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77화 (77/201)

< 넌 누구야! >

#077

귀족 남성의 나긋한 대접에 익숙한 여성은 황제의 큰 몸집과 강한 언동에 겁을 먹는 경우가 많다.

후궁 중에도 지나치게 황제를 두려워하는 여성이 있었다.

때로 황제에게 몸을 열면서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아름다운 청년을 그리워하거나, 남몰래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이도 있다.

하지만 황후는 악당 같은 황제의 얼굴을 사랑했다. 비정할 만큼 강한 결단력도, 때로 지나치게 잔인해지는 저 남자의 성격도, 모두 황후에게는 사랑스러웠다.

'폐하.'

그 모습이 몇 년 사이 온데 간데 없어졌다.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만큼 이전과는 다르다.

건장하던 몸집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앙상해지고, 두툼하던 뺨의 살은 움푹 꺼져 퀭해졌다.

입술도 바싹 말라 허옇게 뜬 부분이 보였다.

빡빡하게 들어차 있던 머리카락도 엉성해져, 그 사이로 두피가 드러났다.

예전과 다름없는 것은 오직 눈빛 하나뿐이었다. 강렬하게 사람을 쏘아보는 눈동자만이 여전하다.

문득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에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가려다 문득 멈추었다.

뭔가 위화감이 있다.

옆의 금색 아이를 유심히 보자, 휑하게 빈 목이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가....'

금색 노예의 증거인 목걸이가 없었다.

노예는 반드시 목걸이를 해야 한다.

비록 황제의 노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노예가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으면 당장 베어 죽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이의 목에는 노예 목걸이 대신 가슴까지 길게 내려오는 굵은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장식이 달려있는지, 목걸이가 가슴 아래로 뾰족한 모습을 그리며 축 늘어졌다. 무엇인지는 화려한 레이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우연인 것처럼, 황제의 손이 아이의 가슴께에 닿았다.

황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이 옷을 건드리면서 레이스에 가려져 있던 장식이 허공으로 나와 흔들렸다.

목걸이에 걸려 있는 것은 인장용 반지였다.

"!"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황후는 저 반지와 비슷한 모양의 것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받지 못했던 공작가의 반지와 비슷하게, 아니 똑같이 생겼다.

없어진 노예 목걸이와 아이의 목에 걸려 있는 인장 반지, 코레아 공주를 꼭 닮은 외모.

황후는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함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문득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황태자가 너무 평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반지는 황태자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데 어째서 화를 내지 않는가. 어째서 이 아이는 이토록 침착하지?

고개를 돌려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태자는 얼어붙은 듯 창백한 얼굴로 황제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 자신처럼 놀란 얼굴은 아니다.

'알고 있었구나.'

아들은, 로베르토는 황제의 생각을 미리 알고 있었다.

황후는 아들의 행동을 되짚어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아이가 언제 그녀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경고했었던가. 이 아이는 언제부터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

그래, 분명히 남편이 갑작스레 자신의 방에 방문했던 몇 년 전부터였다.

그 무렵 로베르토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공식 행사에는 나갔지만 개인적인 면회나 후원자들을 만나는 일은 가급적 줄였다.

자신이 황태자가 된 듯 떠벌리며 위세를 떠는 2황자에게도 조용히 시선을 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다는 듯한 시선을 몇 번 주었을 뿐이다.

황후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늘어선 귀족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깜짝 놀란 모습이지만, 몇몇 황실과 연관이 깊은 가문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속았다.

깊은 밤 속삭이던 사랑의 말도, 후원을 거닐며 미소짓던 그 얼굴도 거짓이다.

다정한 눈빛과 때때로 보내주던 꽃다발, 시종이 아닌 황제 스스로 손수 선택해 보낸다던 보석과 편지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고 달콤한 말로 구슬려 저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뿐이다.

웅성거리는 가운데에서 인장 반지에 대한 말이 소곤소곤 들려왔다.

그 안에는 폐세자라는 단어도 섞여 있었다.

황제가 아이의 팔을 잡고 천천히 걸어와 황후의 앞에 멈췄다.

