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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80화 (80/201)

<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 >

#080

로베르토가 부인을 다독여 나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레이놀드는 황제의 방으로 향했다.

항상 테이블을 앞두고 있던 의자가 평소와 달리 창쪽에 놓여 있었다.

황제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마른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시종 한 명만이 그림자처럼 벽에 붙어 서 있다.

레이놀드가 들어가자, 시종은 말없이 목례한 뒤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둘 만 남은 채 문이 조용히 닫혔다.

레이놀드를 돌아보지 않고, 황제가 물었다.

"그 아이는 떠났느냐?"

"예, 방금 황태자 처소를 나갔습니다."

황제는 멍하니 파란 하늘을 보았다. 그 눈에 엷은 습기가 서려 있는 것을, 레이놀드는 모른 체했다.

"공주들은?"

"명령하신 대로 조치했습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터이나 충분히 모습은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로베르토는 부인과 둘만 떠난다.

부모가 폐적된 것으로, 로베르토의 자식들인 공주들 역시 황적에서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공주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황실의 피를 잇고 있는 공주는 시집을 통해 다른 나라나 가문과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수단. 외부로 유출할 이유가 없다.

그 때문에 로베르토 소생의 공주들은 황궁에 남긴다. 훗날 황후나 누군가 첩의 자식으로 입양을 넣을 예정이었다.

로베르토와 그 부인은 평생 딸들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 사실이 마음 아파, 황제가 따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부모의 마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공주들을 기다리게 하라고.

레이놀드는 의자 옆에 놓인 얇은 모포를 들어 황제의 무릎에 덮었다.

여전히 하늘만 보고 있던 황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레이, 먼 훗날 루디가 모든 걸 장악하고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그 아이와 공주들을 만나게 해줘."

레이놀드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전의 황제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약해졌구나.'

젊을 무렵의 황제였다면 로베르토와 공주들이 얼굴을 보게 하는 일조차 칼처럼 끊었을 것이다.

나이와 질병이 황제를 좀먹는다.

그 사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레이놀드는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지금이라도 만나시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를 가지고 루디님이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십니다. 폐하와 보리스가 정말 잘 가르치셨으니까요. 루디님은 꼭 젊은 시절의 폐하 같더이다. 어떤 험한 폭풍우에 내던져도 잘 헤쳐나가실 겁니다."

고개를 올려 하늘에만 시선을 주던 황제가 그제야 레이놀드를 쳐다보았다.

눈동자를 덮던 습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쨍쨍한 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레이, 내가 늙고 약해졌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런 것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 심정을 달래려고 하는 거야. 불쌍하니까 아들을 보라고 권한다. 그대와 내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날 속이려고 하는가."

황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로베르토에게 미련이 있다고 누군가 생각해봐라. 분명히 그 아이를 이용해 먹는다. 내가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늙어 보이는가."

"죄송합니다."

레이놀드가 작게 말하자, 황제가 피식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니 되었다. 실제로 나는 늙어버렸나 봐. 로베르토의 심정을 생각하면 불쌍하게 여겨지고 만다."

황제는 한숨을 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레이. 불쌍하게 생각하게 되니 그 사람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보이는 거야. 이 뒤에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것이."

황제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로베르토는 약하지. 옆에서 누군가가 계속 들쑤시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질질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언젠가 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버팀목이 되어줄 거야. 반드시 미래를 생각해서 냉정하게 끊을 수 있다."

"공주님을 보게 한 것도 그래서였습니까?"

레이놀드가 묻자, 황제가 작게 웃었다.

"반반일 거야. 그런 마음 반,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반. 그리고 언젠가 그런 일이 겹쳐 루디와 그 아이가 함께 저 하늘을 보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약간."

그 뒤로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가끔 눈두덩을 누른다.

뺨으로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내려올 때 약간 젖어 있는 것이 레이놀드의 눈에 보였다.

'정말, 내 눈은 여전히 옹이구멍이구나. 폐하가 늙었다고 해서 황제가 아니게 될 리 없는데.'

마음이 늙어 약해진 것은 오히려 레이놀드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황제를 보고 있노라니, 점차 눈이 부신 느낌이 들었다.

젊을 때의 용맹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지금의 황제는 분명 늙고 초라해졌다.

하지만 그런 황제의 모습이 레이놀드의 눈에는 장엄하게 빛나는 거대한 고목처럼 보였다.

언제나 필사적으로 쫓아가도, 저 사람의 등은 항상 저만큼 앞서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이제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또다시 훌쩍 멀어진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

[서쪽을 보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서신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로베르토는 마차 안에 앉아 다시 한 번 편지를 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만나주겠다는 뜻일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황궁의 너른 공간을 빠르게 달려가던 마차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똑똑똑!

마차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부가 마차와 마부석을 연결하는 창을 두드린 모양이다. 마부석 쪽의 작은 창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황궁의 마부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적의 급습을 받을 때나 있으려나. 비정상적인 일이다.

로베르토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이 마차 안에는 시종이나 시녀가 타고 있지 않다. 쫓겨나는 입장이라서인지 폐하의 명령이라며 아내와 둘만 타도록 했다.

로베르토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보이지 않는 창 너머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입니다. 부디 창밖을 보아주십시오."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 로베르토는 창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여느 때와 같은 황궁의 수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서쪽 창입니다."

"!"

그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마!'

[서쪽을 보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서신에 적혀 있던 말은....

로베르토는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내려와 반대편 창을 열었다.

마차는 황궁의 수많은 건물 중 하나를 지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그 건물이 멀리 보인다.

그 건물 앞에 몇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어린 공주들이 유모와 시종들에게 안겨 있다.

