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 >
* * *
가을로 들어가는 계절이라고 하는데, 새벽에는 겨울처럼 추워진다.
리리샤 공주는 루디의 셔츠 자락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작은 손가락을 펴 보려고 했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공주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깰 것 같아서, 루디는 조심조심 위로 셔츠를 올려 벗었다. 옷만 두고 몸이 빠져나오는 형국이다. 헐렁한 원단에 주름을 많이 잡아 만든 셔츠라 쉽게 벗겨졌다.
“아이고, 춥겠네.”
유모가 소곤소곤 말하며, 셔츠를 하나 들고 왔다. 그대로 루디의 머리 위에 씌워 밑으로 내린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무리해서 눈을 뜬 모양이다.
마리가 쟁반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쟁반 위에는 따뜻한 스튜와 빵이 놓여 있었다.
“저쪽에 가면 더 맛있는 게 많겠지만···. 그래도 배고플지 모르니까요.”
마리도, 유모도 눈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루디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스튜를 한입 한입 입에 넣었다.
눈물 섞인 밥이라는 건 아마 이런 게 아닐까.
빵은 스튜에 조금 찍어 입에 넣었지만 잘 넘어가지 않는다. 두 사람의 분위기 때문인지 목이 약간 메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루디는 쟁반 위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먹었다.
이 세상에는 지구와 달리 아침 식사가 없다. 점심과 저녁 두 끼가 대부분이다.
마리의 말에 따르면, 몸을 주로 움직이는 평민 층에서는 아침도 먹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먹지 않았다. 적어도 루디가 황궁에 온 뒤로는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 저택에서도 지금까지는 새벽에 식사를 한 적은 없었다. 보리스가 매일 훈련장에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고마워요, 마리.”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운 뒤, 루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를 먹어본 적이 없는 마리는 평상시에 먹는 양만큼 담아 주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을 담아서 조금 더 많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아침 식사는 조금 덜 주는 게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배가 빵빵하다.
루디가 나가려고 하자, 유모가 그의 손을 잡았다.
“건강해야 해. 황후 마마 옆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유모가 당부하는 옆에서, 마리가 주저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루디님. 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칠십 먹은 노인네한테 팔릴 예정이었어요. 그랬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겠죠. 그 노인네, 사갔던 노예가 죽었다면서 여러 번 찾아온 사람이거든요.”
약간 쑥스럽게 웃으며 마리가 눈 옆을 긁었다.
“이런 말, 아직 어린 루디님한테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요, 꼭 한 번은 감사 말을 하고 싶었어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가자, 저택의 담장 밖에서 폐하를 모시는 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건 평상시와는 다른 마차였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하다. 마차에는 값비싼 전등 마도구가 한 개 붙어 있었다.
마부도 다른 사람이었다.
시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디, 짐은 그것 뿐입니까?”
“네.”
루디는 작은 보따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와토린구 공작가의 노예 목걸이와 양피지, 마잉크를 조금 가져왔을 뿐, 별다른 짐이 없다.
“이리로 오세요.”
시종이 루디의 손을 잡아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왔다.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게 일이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단순히 머무는 장소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위치도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종이 루디 옆에 앉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저택을 보자, 담장 안쪽에 유모와 마리가 작은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택은 순식간에 멀어져, 어느새 손톱보다 작아졌다.
이제 그만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데, 문득 저택 앞으로 뭔가가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 점처럼 변해버린 저택의 앞에 모래 한 톨 같은 것이 도로로 굴러 나오는 느낌이었다.
“!”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작은 몸이 마차 진동에 흔들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시종이 재빨리 그를 붙잡고, 멀리 보이는 저택에 시선을 주었다.
작은 먼지 같은 것이 저택에서 마차를 향해 펄럭펄럭 달려온다. 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먼 곳에서 루, 루, 부르며 우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오는 듯 했다.
“리리샤 공주님이군요. 저는 처음 뵙습니다만, 저곳에 어린아이는 공주님뿐이었죠.”
“···.”
리리샤 공주가 바닥에 엎어지고, 등불을 가진 유모와 마리가 뒤쫓아 와 공주를 잡았다. 잘 보이지 않지만 등불이 움직이는 것으로 짐작하면 그렇다.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당연하다. 황제는 동 트기 전까지 이동하라고 명했다. 마부가 멈출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루디도 잘 알고 있었다.
