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하다 >
* * *
황제는 표정 관리에 능하다. 자신의 본심 등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몇 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니 당연할 것이다.
오랜 병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고는 해도, 그런 황제가 기쁜 기색도 숨기지 못할 만큼 마음에 동요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진짜구나, 이 애.’
루디는 확실하게 코레아 왕조의 문장을 가졌다.
오늘 황제가 손가락에 낀 반지는 며칠 전 황궁의 보고에서 찾아 꺼내온 것이다.
오래 전 코레아 왕조가 남긴 보물인데, 소유자가 문장을 가진 사람 몸에 닿으면 반지의 일부 색이 변하며 반짝거린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문장을 판별하는 일일 뿐인, 사실상 쓰레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오래 전 마도구에 능했던 코레아 왕조 사람이 딸의 장난감으로 만들었다던가.
진짜인지는 모른다.
보물 취급하기도 조금 어색해서 황궁의 보고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던 물건이다.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다행이구나.’
시종장 레이놀드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루디가 코레아 문장을 가진 것이, 레이놀드에게는 황제만큼 기쁜 일은 아니다.
자신이 받들어 모시는 것은 나라 자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최고는 황제였다. 형제처럼 함께 자라온 주군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황제는 다르다.
그의 인생은 전 황제에게서 이어져, 보리스가 완성한 ‘제국을 위한 완벽한 황제’.
레이놀드에게 지금의 황제가 최고이듯이, 보리스에게는 전 황제가 모든 것이었다.
그 전 황제가 집념을 가지고 만들어낸 게 바로 지금의 황제.
누구에게도 완벽해 보이는 황제의 인생은 부친이 저승에서 조종하고 있는, 줄 달린 허수아비다.
레이놀드 자신이 이토록 황제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것 역시 아마 그래서 일거다.
마력 많은 황자로 태어난 갓난아기 때부터, 전 황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당신의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길러냈다.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제국을 만들어낼 제국의 일꾼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위해 입 속의 혀처럼 움직이는 금색 노예 보리스를 시켜 육체를 훈련시키고, 마음은 약하지만 충성심 강할 듯한 시종을 골라 형제처럼 자라게 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레이놀드는 자신조차 전 황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전 황제는 누구도 모르는 황제의 슬픔과 어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해, 레이놀드의 감정이 황제에게 기울도록 조종했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되어 있었다.
황제도, 레이놀드 자신도. 모두 제국을 위한 꼭두각시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어차피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다 비슷비슷하다. 먹고 싸고 자고, 가끔 즐겁고 가끔 슬프다.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그러다 늙어 죽는 게 인생일 것이다.
그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이 쓸모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하는데, 누군가를 위해 소중히 사용됐다면 그것으로 된 거지.
거기에 더불어 자신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그래, 돌이켜보면 그 인생에 별다른 후회는 없었다. 누군가가 닦아 놓은 도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해도 그 다리를 움직여 긴 거리를 걸어온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레이놀드는 모처럼 환한 황제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황제의 화장을 맡았던 시종이 루디 앞으로 왔다.
몸을 굽혀 루디의 머리카락을 들춰 얼굴 전체를 확인하더니 수레에서 몇 가지 화장품을 꺼내 제일 위에 두었다.
시종은 루디가 멈칫하는 사이, 천으로 머리띠를 만들어 묶었다.
루디의 머리카락은 깨끗하게 모두 뒤로 넘어가고, 이마와 관자놀이 볼 등에 약간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화장품이 군데군데 칠해졌다.
그 위에 다시 하얀 분이 칠해지고, 다시 부드러운 깃털 같은 것으로 살짝 문질러졌다.
여분의 백분을 떨어뜨려 화장을 마친 시종이 뒤로 물러서 루디의 얼굴이 황제에게 보이도록 했다.
“다른 아이 같구나.”
황제가 말하자, 그 옆에 서 있던 시종장이 빙긋 웃었다.
“얼굴이 둥글어져서 그런지 굉장히 어려 보이는군요. 아주 조금 바꾸었는데도 인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좋아. 그 정도면 됐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화장을 맡았던 시종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황제가 사악한 얼굴로 히죽 웃더니 루디를 보았다.
“앞으로 너는 그 얼굴로 내 옆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반드시 저 시종에게 화장을 받도록 해라. 나는 사악하게, 너는 사랑스러운 요정처럼 만들어줄 것이다.”
“예, 폐하.”