"부인! 부인! 저기를 보시오."

여전히 의자에 엎어져 통곡하며 울고 있는 아내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어 창으로 데려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던 아내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가 터진다.

로베르토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창을 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딸들이 부르고 있다.

목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니지만, 입을 크게 벌린 채 외치고 있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황실의 혈통을 잇고 있는 공주들은 정치의 수단이다. 언젠가 정략결혼으로 쓰이게 될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로베르토는 그쪽으로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포기했다.

나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버지가 내줄 리 없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한데....

속도를 줄인 마차가 천천히 지나가면서, 점점 딸들의 모습도 멀어졌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흔들며 울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

그 한 마디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

밤이 깊어지자, 루디는 황제의 침실을 향했다.

공식적으로 공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은 후계자 문장을 몸에 새긴다.

시종장이 앞장서 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 전하, 나디아 마마의 처소는 어떻게 할지 결정하셨습니까?"

"아직."

루디가 짧게 말하자, 시종장이 빙그레 웃는다.

"결정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증축이나 건물의 수선은 물론이요, 마마를 모시는 시녀도 말씀하시는 즉시 이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레이놀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복도에서 크게 흔들리며 본체를 따라 걷는다.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속이 쓰리다.

시종들이 원하는 것처럼 거만하고 차갑게 대할 때마다, 자신의 권위가 높아진다는 충족감보다는 오히려 벌 받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더욱 차갑게, 냉정하게 다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더욱 허리를 낮추어 공손히 루디를 대했다.

루디가 어리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업신여길까 걱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타인이 타인을 대하는 걸 보고 가치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귀족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기는 어려우니, 아니, 황제는 요구하고 있구나.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작위 수여식을 할 때, 유난히 루디에게 허리가 낮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황실과 연고가 깊은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이 황제의 명령 아닌 명령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았다.

'그렇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는데.'

루디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면서 히죽 웃었다.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황제 자신과 시종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황제라는 보호막이 없어지면 아직 어린 루디가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루디의 능력을 전혀 모르니까.

이 세상의 마법은 오직 마도구를 만드는데 집중되어 있다. 몇 년 동안 외부에 나가있으면서 탐구해봤지만 마생물을 만드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루디가 마력이 많은 것도, 코레아 문장을 지니고 있으니 마법식을 볼 줄 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마법식의 뜻을 이해할 뿐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말해야 하나.'

이쪽의 능력을 전혀 모르면 엉뚱한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황제에게 자신의 능력을 조금쯤 밝히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꺼려졌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능력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공포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배척당하는 원인이 된다. 양날의 검이다.

루디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멀리 호위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침실을 지키는 호위병들이다.

잘 만들어진 석상처럼 조용히 서 있는 호위병 뒤로 문이 열렸다.

황제는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을 그에게 내민다.

"이리 오라."

루디가 가까이 가자 얇아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리리샤와는 즐거웠느냐?"

"예, 폐하. 공주님은 변함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황제가 쿡쿡거리며 웃는다.

"너도 여성에 대한 빈말을 잘하게 되었구나. 듣기로는 개구리처럼 붙어 있었다던데?"

이번에는 루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부분이 귀여운 겁니다, 폐하. 리리샤 공주님이 다른 황녀처럼 새침한 미소녀가 되어 있었으면 오히려 사랑스럽지는 않았을 테지요."

"너의 감각은 이상하구나."

황제가 시종장에게 손짓을 하자, 예쁘게 세공된 작은 은상자를 가지고 왔다.

시종장이 공손히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더니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손잡이가 달린 바늘이 한 개 놓여 있었다.

"후계자의 문장을 새기는 절차는 어느 가문이나 거의 비슷하다. 루디, 잘 보고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너에게 태자가 생기면 똑같이 해주어라."

"예."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시종장이 손가락에 바늘을 찔러 피를 몇 방울 냈다.

그 피를 다른 손에 낀 인장반지의 표면에 떨어뜨린다.

피가 인장반지 표면 전체에 묻을 때까지 몇 방울이나 흘렸다.

그 뒤, 시종장이 루디의 옷을 위로 올려 배를 드러냈다.

"아무 곳에나 넣어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신분을 노출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새긴다. 보통은 배꼽 주변이지."

황제가 조용히 말하며 인장 반지를 루디의 배 근처에 갖다 댔다.

"만일 문장을 넣는 장소가 겹치면 나중에 새긴 문장이 옆으로 이동해 떠오른다."

황제가 인장 반지를 살갗에 꾹 누르고 주문을 외웠다.

"피의 흔적을 잇는다!"

반지가 작기 때문에 마법식을 새길 공간이 적어서일까. 다른 것과 달리 주문이 간단하다.

마법의 주문과 동시에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더니, 인장 도장과 똑같은 문장이 피부에 떠올랐다.

황제가 자신의 옷을 헤쳐 배를 보였다.

"네 것과 내 것을 비교해보아라."

두 개의 문장은 똑같은 모양이지만, 루디의 것은 선만 그려져 있었다. 반면 황제의 문장은 색이 칠해져 있다.

"모든 가문의 문장이 이렇다. 당주의 것은 색상이 채워져 있고, 후계자는 색이 빠진 채 선만 그려져 있지. 당주가 죽으면 후계자의 것에 색이 채워진다."

황제가 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명심해라. 네 배에 있는 문장에 색이 채워지는 순간이 내가 죽은 시간이다."

"예, 폐하."

황제가 피곤한 듯 눈을 감는다.

루디는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언젠가 다시 볼 수 있다 > 끝

(80)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연재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낮 12시 전 오전에 올리고 패턴이 정착하면 고정하려고 합니다.

11/22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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