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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71화 (71/201)

< 루의 마법 >

* * *

황후는 황후로써 괜찮은 사람이다.

주위도 잘 살피고 황제를 잘 뒷받침해준다.

황제가 여러 후궁을 두고 사랑해도, 그것이 황실에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후궁들이 아이를 낳았을 때 축하와 선물을 하고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조언을 할 정도의 아량은 가지고 있었다.

국정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아군을 만드는데 능숙하고, 외국 대사나 부인들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을 잘 눈치채 황제에게 여러 번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황후로서 잘 해 나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디아그라만이 안 된다. 허용하지 못하고 감정적이 되었다.

황후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싫어했던 것 같다.

어린 소녀였던 나디아그라를 이미 잊혀진 후궁들이 사는 건물의 가장 후미진 곳에 넣고, 후궁이 참여하는 연회나 다과회 자리에 나오는 것조차 나이를 이유로 금했다.

나디아그라가 성인이 될 때까지 황제의 눈에 한 번도 띄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총애하더라도 여자에게 빠져 국정을 등한시하거나 황후를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황후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데도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레이놀드는 황후의 마음을 모른다.

“···.”

레이놀드는 황제가 맡긴 봉서를 품에 넣은 채 후궁으로 향했다.

황제가 없는 황궁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은 황후다. 그녀가 뭔가 하려고 할 때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 황제는 레이놀드에게 황궁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고 떠났다.

후궁은 황후의 세상이지만, 동시에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안에 있는 것.

어떤 경우에도 황제의 권위를 침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걸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상황이 그래야만 한다면, 황제는 망설임 없이 황태자를 죽일 것이다. 황태자든 황자든 황녀든 아무 상관 없다.

그러나, 황제는 따로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친 아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해야 할 일이면 하지만 내키지는 않는 거다.

황후를 어딘가에 평생 유폐해 두고 싶지도 않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지요 조강지처가 상황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황후는 황후로써 살다 죽을 것이다.

비록 황태자가 폐태자가 되어도, 리리샤 공주가 미래의 황후가 되더라도, 나디아그라가 황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한낱 후궁으로 조용히 살게 된다.

그러니 황후가 조금만 자존심과 욕심을 버리면 된다.

그렇지만 이 봉서를 꺼내,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위해 자신을 눌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황후는 분노할 것이다. 반드시 나디아와 리리샤 공주를 제거하려고 한다.

엔리코 황자 때, 황제는 한 번 눈을 감았다.

황자를 죽인 시녀는 본래 황제의 신변을 돌보던 사람이다.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디아그라의 신변에 가깝게 두었다.

하지만 여자는 혼인하면 처지가 바뀐다. 남몰래 조사해본 결과, 그녀의 시집에 문제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얽히고 설킨 가운데 황후의 강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자가 죽은 것이라 여기고, 황제는 그 일을 들추지 않고 그냥 덮었다.

어차피 엔리코는 죽었다. 살아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황후의 잘못을 들춰 시끄럽게 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실은 황후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이놀드는 혀를 차고, 마부에게 서두르라고 지시했다. 평상시와 달리, 마차가 덜컹거리며 요란하게 달려나갔다.

‘기껏 엔리코 황자의 일을 없었던 일로 해주었는데···.’

두 번째는 안 된다.

이번에 황후가 손을 쓰면, 황제는 물러설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선 기분으로 황후를 제거할 것이다.

“서둘러라!”

다시 한 번 마부를 재촉할 무렵, 겨우 나디아그라 비의 처소가 모습을 보였다.

* * *

황후마마의 시녀들은 전에도 온 적이 있다.

굉장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이라, 절대로 거스르면 안 된다고 유모가 신신당부했다.

백작 부인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공작 집 영애라든가, 아무튼 높다고 한다.

비마마보다 높으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 곤란해 했지만, 어쨌든 비마마도 거스를 수 없는 것 같았다.

황후의 시녀가 오면, 마리는 재빨리 이 저택에서 나가 뒤뜰의 가축 우리 쪽으로 가버렸다.

원래 노예가 집안에서 살면 안 되는 거라고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노예라 그렇다고 유모가 대답했다.

이상하다.

어째서 노예는 집안에 있으면 안 돼?

마리는 항상 집안에서 있는데?

