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혼자 >
#078
저택에 사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키도, 얼굴도 똑같다.
유모는 주름살이 더 많아지는 것 같지만, 아, 그러고 보니 허리도 더 굽었다. 어쨌든 모습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리는 당연히 변하지 않는다. 작년의 마리와 올해의 마리는 완전히 똑같다. 몇 년 전의 마리도 마찬가지다. 변하지 않는다.
나디아 마마도 마찬가지.
유일하게 외부에 사는 시종 몇 사람도 만났을 때와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 그들은 표정조차 만날 때마다 똑같아.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키가 크고 몸이 커져도 저렇게 얼굴까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리샤는 예전하고 똑같이 생겼으니까.
유모하고 마리가 맨날 말했다.
[리리샤 공주님은 어쩌면 그렇게 변하지 않나요. 어릴 때와 똑같아요] 라고.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루는 루가 아닌 게 아닐...까요?
리리샤는 그렇게 확신했지만, 조금 헷갈렸다.
루가 외롭지 않게 리리샤 곁에 있으라고 붙여준 마법들이 기쁜 듯이 팔짝팔짝 허공을 뛰어다니는 거다.
리리샤와 가장 친했던 마법들이, 마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은 태도로 이 남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한편으로는 약간 질투가 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이 생겼다.
이 사람이 정말로 루일까.
리리샤가 알던, 항상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던 그 루가 맞을까?
만일 그렇다면, 루는 왜 이렇게 크게 변해버렸단 말인가.
손도, 신발에 감싸인 발도 크다.
아까 그녀를 들어올릴 때 닿았던 가슴도, 허벅지도 딱딱했다.
어릴 때 뻑하면 달려들어 껴안았던 루와는 큰 차이다.
그때의 루는 말랑말랑 포근포근, 안으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좋은 냄새가 났는데....'
어쩌면 이 커다란 루에게도 그 냄새가 날까.
리리샤는 얼굴을 약간 내밀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상한 향기가 난다.
좋은 냄새기는 하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예전의 냄새는, 그래, 꼭 햇빛 같았다. 마리가 정원에 널었던 빨래를 막 거둬왔을 때 나는, 그런 냄새.
하지만 지금의 커다란 루에게서는 꽃향기랑 비슷한 게 풍겼다.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찌푸리는데, 커다란 루가 말했다.
"공주님, 안 본 사이에 이상한 행동이 많이 늘었네요."
말투는 똑같은 것 같다.
문득 루가 이야기해 준 둔갑 도깨비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 옛적에 도깨비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속이고 노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도깨비는 이것저것으로 둔갑할 수 있어서 곧잘 사람들을 놀래켰다고 들었다.
리리샤가 조르면, 루는 도깨비가 호랑이로 변했다든가, 제비로 둔갑해서 흥부한테 씨를 갖다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는 말할 때마다 약간씩 바뀌었는데,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마치 둔갑하는 도깨비 같아서 리리샤는 굉장히 좋아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조르고 또 졸라, 매일매일 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도 둔갑 도깨비가 아닐까.
리리샤는 왠지 의심쩍어서 고개를 올렸다. 힐끔 커다란 루의 얼굴을 훔쳐본다.
"공주님?"
커다란 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썹이 약간 처지면서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갑자기 가슴에 뭉클한 것이 왔다.
'뭐지?'
왠지 모르지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몸속이 간질간질하면서 발가락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찔거리고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해진다.
안절부절못하며, 리리샤는 얼른 말을 꺼냈다.
"아무것도!"
루가 약간, 아주 약간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은 이제 내가 싫은가요?"
마음속으로는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루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겠어요. 어쩌면 둔갑 도깨비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죄책감 같은, 아, 그래, 이건 죄책감인 것 같다.
몰래 빵을 훔쳐서 나무 둥지에 숨길 때, 마리가 빵이 없어졌다며 곤란해하는 모습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눈썹이 축 늘어진 커다란 루의 얼굴이 왠지 슬퍼 보이고, 저런 표정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아냐, 루, 좋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자, 루인지 둔갑루인지 모를 남자가 빙긋 웃었다.