"황후, 그대의 아름다움은 여전하구려."

"...."

목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약간 숙여 표정을 감추자,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자,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반대편 팔은 아이가 잡고 있었다.

마치 황제, 황후 두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세 사람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앞을 지나가자, 귀족들이 저마다 머리를 숙여 절을 한다.

그 뒤를 황태자와 황자들이 따르고, 절을 마친 귀족들이 순서대로 줄줄이 따라왔다.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궁 앞에 마중을 나오게 한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고 미소를 보인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시녀와 보좌관들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 안쪽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듯 운다.

사랑했다.

십대 중반에 시집와, 자신은 이 나라의 사람이 된 생각으로 살아왔다.

남편을 위해 그녀의 모든 시간을 사용했다.

황후이기 전에, 먼저 여자로 그 남자를 사랑했다.

긴 인생에서 단지 몇 달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바치는 그 사람을, 더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만큼의 사랑이 증오로 변해 간다.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가슴속에 있던 것들이 모래처럼 흩어져 텅 비어 버린 것 느낌이었다.

***

안 돼, 안 돼. 너무 많아. 이건 빼고, 아, 여기에는 이상한 초록색이 생겼어.

리리샤는 다시 한 번 보자기를 펼쳐 확인한 뒤 사방 귀퉁이를 한데 모아 묶었다.

염소가 곁으로 다가와 울음소리를 내며 보자기 끄트머리를 질근질근 씹는다.

"저리 가! 이건 네가 먹는 게 아니야."

리리샤가 화를 내며 염소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씨름을 하다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버리려던 빵을 염소 입에 꾹꾹 밀어 넣었다.

빵은 싫은 듯 고개를 외면하던 염소가 어쩔 수 없었는지 발로 바닥을 거칠게 치면서 떠나갔다.

다른 때는 곧잘 리리샤를 도와 염소를 쫓아주던 마법들이 오늘따라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오히려 염소를 위협해 리리샤 쪽으로 다시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바빠 죽겠는데."

리리샤는 유모가 매일 하는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다들 나보다 바보니까.'

어쩌면 리리샤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가끔 남작 부인의 말을 리리샤가 모르겠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오리가 뒤뚱뒤뚱 걸어왔다.

가까이 와서 날개를 펼치며 꽥꽥 소리를 낸다.

"왓!"

깜짝 놀라 풀쩍 옆으로 뛰었다.

그 바람에 겨우 묶는 게 끝나던 보자기 한쪽이 풀어졌다.

"아, 정말. 바쁘다니까."

리리샤는 울상이 되어 삐져나온 빵을 꾹꾹 밀어 넣고 다시 보자기를 당겼다.

최대한 많이 가져가려고 담았더니 묶기가 힘들다.

간신히 다 매듭지은 뒤 짊어지려는데, 이번에는 너무 무거워서 등에 멜 수가 없었다.

"이걸 빼면 한 번 굶어야 하는데."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리리샤는 코를 훌쩍거리며 보자기를 풀어 빵을 두 개 뺐다.

그래도 멜 수 없어서, 결국에는 절반 정도를 덜어내야 했다.

"흑, 흑, 굶어, 굶어야 해, 이렇게 다 빼면, 나는, 정말, 거, 흑, 흑, 거지가 될 거야, 끅, 끅."

바닥에 버려진 빵을 보니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다.

리리샤는 통곡하듯이 엉엉 울면서 보자기를 등에 업고, 긴 끈을 뒤로 돌려 보자기와 함께 앞으로 매듭지었다.

허리에는 나무 컵과 신발 넣은 주머니를 끈에 매달아 묶었다.

빵을 버린 게 너무 아깝지만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하다.

리리샤는 몇 걸음 걷다 발을 멈췄다.

허리에서 딸랑거리는 나무 컵 때문에 뼈가 아프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옆구리 바로 밑에 딱딱한 뼈가 있었다.

게다가 무거워!

하지만 컵이 없으면 물을 먹을 수 없다.

리리샤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근데 물은 어디에서 받지?'

물 마도구는 가져갈 수 없다. 그걸 가져가면 유모한테 정말로 크게 혼날 거다.