황제가 약간 피곤한 듯 보인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시종 한 명이 의자를 가져와 황제의 뒤에 놓았다.
뚱뚱한 몸을 의자에 기대 앉으며 황제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뚱뚱한 사람은 나이가 들면 허리가 아파서 말이야. 너처럼 어린 아이는 아직 모른다.”
시종장이 황제에게 와인잔을 건네자 한 모금 마시고 루디를 보았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은 내 옆에 있으면서 모든 걸 지켜보는 것이다. 내가 언제 말하고 언제 웃는지, 사람을 상대할 때는 말투가 어떻게 변하는지, 남자와 여자를 상대하는 모습은 어떻게 다른지···.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래, 착한 아이다.”
불쑥 그렇게 말하고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루디의 자리는 황제의 옆에서 반걸음, 혹은 한걸음 정도 뒤라고 배웠다.
시종장은 두 사람의 뒤였다.
황제의 침실은 몇 개의 또 다른 방을 포함하고 있다.
침실 공간 바로 옆에는 비슷한 크기의 거실이 있는데, 몇 명의 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보던 관리들이다.
루디의 얼굴을 보고 약간 놀란 것 같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몇 가지 보고를 하고 다시 지시를 받았다.
급한 일은 대충 정리가 된 모양이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중요하지 않다고 순서가 뒤로 밀린 관리들이 허겁지겁 서류를 챙겼다.
바깥은 여전히 어둡다.
황제는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몇 명의 관리에게 눈짓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루디는 미리 지시 받은 대로 황제의 옆에서 걷는다.
그 뒤로는 시종장과 관리들, 시종이 줄을 지어 따라왔다. 언제 나왔는지 레빈이 제일 꽁무니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짓을 받은 관리가 서류를 손에 꽉 쥔 채 반대편에서 황제에게 설명하며 함께 걸었다. 서류를 보이는 것은 아니고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조항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하지만 이걸 양보하지 않으면 저쪽에서 승복하려고 하지 않고···.”
들어보니 다른 나라와의 수입, 수출 이야기였다. 카니아와 디코콰리아의 전쟁 때문에 그 주변의 농산물 가격이 약간 오른 모양이다.
황제가 몇 마디 하고 그 관리가 물러서자, 이번에는 다른 관리가 옆으로 왔다.
황제는 이런 생활을 몇 십 년 계속해온 건가, 생각하니 기가 질렸다.
루디가 아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는 있지만 고려하지 않는 건지, 황제의 걸음은 굉장히 빠르다.
루디는 다리를 빨리 놀려 총총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잠깐 동안이지만 오늘의 대접으로 확실해졌다.
‘역시 황제도, 시종장도, 어쩌면 다른 시종들도···내가 와토린구 공작의 자식인 걸 알고 있구나.’
인상이 달라지게 화장 시킨 걸 보면 외모에서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공작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라는 건 언제 알아차렸을까.
‘이렇게 옆에 끼고 뭔가를 가르치는 걸 보면 단순히 마력을 짜낼 종마 취급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와 시종장, 그리고 루디 자신과 레빈.
확실히 이 남자, 황제는···. 아니,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제정신인 건가.
문득 와토린구의 가짜 후계자를 노려보던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
마력 소유라는 건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
그 뒤 나흘 동안 황제가 한 일이, 그가 몇 년 동안 지구에서 회사 생활하며 한 일보다 많은 것 같다. 황제야말로 이 세계 전 세계를 모두 합쳐 가장 극한 직업이 아닐까.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 황제가 얼마나 많은 가면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한 명일 뿐이지만, 황제는 사람을 상대할 때마다 약간씩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여자를 대할 때는 조금 달콤해진다.
남자를 대할 때는 무뚝뚝해졌다.
귀족을 대할 때는 거만하다.
관리를 대할 때는 공정한 모습을 보였다.
시종에게는 무뢰배같은 말도 쓸 만큼 편하게 행동했지만, 시녀들에게는 헛된 마음을 품지 않도록 무정하게 대했다.
강한 사람에게는 더 강하게 혹은 야비하게 굴고, 약한 사람은 무시하거나 너그럽게 굴었다.
계속 가혹하게 말하다가도 언뜻 부드러움을 섞고 동정한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럽게 굴면서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든 뒤에, 불쑥 처음에 했던 결정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다리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레 팔이 흔들리는 것처럼, 황제는 그 모든 모습을 힘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꿨다.