그렇게 자꾸 물어보자, 유모는 얼굴이 파랗게 되더니 그런 말을 황후 마마나 시녀 앞에서 하면 큰일 난다고,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 마리는 당장 끌려나가 굉장히 많이 맞은 뒤에 다시는 이 저택으로 오지 못한다고 한다.

너무 이상해서 또 물어보려고 했지만, 마리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대신 루를 구해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어릴 때는 매번 돌멩이 두 개만 들고 뛰쳐나가곤 했다.

그때마다 시종에게 잡혀왔다. 그때는 더러운 눈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그들이 시종이라는 걸 안다. 유모가 가르쳐줬다.

시간이 흐르고, 루를 루디라고 발음할 수 있게 될 무렵에는 돌멩이 두 개만 가지고는 루한테 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저택 밖은 넓다.

너무 넓어서 루를 찾으려면 여러 날이 걸린다.

그걸 알게 된 뒤로는 빵과 육포를 몰래 정원에 숨겨 놓고 있다. 오래 되면 이상한 게 생겨 썩어버린다. 담장 근처에 버려두면 닭과 오리가 와서 먹거나 벌레들이 먹었다.

그렇게 버리고 새로 숨기고 하는 동안 음식은 자꾸만 늘어나, 지금은 손으로는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래서 조금 고민이에요.

아, 물론 옷도 두 개 숨겼다.

이불도 가지고 갔으면 좋겠지만 너무 커. 리리샤 손으로는 들고 갈 수 없다.

하지만 괜찮아.

루가 리리샤에게 준 마법들이 도와준다.

이불이 없어서 추워지면 마법들이 몸을 덥히고, 어두워지면 불을 밝혀줄 거야.

그러니까 리리샤가 할 일은 그저 음식을 준비하고 시종에게 들키지 않고 도망갈 길을 찾는 것뿐이다.

아직 시종이 모르는 길을 찾지 못했지만 멀지 않아 알아낼 것 같다. 어제는 저택에서 약간 멀리까지 나가봤지만 시종이 쫓아오지 않았다.

이제 가방에 음식과 옷, 돌멩이를 챙겨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마리, 기다려 줘.

루를 데려올게.

그리고 물어볼 거야. 왜 마리는 노예인지? 왜 마리가 집에서 사는 걸 말하면 안 되는지···.

그때까지 리리샤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 아무에게도 마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리가 저택 안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또 가끔은 트림해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도 말하지 않아. 비밀이니까.

하지만 황후 마마의 시녀들이 이번에 와서 물어본 것은 마리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리리샤에 대한 것이다.

코가 뾰족하고 눈이 지렁이처럼 가느다랗게 된 시녀가 리리샤 앞에 서더니 물었다.

“그대가 리리샤 공주님입니까?”

예전에 유모가 백작 부인이라고 가르쳐주었던 여자다.

이 여자가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다.

오래 전에 유모는 이 여자한테 맞아서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

‘때려 줄까?’

리리샤는 잠깐 생각했다.

누군가한테 맞으면 때려줘야 한다. 안 그러면 얕잡아 본다. 오래 전에 오리한테 얕잡아 보인 뒤, 리리샤는 한동안 계속 놈한테 쫓겨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작부인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때리려고 했던 걸 알아차린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른 시녀들이 앞으로 나오더니 리리샤의 양팔을 잡았다.

백작부인 시녀가 지렁이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황후께서 다과회에 초대하셨습니다. 잠깐 가시지요.”

“···?”

시녀들이 리리샤를 데려가려고 하자, 유모가 깜짝 놀라 리리샤를 끌어당겼다.

“용서하세요, 백작부인! 리리샤 공주께서는 아직 어립니다.”

“그대는 우리 황후께서 뭔가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 미천한 후궁의 몸에서 난 공주 따위에 우리 황후께서 무얼 하시겠는가. 그저 불쌍한 마음에 차 한잔의 시간을 주려 하시는 것 뿐이건만!”

백작부인 시녀가 무서운 눈으로 유모를 노려보았다. 유모는 부들부들 떨면서 리리샤를 끌어안고 계속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주께서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십니다. 차에 초대되어 함께 할 만큼의 예절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아요. 용서하십시오.”

“그렇다면 더욱 황후께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미천한 교육밖에 받지 못한 공주에게 친히 가르침을 내리시겠다고 하시는데.”

백작 부인 시녀가 코웃음을 쳤다.

리리샤를 안은 유모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알았다.

