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69화 (69/201)

< 당신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

* * *

황제도, 보리스도, 특별히 이 행렬의 목적지가 어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특히 보리스는 지금까지 딱 붙어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것과 달리 행렬에 참가한 뒤에는 거의 말이 없다.

사람들의 전면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항상 루디와 황제 근처에 그림자처럼 머무르며 가끔 사방을 향해 시선을 줄 뿐이다.

어쩌면 호위를 하는 걸까.

하지만 황제를 보호하는 건지, 루디를 지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눈이 맞으면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잡히며 히죽 웃는 얼굴이 되었다.

멋진 그레이 신사라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건가 싶다.

루디가 삼십 정도 된 여자였다면 분명 가슴이 설레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나중에 늙으면 황제 말고 저런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행렬은 황궁이 있는 커다란 도시를 행진하듯이 한 바퀴 빙 둘러 천천히 움직였다.

이 도시에 처음 올 때, 루디는 노예가 빼곡히 들어찬 마차에 들어가 제대로 거리를 둘러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황궁에 들어갈 때는 밖을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런데 신경 쓸 만한 여력도 없었다.

이 도시를 보는 건, 그래서 지금이 처음인 셈이다.

거리를 메운 사람들 중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자도, 누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깨끗한 편이었고, 상점이 가득한 거리로 들어서면 활기가 가득 찼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옷차림의 여행객도 많다.

행렬은 시장이 있는 거리도 지나갔는데,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국의 물건을 파는 소년들도 보였다.

행렬에서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보수중인 건물이 간간히 보였다.

너무 낡아서가 아니다.

수리중인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예쁘고 깨끗하게, 혹은 증축하는 걸로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몰려온 군중 속에는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황제를 향해 과일이나 빵, 또는 손수 자수한 뭔가를 바치려고 허공에 쳐드는 사람도 많았다.

황제는 그런 국민에게 손을 들어 주거나 가끔 말을 타고 행렬 가까이 온 사람들 곁으로 향했다.

주로 아이들이 행렬에 접근했을 때다.

커다란 배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그때마다 군중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황제 폐하 만세라는 소리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이 뚱뚱한 황제가 이 나라 국민에게 사랑 받고 존경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행렬에 있는 병사들은 빈틈없이 사방을 경계했지만, 황제가 군중에 가까이 갈 때에는 특별히 백성에게 무기를 겨누거나 근접하지 않았다.

그때는 병사가 아닌 시종들이 황제의 곁에 바짝 붙었다.

레빈을 가르치고 있다는 시종도 그 안에 있는 걸 보면 아마 호위를 겸한 사람들일 거다.

문득, 정신없이 탈출할 때 보았던 디코콰리아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이 거리와 겹쳐졌다.

가슴 한편에 쓸쓸한 바람이 지나간다.

‘그곳에서 본 거리와 이 나라는 이렇게나 다르구나.’

이 화사한 거리가 루디에게 자신들의 행복을 과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문득 보리스가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국민에게 가장 최악인 통치자는 포악한 사람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적의 군마가 내 나라를 짓밟게 하는 군주야말로 국민에게 가장 나쁜 통치자다.]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 직접 겪어 보니 확실히 알겠다.

루디가 쓸쓸히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황제가 반 쯤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한 손을 내밀어 그를 부른다.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가자, 황제가 말했다.

“너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구나. 또래를 만나볼 기회가 없었을 테지. 한 번 가까이 가 보아라. 저 아이들이 말하는 걸 내게 전해 다오.”

“···예, 폐하.”

루디가 말하자 언제 왔는지 보리스가 팔을 내밀어 그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루디가 군중을 향해 걷자, 아무렇지도 않게 보리스가 옆에 붙으며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자연스러운 태도였지만, 의식하고 보면 역시 보리스는 루디를 호위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자,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생겼다.

“금색 노예다!”

“폐하의 금색이다.”

웅성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이 루디에게 쏠렸다.

비슷하거나 루디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은 아이들은 루디의 목걸이가 신기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슬쩍 손을 내밀어 본다.

“예쁘다.”

“황제님이 준 거야?”

“너는 황궁에서 살아?”

“여자야, 남자야?”

누군가가 당황해서 아이들에게 나무란다.

“이놈들! 이분은 황제 폐하의 것이구나.”

“함부로 만져서는 안 돼!”