“···.”
루디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에는 너무 멀어져 세 명이 한데 뭉쳐 작은 점처럼만 보였다.
시종이 루디의 등에 손을 올려 놓았다.
“괜찮아요, 루디. 공주님은 괜찮을 겁니다.”
마차는 금세 황제가 살고 있는 황궁의 가장 깊숙한 중앙부에 도착했다.
*
제국의 황궁은 그 하나로 거대한 도시이다.
황제가 사는 궁전과 부속 시설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커다란 건물들이 너른 정원과 여러 개의 시설을 포함하여 하나의 단위가 된 채 퍼져 있다.
신도시에 아파트 단지와 공원, 학교, 상업시설들이 단위를 만들며 여러 개 모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
황궁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수와 산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야말로 도시 하나가 통째로 건설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중에서도 황제가 사는 중앙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데, 정 가운데의 건물이 황제의 침실이 있는 궁이다.
중앙에 놓인 황제의 침실은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 식사를 하거나 회의, 접견을 하고 때로는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했다.
루디가 지금까지 출입한 집무실은 중앙 건물의 오른쪽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 거대한 건물에 있었다. 중앙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제를 모시는 시종이 앞장을 서고, 루디는 그 뒤를 따랐다.
루디에게 배정된 곳은 황제의 공식적인 침실 오른쪽에 있는 공간이다.
그 안에 들어선 루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커다란 공간에는 침실과 거실, 욕실을 비롯해 몇 개의 방이 더 딸려 있었다.
그리고 레빈이 엉거주춤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루디님!”
레빈이 루디를 보고 다가오려다, 시종의 시선을 받고 움찔 동작을 멈췄다.
폐하를 모시는 시종이라고 하면 꽤 윗사람일 것이다. 아무래도 긴장한 것 같다.
레빈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우아한 동작으로 절을 했다.
“루디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루디님을 모시게 된 레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
레빈, 인사말이 조금 이상해. 이미 아는 사이에서 그런 말은 상당히 바보 같지 않을까.
시종은 힐끔 레빈을 보고, 시선을 루디에게 돌렸다.
“루디, 당신은 그동안 굉장히 잘 해 왔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에는 폐하와 함께 이동을 하게 될 거예요. 그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시종이 당신을 돌보기 위해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레빈이 당신과 함께 합니다.”
“저···이동이라니요? 저는 여기에서 일하게 되는 게 아닌가요?”
루디의 질문에 시종이 약간 고개를 숙였다.
“그 건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이동 참가는 두 사람의 교육을 생각해서 특별히 결정된 겁니다. 궁 안에서는 배울 수 없는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고 오게 될 거예요.”
시종의 시선이 레빈을 향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특히 레빈에게는 얻기 어려운 기회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 아이는 아직 누군가를 섬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지요.”
시종이 싱긋 웃는다.
“이 궁에 루디라는 특별한 케이스가 생기지 않았다면 레빈이 황궁에서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모실 기회는 전혀 없었을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성심을 다해서 모실게요.”
레빈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럼 우선 옷부터 갈아입도록 하죠. 폐하의 아침은 상당히 이릅니다. 루디는 오늘부터 다른 시종이 하는 걸 잘 보고 익히도록 하세요. 이동 중에는 루디가 직접 폐하의 시중을 들어야 할 경우도 생길 겁니다.”
“네.”
루디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레빈이 거실 안쪽에서 옷을 가져왔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 뒤, 데리러 올게요.”
시종이 나가고, 레빈과 루디 두 사람만 남았다. 레빈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루디님! 이번 이동에 대해서 오늘 아침에 조금 들었는데요, 우리는 폐하의 시찰에 따라가게 된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 빠르게 루디가 입고 있던 것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힌다. 금색 실이 많이 들어간 옷이었다. 유난히 화려하다.
“마차만 해도 수십 대가 이동하는 것 같더라구요. 어마어마한 양의 짐이 실리는 것도 봤어요.”
“···그건 그냥 시찰이 아닌 것 같아요.”
루디는 레빈이 하는대로 몸을 맡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해도 레빈은 일 년도 넘게 루디의 시종으로 있었다.