저 백작부인은 나쁜 사람이다.

유모의 당부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화가 났다.

리리샤는 다리를 앞으로 확 내밀어 백작 부인 시녀의 치마 밑으로 넣었다. 발을 밟으려고 했다.

하지만 짧아! 다리가 짧아!

딱딱하고 둥근 코르셋에 부딪쳐 치마 중심까지 리리샤의 발은 닿지 않았다.

“감히! 이런 상스러운 짓을 하다니! 대체 어떤 교육을 시켰길래.”

백작 부인 시녀가 화를 내며 손을 휘두른다.

뺨을 맞을 뻔 했지만 유모가 몸으로 리리샤를 덮는 바람에 피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백작부인 시녀가 데려온 여자들이 달려들어 유모를 떼어내고 리리샤를 다시 붙잡았다.

소란을 듣고 안쪽에서 자고 있던 비마마가 나왔다. 백작부인 시녀보다 비마마가 위일 텐데, 고개도 숙이지 않는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백작부인 시녀는 차가운 얼굴로 리리샤를 다시 보더니 데려오세요, 라고 말하고 몸을 돌렸다.

백작부인의 부하 여자들이 리리샤를 질질 끌고 거실에서 나간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텨봤지만 소용없었다.

비마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놓아! 놓아요! 그 아이를 데려가선 안 돼. 그 아이는 이곳에 사는 아이야.

유모가 몇 번이나 비마마가 리리샤의 어머니라고 말했지만, 역시 아닌 것 같다. 비마마는 한 번도 리리샤를 딸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났다.

리리샤는 자신을 끌고 가는 여자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고작 치마를 쳤을 뿐이지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리리샤의 오른팔을 잡아 끌던 여자가 비틀거리고 넘어졌다.

그러자 밖으로 나가려던 백작부인이 홱 몸을 돌려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 망나니 같은! 황후께서 나를 그대의 예절 선생으로 삼기로 하셨습니다. 일주일 뒤부터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군요. 지금 당장 그대의 버릇을 고쳐놓아야겠어요.”

리리샤 바로 앞까지 온 백작 부인의 지렁이 눈이 옆으로 쭉 찢어지더니, 팔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나이 많은 시종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소동입니까!”

“시종장님!”

백작부인의 부하 여자들이 재빨리 무릎을 굽혀 인사한다.

하지만 백작부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손을 내리치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맞는다.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리리샤의 치마 속에서 파직파직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들이 리리샤 치마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왜인지 화내고 있다.

누군가가 “앗!”하고 소리쳤다.

뭔가 싶어 눈을 뜨는 순간, 백작 부인이 기우뚱하더니 뻣뻣하게 몸이 굳으며 쓰러졌다. 꼭 마리가 매일 뒤쪽에서 도끼로 패는 딱딱한 나무 조각 같았다.

백작 부인은 바닥에 쓰러져 잠시 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다.

무섭다.

안 그래도 시끄럽던 실내가 비명소리와 고함으로 가득 차고,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난리통 속에서, 리리샤는 눈을 크게 뜨고 백작 부인의 치마 끄트머리를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거기에서 마법이 반짝, 하고 작은 불을 낸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지도 몰라. 너무 잠깐이었다.

“···.”

잘못 봤던 거겠지. 그래, 그렇다.

루의 마법들은 지금까지 리리샤 외의 사람에게 다가간 적이 없다. 사람의 근처에 가는 것은 오직 리리샤 한테만이다. 사람이 있을 때는 항상 어디론가 숨어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유모가 리리샤를 끌어 당기더니 빙글 몸을 돌리게 했다. 리리샤는 부드러운 유모의 유방에 얼굴을 묻었다.

치마 속에서 루의 마법들이 따뜻한 기운을 만들며 그녀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그제야 몸이 떨리고 무서운 것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우와아앙!”

울음이 터진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 속에 자신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무서웠다. 정말로 무서웠어요. 그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다.

왕왕 우는 동안, 시종들이 백작 부인을 밖으로 데려가고 황후의 시녀들도 없어졌다.

조용해진 가운데, 비마마가 다가와 유모와 리리샤를 한꺼번에 부둥켜 안았다.

비마마도 운다.

잠시 뒤에는 마리도 들어왔다.

리리샤를 가운데에 두고 여자들끼리 한데 뭉쳐서 한참 동안 울었다.

< 루의 마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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