하지만 아이들에게 주눅이 든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어른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루디에게 바짝 다가섰다.

병사들도, 보리스도, 근처에 있는 시종들도 제지하지 않는다.

황제가 자주 아이들과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정말로 이 나라와 디코콰리아는 다르다.

루디는 황제가 자신을 아이들에게 보낸 이유를 짐작하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몇 가지 이유야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아마 두 가지일 거다.

하나는 황제 자신이 국민 대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경험으로 가르치는 것, 다른 하나는 아마 이 나라 국민에게 루디가 애착을 갖게 하려는 것.

어른과의 대화에서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진짜 또래인 아이들과 있으면 위장하기가 어려웠다. 가짜는 진짜 옆에 서면 금방 제 모습이 드러나 버린다.

루디는 이상한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이들과 몇 마디를 나누었다.

별것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저 황제 옆에 있는 루디가 궁금했던 것 같다.

그가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황제는 행렬 반대편에 있는 군중에 손을 흔들거나 가볍게 말을 몰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황궁에서의 거만하고 가식적인 모습과 달리, 군중 속에 있는 황제는 소탈해 보였다.

루디가 잘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가끔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

천천히 움직이던 황제의 행렬이 마침내 제일 바깥에 있는 외부 성문을 지났다.

백성들 상당수가 바깥 성문까지 쫓아와, 행렬은 황제의 것보다 그 뒤에 딸린 일반 평민의 줄이 더 길어져 있었다.

“항상 이런 가요?”

루디가 뒤를 향해 묻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제께서는 틈이 날 때마다 백성들을 보러 나가시지. 다른 지역에도 곧잘 다니시지만,  황궁이 있는 수도는 유달리 국민과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다.”

보리스가 씨익 웃었다.

“오늘은 네가 있어 사람들이 더 소란이구나. 황제 폐하와 함께 있으면 다른 의미로 매우 눈에 띄니까 말이다.”

외모를 말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지옥에서 쫓아온 산타클로스와 요정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도시를 나온 뒤, 황제는 잠시 동안 마차에 들어가 있었다.

황제의 마차는 매우 커서, 침대와 소파, 식탁을 겸한 책상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루디는 잠시 동안은 거기에 앉아 있었지만, 이내 밖으로 나왔다.

루디가 머물 마차는 따로 준비되어 있다.

황제의 것보다는 작고 책상이나 침대는 없었지만, 의자 부분이 길고 푹신해서 잠자는 데에는 충분했다.

루디의 마차에는 레빈도 함께 머문다.

호위 겸 시종이라는 명목이었다.

잠시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의지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움직임이 멈췄다.

레빈이 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보더니 행렬이 멈췄다고 말했다.

식사 시간을 갖는 모양이다.

레빈과 함께 마차에서 나오자 시종들이 마차에서 음식을 내리고 마도구로 불과 물을 내고 있었다.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기웃기웃했지만, 시종들이 부드럽게 웃으며 쫓아 버렸다.

황제의 이동이라고 하면 반드시 도시에서 머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늘 밤은 야영인 것 같다.

황제는 젊을 때부터 전쟁터에서 뒹굴었기 때문에 야영에 익숙하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고, 시종들이 입을 모아 말하며 웃었다.

가을이다 보니 해가 저물기 전이 되면 날이 추워진다. 곳곳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커다란 들통 같은 냄비가 올라갔다.

내용물이 대체 뭔지 모를, 꿀꿀이죽처럼 생긴 스튜가 여기저기서 끓기 시작할 무렵 황제가 마차에서 나왔다.

항상 입던 번쩍번쩍 빛나는 옷이 아니라, 전쟁터에서나 볼 법한 거친 차림이었다. 황제가 땅에 내려서자 시종이 황제의 어깨에 두터운 모피를 걸쳤다.

황제가 모닥불로 가까이 다가가자, 또 다른 시종이 마차에서 의자를 하나 꺼내 가져왔다.

황제가 병사들 틈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루디를 향해 손짓한다.

가까이 다가가자 루디도, 레빈도, 병사들 틈에 껴앉게 되었다.

황제는 병사와 같은 꿀꿀이죽을 먹은 뒤, 항상 마시는 와인을 들고 여기저기 모닥불을 돌아다녔다.