그래서 컵만 가져가기로 했는데, 물 받는 곳을 모르겠어요.

'어쩌지.'

끙끙거리며 고민해 봤지만 물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일단 나가보자.

리리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 나무 컵!

뼈가 아프다.

리리샤는 허리의 끈을 풀어 나무 컵을 뺐다. 이건 손에 들고 가는 게 좋겠다.

오리가 꽥꽥거리며 쫓아와 보자기를 물려고 했다.

"저리 가!"

나무 컵을 들고 화를 내 오리를 쫓아 버리고 씩씩하게 저택 입구로 향했다.

아주 조금 걸었는데, 벌써 등이 무거운 것 같다.

리리샤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옷소매로 쓱쓱 닦고 밖에 누군가가 없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어. 시종은 언제나 안 보이다가 불쑥 나타나니까.

잠시 기다려서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미리 알아놓은 길로 향했다.

처음에는 엎드려 기어갈 생각이었지만, 등의 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 몸을 구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빨리 가야 해.'

시종이 밥을 먹으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금방 돌아올 거야.

리리샤는 눈에 힘을 주고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 멘 보따리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신발주머니가 연신 옆구리를 때렸다.

아프다.

신발 밑창이 딱딱해서 그런가. 굉장히 아팠다.

게다가 저택이 아직 보이는 거리인데도 벌써부터 힘들다.

'조금만 더.'

리리샤는 멀리 보이는 나무를 목표로 달렸다.

점점 등에 진 보따리가 무거워졌다.

혹시 뭔가가 올라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출발할 때 짊어진 보따리와 똑같다.

다리가 점점 느려지고, 가슴 가득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쉴 수는 없어.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목표했던 나무에 도착했다.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저택이 작게 보였다.

이런 거리까지 시종에게 들키지 않고 온 것은 처음이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리샤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숨을 들이쉬는 게 이렇게 힘든 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더 구부러지면서, 보따리에 들어있던 빵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

보따리가 머리 위로 흘러내린다. 어깨를 가로질러 묶었던 끈이 위쪽으로 이동하면서, 팔이 꺾어질 것처럼 위로 따라 올라갔다.

"앗! 앗! 앗!"

팔이 빠질 것 같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가는 걸 아는데 멈출 수 없었다. 몸을 가눌 수 없다.

리리샤는 나무 컵 든 팔을 허우적거리며 머리를 땅에 박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입에서 오리 울음 같은 꽥,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팔이 위로 꺾일 듯 올라간 상태지만 내릴 수 없었다. 보따리와 끈으로 몸이 꽉 묶인 상태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루를 만나기는커녕 이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채 죽어버리게 생겼다. 이제 리리샤는 어떻게 하지.

"루우, 루우, 아파."

그저 루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왕왕 울면서 엎어진 채로 통곡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애들이 난리를 치길래 서둘렀는데,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어, 이 목소리는?'

기억에 남아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리리샤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조금 더 가느다랗고 예쁘고 높았다.

하지만 비슷하다.

"...루?"

울먹이는 목소리로 묻자,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요, 공주님. 잊어버리지 않았네요."

너무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리리샤가 눈을 깜박거리는데,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갑자기 사라졌다.

팔을 꽉 붙잡고 있던 끈도 순식간에 풀렸다.

약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겨드랑이에 들어와 번쩍 일으켜 세웠다.

기억에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공주님, 오랜만이에요."

여러 번,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구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반짝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었다.

그 위에서 마법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빠르게 통통 튀듯 날아다녔다.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목소리는 분명 루와 비슷했는데,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누, 누구야! 루는 어디로 갔어!"

"공주님, 내가 루예요."

곤란한 듯이 남자가 웃는다.

하지만 루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크지 않아. 조금 더 작고 얼굴도 조금 더 동그랗다. 더 귀엽고 예쁘다.

손가락도 달랐다. 리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의 손가락은 이 사람의 것보다 반 이상 작다.

무엇보다도, 루가 이마에 마법을 걸어줄 때의 입술이 아니다.

리리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넌 누구야!"

< 넌 누구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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