손을 내밀며 말한다.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유모님이랑 마리가 걱정하고 있겠어요."
유모와 마리까지 알고 있단 말이야?
정말 루일까?
둔갑 도깨비 아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찬다.
어...?
리랴샤는 문득 자신이 루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던 루가 순식간에 옆으로 와 있었다. 심지어 손까지 꼭 잡고 있어.
처음에는 손을 빼야지, 생각했던 리리샤는 물끄러미 자신과 루의 손을 보았다.
이건, 꿈속에서 루가 보여주었던 신데렐라같다. 멋있게 차려입은 왕자님이 신데렐라를 마중하는 장면과 굉장히 비슷한 게 아닐까.
아주 어린 시절, 신데렐라 꿈을 꾸었다. 루가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워 어두운 공간에서 춤추며 움직이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보여주는 꿈이었다.
깨어난 뒤, 그 꿈을 꾸고 싶어서 여러 번 잠을 자고 또 잤지만 다시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한데 이런 곳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고개를 들어 루의 얼굴을 바라보자, 머릿속에 남아있던 신데렐라의 왕자님과 모습이 겹쳤다.
"...왕자님이다."
리리샤가 중얼거리자, 루가 웃었다.
"신데렐라 말인가요? 공주님은 변하지 않았네요. 여전히 신데렐라가 좋아?"
"루다. 진짜 루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루밖에 모른다. 유모도, 마리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아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잖아요. 내가 루라고."
"...."
겹쳐진 두 개의 손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루...."
"네, 공주님."
"루...."
"공주님, 그렇게 혼자가 힘들었나요?"
"루...."
"알아요, 공주님. 내가 보고 싶었다는 거. 저택을 뛰쳐나가 나를 찾으려고 했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루...."
루가 리리샤를 가만히 끌어당겨 안고 등을 토닥였다.
"다녀왔어요, 공주님."
"우왕! 루...루...."
어릴 때처럼 머리를 들이밀고 두 팔로 힘껏 루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매일 꿈에서 루를 봤어요. 동그란 눈이 달처럼 휘어지면서 웃는 얼굴을 매일 보았다.
잊어버리면 어쩌지, 걱정했지만 꿈에서 항상 보았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꿈에서 종종 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정말 무서웠다.
이대로 영영 잊어버리게 되면, 하고 생각하면 한밤중에도 벌떡벌떡 잠에서 깨어났던 거야.
엉엉 울면서 그런 말을 두서없이 하는 동안, 루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루는 여전히 루였다.
하지만 역시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루의 가슴에 닿았던 머리가 지금은 허리께의 배 아래에 묻어 있다.
루가 너무 커진 건지, 아니면 리리샤가 크지 않고 작은 건지, 다른 아이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마리가 종종 [공주님은 너무 크지 않는 군요, 더 먹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 작은 축에 드는 걸까.
한참을 울다가 머리를 드니, 루의 옷은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약간 미안하다.
리리샤는 머쓱한 걸 숨기면서 말했다.
"...흑, 흑...루, 이제는...흑, 가지 마...계속 함께 있어...."
루가 어디에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수건으로 리리샤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공주님. 그건 안 돼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후궁에 있을 수 없거든요."
수그러들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루가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주 올게요. 낮에 오는 건 괜찮으니까요. 전처럼 여러 날 오지 못하는 일은 없어요."
리리샤는 고개를 마구 옆으로 저었다. 떨어지는 것은 싫어. 이제 함께 있고 싶다. 다시는 루가 없어져 쓸쓸했던 때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루에게 달라붙어 울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리리샤 공주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디님은 공주님의 약혼자, 앞으로 계속 함께 시니까요."
"페헷?"
깜짝 놀라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루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매번 그녀를 잡던 시종과는 다른 시종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지만 시종이다. 옷도 비슷했지만 표정이 똑같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시종은 모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약혼자? 그게 무슨 소리야.