루디도 덩달아 그 뒤를 쫓아다니며 병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그런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

*

행렬은 제국의 수도를 나와 국경 근처의 변경 도시를 방문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레빈이 말했던 것처럼 국내 시찰인 모양이다.

보리스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느낀 제국은 엄청나게 컸다.

거리가 멀기 때문인지, 변경의 도시는 옷차림이 미묘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곳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아닌가 생각할 만큼 이국적이었다.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변경 도시도 상당히 번화하고 활기찼다.

겨울이 되면 먹고 살기 어려운 집에서 아이들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모두가 잘 사는 것은 아닐 거다.

하지만 어느 곳을 보아도 디코콰리아처럼 헐벗은 곳은 없었다.

일단 도시에 도착하면 그 지방 귀족의 접대를 여러 날 받거나 황실 소유의 저택에서 머물렀다.

황실 소유의 저택에 머물 때도 행렬의 일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에 걸쳐 근처 귀족들이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변경 도시를 전전하는 동안 한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국경의 도시를 반 바퀴 이상 돌았으니 다시 나머지를 돌아 수도로 돌아가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행렬은 오히려 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이동했다.

*

그 무렵에는 변경에 있던 병사들이 합류해, 규모가 조금 더 커졌다.

변경에서 합류한 병사들 중에 마도병이 몇 명 있었다. 마도병은 황제 직속이라고 하는데, 디코콰리아의 전쟁에 동원되었다고 들었다.

“마도병은 어떤 무기를 사용하나요?”

루디가 보리스에게 묻자, 앞서 가던 황제가 몸을 돌리더니 씨익 웃었다.

“그건 나중에 직접 보는 게 좋겠다.”

보리스도 웃으며 그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만큼은 듣는 것만으로는 모르지.”

마도병이라고 한 병사들에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다른 병사들처럼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루디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다, 허리에 피리처럼 생긴 막대기를 차고 다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 가죽 주머니에 들어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한 명이 안에 들은 무기를 보여주었다.

피리와 다른 건, 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마석이 쪼르르 달려있다는 점 뿐이다. 와토린구 공작의 노예가 달고 있던 목걸이와 비슷한 노란색 마석이었다.

다른 나라에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국경에서 크게 시간 끄는 일 없이 순조롭게 통과했다.

*

겨울의 이동은 쉽지 않다. 눈이 내리면 바퀴가 헛돌거나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제국은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도로의 경우 넓고 잘 관리된 편이었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도 못했다.

가급적 사람들이 많이 이용해 안전하다고 알려진 이동 경로를 더듬어 갔지만, 때때로 그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곳도 나왔다.

이쯤 와서야 루디는 이 행렬의 목적지가 디코콰리아, 그것도 와토린구 공작령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노예 마차에 실려 이동했던 곳을, 이번에는 황제의 동행이 되어 반대로 거슬러간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디코콰리아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에 진흙을 바른 것처럼 씁쓸해졌다.

한 발 한 발 그쪽을 향해 이동하면, 그때마다 조금씩 주변이 비참해져간다.

디코콰리아에 접어들자 비참한 모습은 더욱 심해졌다. 들판에 사람의 시체가 버려진 곳이 여럿 나오고, 어딜 가도 비쩍 마른 사람이 보였다.

도시에 들어가도 주변 광경만 달라졌을 뿐,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길거리에는 팔리지 않은 노예가 죽은 눈을 하고 비쩍 마른 나뭇가지처럼 서 있었다.

쇠 목걸이의 짤랑거리는 소리를 울리며 발길질 당하는 사람도 많다.

드물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은 디코콰리아의 국민이 아니었다.

활기찬 제국의 도시와 마음이 죽은 사람들의 나라 디코콰리아.

자기도 모르게 눈이 바닥을 향했다.

앞서 가던 황제가 힐끔 뒤를 보더니 말했다.

“고개를 숙이지 마라. 저 사람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라. 저것이 못난 통치자가 다스린 나라의 국민들이다.”

“···.”

황제가 왜 이 나라에 자신을 데려왔는지 짐작하고 있지만, 그것을 거절할 마음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라든가, 내 나라 국민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큰 손해 없이 내가 가진 힘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모른 척 하는 게 힘들어졌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나라의 국민이었어도 아마 결론은 같았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래 좋다, 이용해라. 나도 그대를 이용할 테니···.

< 당신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 끝

(69)

작가의 말

11/12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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