가뭄이 들거나 흉작, 혹은 겨울이 오는데 가축이 모자라면 야만족은 다른 곳을 습격해 식량을 충당한다.
"모두 너의 대에 일어날 일이다. 그래서 걱정이었지만, 너의 능력이라면 문제 없겠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몸속의 고름은 모두 짜내고, 상처투성이의 몸뚱어리를 넘겨주마. 그걸 살려서 다른 놈들과 싸우는 건 네 몫이다."
황제가 차분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괜찮다.
너의 두 손에는 전설의 명약이 있으니.
다른 놈들에게 당해 최악까지 몰려도 너의 능력이 있다면 되살아난다.
제국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타국에 짓밟혀도 티끌만 한 구석에서 다시 들고일어날 수 있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루디, 부디 리리샤와 나디아를 부탁한다."
'황제는 끝까지 황제로구나.'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디아 마마라면 모를까. 황제에게 리리샤에 대한 관심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디가 정을 갖고 있으니 리리샤를 언급한다. 그녀를 타국의 군마에 짓밟히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일부러 말하는 거다.
너의 목줄은 그 아이다, 라고 황제가 대놓고 말하는 것 같았다.
루디는 고개를 살짝 내렸다.
"알고 있습니다."
뭐, 좋다. 이제 와서 도망갈 생각은 없으니.
< 망나니 황제의 결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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