리리샤가 멍해 있는데, 시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 루디님은 황궁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고 모레노 공작이 되셨습니다. 앞으로 루디님은 공식 석상에서 루디 콘스탄틴 리리에 사루바니 모레노 공작으로 불리게 되십니다."
길다.
그러고 보니 남작 부인이 전에 왕족과 귀족의 이름은 굉장히 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간 이름은 아버지,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어머니, 아니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까지 끼워 넣어 만든다고 했다.
리리샤가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을 알았는지, 시종이 설명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중간 이름인 콘스탄틴은 리리샤님의 아버지이신 폐하의 성함이고, 리리에는 루디님의 생모님 이름입니다. 뒤에 있는 사루바니는 황실의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서 황족에 준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사람이 받는 이름이지요."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리리샤가 말로 한 것도 아닌데, 시종이 알아들은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그레 웃었다.
시종이 웃는 거 처음 봤다.
깜짝 놀라 눈을 깜박거리는데, 시종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은 아직 어리시니 모든 걸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지금은 그저 모레노 공작이 리리샤 님과 혼인하여 다음의 황제가 되시는 분이라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지금은 약혼자라는 입장이시지요."
"안 돼!"
리리샤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는 리리샤의 약혼자가 될 수 없다. 약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공주님, 내가 싫은 가요?"
루가 약간 놀란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싫은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야.
리리샤는 남작 부인에게 들었던 설명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루에게 말했다.
"약혼하면 여자는 열다섯 살이 될 때 남자 나라하고 집에 가는 거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가는 거야. 공주는 다 그렇대. 하지만 그건 절대로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유모나 마리처럼 가까운 사람이 큰 벌을 받는대요."
시종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루가 손을 들어 못하게 했다.
루가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요?"
"루는 나랑 유모랑 마리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다시 멀리에 가는 건 싫어. 그러니까 약혼할 수 없어. 미안해요."
리리샤는 약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다섯 살이면 몇 년도 남았잖아."
루가 작은 소리로 웃으며 리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게 자랐어요, 우리 공주님은. 조금 말괄량이가 되기는 했지만."
칭찬은 아닌 것 같다.
리리샤가 입을 삐쭉거리며 얼굴을 올리자, 루가 처음 보는 낯선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말을 걸기가 어려워졌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공연히 발로 바닥을 긁었다.
루는 어릴 때처럼 리리샤의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약혼자가 되어도 나는 계속 이곳에 다닐 수 있어요. 공주의 약혼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 거니까요."
"정말? 항상 함께야?"
리리샤가 묻자, 루가 반짝거리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 앞으로는 항상 곁에 있을 거예요. 물론 밤은 안 되지만요."
시종에게 들리지 않도록 리리샤의 귀에 입술을 대고, 루가 속삭였다.
"대신 밤에는 마법이 공주님 곁을 지켜줄 거예요."
그것보다는 루가 옆에 있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조금 전까지 허공을 뛰어다니던 마법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가 왕자님처럼 손을 잡고 그녀를 앞으로 살짝 당겼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갈까요, 공주님?"
빵과 보자기를 챙기려고 하자, 시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빨리 그것들을 주웠다.
저택을 나올 때는 굉장히 힘들게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저택 입구로 들어가자, 마리와 유모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사실은 비명이 아니라 루의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크고 째지는 것 같은 소리라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 뒤에 뛰어나온 나디아 마마가 눈물을 흘리며 두 팔을 벌렸다.
"리코!"
루가 나디아 마마와 유모, 마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시종이 보자기를 내밀지만 않았더라면, 기쁨 속에 그날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 없는 시종 때문에 유모의 눈이 뱁새처럼 올라갔다.
큰일났네.
마리가 보자기를 풀어 보더니 굉장히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빵을 이렇게 버리다니."
버리는 거 아니야. 먹을 거야.
그렇게 말하려다 유모가 나디아 마마에게 회초리를 가져다주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루, 나 좀 도와줘!
< 약혼자 > 끝
(78)
작가의 말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