중앙 궁전의 황제 침실 바로 옆에 있는 방을 자신에게 배정한 것도, 별다른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시찰에 데리고 가는 것도 모두 비정상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있지만 한 발 물러서서 다시 보면 분명 이상했다.
‘역시···.’
루디는 그 동안 자신이 의심해왔던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구의 평화로운 삶을 살다 온 그는 역시 이 세상에서 약간은 어리숙한 부류였는지도 모르겠다.
옷을 다 입는 시간을 정확하게 재고 있었던 것처럼, 치장이 끝나자마자 시종이 들어왔다.
레빈은 그 방에 남고, 루디 혼자만 시종에 이끌려 황제의 침실로 들어갔다.
조용한 가운데, 입구에만 어둡게 불빛이 밝혀져 있다.
커다란 방 안 중앙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기둥이 네 개 세워져 있고, 그 위에서 긴 커튼이 여러 겹으로 늘어져 침대 주변을 감쌌다.
밖에 달린 커튼은 두꺼운 벨벳 재질이었다. 예쁘게 주름을 잡아 기둥에 묶고, 그 안쪽으로는 얇은 원단으로 만든 속커튼이 두 겹 정도 침대를 가리고 있었다.
침대와 가까운 벽에도, 입구에서 들어가는 쪽에도 시종이 몇 명 있다. 움직임이 너무 없어서 얼핏 보면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루디는 시종이 눈짓하는대로 조용히 침대 가까운 자리에 섰다.
침대 안쪽에서 가끔 푸, 푸, 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리자, 시종장이 들어왔다.
침대 옆으로 다가간 시종장이 조용히 침대 안쪽으로 말을 걸었다.
“폐하, 기침할 시간입니다.”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종장이 다시 두어 번 똑같은 말을 하자 침대 안쪽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이불이 움직이고 커튼 너머로 커다란 남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느새 방안 가득, 환하게 촛불이 켜졌다. 특이하게 마도구가 아니라 진짜 초다.
벽에 대기하고 서 있던 시종이 다가가 재빨리 커튼을 젖히고, 또 다른 시종은 물이 담긴 은대야를 가져왔다. 옷을 가져와 들고 있는 시종도 몇 명 있다.
루디가 방안에 들어서며 본 시종보다 숫자가 많다. 문이 열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느릿느릿 황제가 시중을 받으며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다.
집무실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 자고 일어난 모습을 보니 약간 마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밑이 약간 꺼져 있다.
시종 한 명이 화장품이 담긴 수레를 끌고 왔다. 황제도 화장을 한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다.
몇 가지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마무리로 분을 바른다.
약간 피곤한 듯 보이던 황제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지고, 더욱 악당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악당 얼굴은 일부러 만든 거였구나.’
본래의 얼굴도 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루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몸에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리고, 마지막에 시종장이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황제가 그 안에서 반지를 여러 개 꺼내 손가락에 끼운다.
모든 치장을 마친 시종들이 뒤로 물러서자, 황제가 루디를 보았다.
“왔구나.”
씨익, 웃는 모습은 어느새 완벽하게 사악한 산타클로스였다.
“폐하, 금색 노예 루디 인사 올리옵니다.”
루디가 궁정 예절에 맞게 절을 하며 머리를 숙이자, 황제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됐다. 그딴 예법 따위는 우리끼리 있을 때는 필요 없어. 레이, 그 물건을 이리로···.”
황제가 옆을 보며 말하자, 시종장이 납작한 상자를 가지고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번쩍번쩍 빛나는 금색의 목걸이였다. 황금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무슨 보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리 오라. 내가 달아주자.”
루디가 가까이 가자 시종이 그의 목에서 목걸이를 벗겼다. 황제가 새 목걸이를 루디의 목에 걸고 살짝 누르자 찰싹 소리와 함께 잠겼다.
황제가 툭, 루디의 목걸이를 건드렸다.
목은 급소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보리스의 훈련 때문에 자동으로 손이 나갈 뻔 했다. 만일 황제를 치기라도 했으면 그 순간 목이 날아갔을 거다.
황제는 금방 손을 뗐다. 문득 황제가 자신의 반지를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이 보였다. 왠지 기쁜 듯이 황제가 웃고 있었다.
< 새로운 시작 > 끝
(67)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