나디아 마마에게 보인 모습도 어쩌면 만들어낸 것일까. 새해 연회에서 사악한 미치광이처럼 자신에게 칼을 내밀던 황제의 모습조차도 가면인가.
어느 것이 진짜 황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황제 자신조차도 저 많은 모습 중 진정한 자신이 어느 쪽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구나.’
나흘 동안 수많은 모습을 봤지만 황제가 약세인 걸 목격한 적은 없다.
어쩌면 보지 못했던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진실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시 이틀 뒤, 루디는 황궁을 나서는 긴 행렬에 끼어 있었다.
수십 대의 마차와 엄청난 수의 말이 길게 줄을 이어 황궁을 떠났다.
마차마다 짐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시종장은 황궁에 남고, 대신 보리스가 동행한다.
시종도 여러 명 함께 이동했다.
마차와 말의 행렬 앞과 뒤에는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수많은 병사들이 길게 행렬을 만들어 따라붙었다.
가운데에 황제의 마차가 있지만, 정작 거기에 타야 할 사람은 말을 타고 있었다.
거구의 몸을 지탱하는 만큼, 말의 덩치도 상당히 컸다. 거짓말을 약간 보태면, 다른 말보다 두 배는 큰 것 같다.
도시의 커다란 도로를 황제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동하자, 사람들이 황제의 모습을 한 번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루디의 위치는 황제의 바로 뒤다.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
루디가 타고 있는 말은 얼굴부터 꼬리까지 새까만데, 이마에 하얀 점이 별처럼 박혀 있는 놈이다.
이동하기 직전에 받았다.
영리하고 순하지만,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녀석의 새끼라고 들었다.
털에서 기름기가 차르르 흐르는 것이, 보기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 말인 걸 알 수 있는데 심지어 혈통도 좋은 전투마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 말의 가격은 높다. 기사나 귀족이 타는 말은 더욱 비싸다. 전투마라고 하면 지구의 포르쉐 급으로 가격이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포르쉐보다 높을 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타고 있는 꼬마라고 하면, 사람들의 눈에도 당연히 잘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분은 황자님이신가.”
“황태자의 아드님이실지도.”
“바보 같은 소리! 황태자님은 공주님만 있다구.”
“그러면 새로 태어난 황자님이시겠지.”
“아니, 저길 봐. 저거 노예 목걸이 아니야?”
“어! 진짜네.”
“말도 안 되지. 저걸 봐. 저렇게 비싼 목걸이가 어디에 있겠어.”
“가만, 가만, 나는 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어. 저건 황제 폐하의 금색 노예다.”
루디는 고삐를 살짝 흔들어 말을 움직였다. 작은 몸이 커다란 말 위에서 앞뒤로 조금씩 흔들렸다.
그는 전생에 말을 타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레빈과 함께 보리스에게 말 타는 방법을 배웠다.
레빈은 시골 출신이라 말을 타 본 적이 있었지만, 비싼 승마용이 아니라 짐마차 용이나 늙은 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말을 타는 우아한 방법 따위는 잘 몰라서, 보리스에게 같이 혼쭐이 나며 배워야 했다.
“···.”
말에 오르면 시야가 굉장히 높아진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 승마를 배울 때는 상당히 무서웠다.
루디는 천천히 말을 몰아 황제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번 금색 노예라는 말이 들린다.
‘과연···금색 노예라는 건 좋은 눈속임이 되는군.’
황제가 그를 금색의 노예로 삼은 건 언제였나.
그때를 떠올리고 루디는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 스스로 황태자 노예의 팔 다리를 잘라낸 것으로 모자라, 위험한 상황에 빠지자 황제는 직접 칼을 날려 루디를 도왔다.
아무리 은색이라고는 해도 고작 노예일 뿐인 그를 위해 황제가 직접 움직이다니, 답을 알고 있는 지금 돌아보면 분명 예외적인 일이다.
‘처음부터였어.’
황제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와토린구 공작의 자식이라는 걸 알아봤다.
후계자라는 사실까지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력 소유라는 점은 정확하게 알았을 거다.
황궁에 온 것은 우연이었는지 몰라도, 금색 노예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뒤의 일을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더욱 확실해졌다.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어린아이라 생각해서 방심하고 있구나.’
루디가 성인이었다면, 혹은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았다면 더욱 섬세하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루디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하얀 구름이 꼭 리리샤 공주의 동그란 이마처럼 보였다.
< 출발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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