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살의 어느 가을 날 >
* * *
집무실과 훈련장, 저택을 오가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제국에도 눈이 내리지만, 허리까지 쌓이는 경우는 드물다. 루디가 이곳에 온 뒤로 그렇게 많이 내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7살을 맞이하는 새해의 첫날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눈이 내렸다. 이대로라면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눈이 온 천지를 덮어 세상이 하얗게 변했던 날, 루디는 저택에서 공주와 함께 한 살 더 나이를 먹었다.
마리는, 자신은 노예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이를 안 먹는다고 선언하고, 유모는 아직 여자이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디아 마마는 드물게 정신이 온전했다.
리리샤 공주를 보고 예쁜 아이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자신이 몇 살인지는 헷갈려했다. 그녀는 작년의 나이를 올해 다시 한 번 먹었다.
그 나이가 틀렸다고, 유모는 수정하지 않았다. 그저 한 살 더 드셨네요, 축하합니다, 라고만 말했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루디와 여자들은 조촐한 새해 축하 잔치를 했다.
작년에는 절박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나 축하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올해는 마리 덕분에 훨씬 풍족하다.
식탁에는 정원을 뛰어 놀던 닭과 오리가 한 마리씩 잡혀 통구이가 되어 올라왔고,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와 화덕에서 구운 빵이 놓였다.
토끼도 한몫 했다. 저택 뒤편에서 길러 말린 허브와 함께 푹푹 삶아져 국물 요리가 되었다.
닭 오리와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고마운 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일곱 살 루디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는 감사한 일이다.
처음에는 가축의 수가 도무지 늘지 않아 힘들었다. 어렵게 태어난 병아리는 대부분 쥐한테 잡혀 깃털 한 장 남기지 않고 뼈까지 먹혀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있던 병아리가 피 몇 방울만 남기고 다음날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다.
리리샤 공주는 병아리를 부르며 울어 대고, 마리와 유모는 분노했다.
토끼도 마찬가지였다.
불새는 밤에도 루디와 마도구 연구에 어울렸기 때문에 초기에는 쥐를 제대로 막아줄 상황이 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 가축의 수가 늘고 잡아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다.
올해의 새해 식탁에는 거기에 집무살 사람들에게서 받은 작은 선물이 더해졌다.
예를 들면 도시에서 유행하고 있는 과자라든가, 집무실에 간식을 배달하는 시종이 몰래 빼돌린 듯 보이는 설탕 절인 과일, 고급 와인, 그런 것들·.
여자들이 굉장히 기뻐했다.
비마마의 상은 따로 차렸지만, 공주의 자리는 루디 등 다른 사람과 함께였다.
리리샤 공주는 모두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과자를 집어 입안에 쑤셔 넣다 유모에게 들켰다. 당연히 공주님은 어쩌고저쩌고 하며 혼이 났다.
“루우···. 루우···.”
리리샤가 그를 부르며 등 뒤에 숨어서 운다. 울면서도 과자를 놓지 않고 먹는 것이 공주답다고 할까.
가운데에 끼인 루디 역시 밥 먹기 전에 과자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주가 과자를 먹는 얼굴을 보고 그 말이 쑥 들어갔다.
양 볼을 크게 부풀리고 과자를 먹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울면서 웃는다는 거, 실제로 현실에서는 처음 봤다.
왠지 시끌벅적한 새해였다.
*
올해도 새해 연회에 나디아 마마가 불리지 않은 게 유모는 조금 슬펐던 모양이다.
나중에 혼자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불리지 않은 이유가 비마마의 정신적인 면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황제의 관심이 황후에게 가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황후와 황제의 사이가 전에 없이 다정하다는 말은 여기저기에서 듣고 있었다.
실제로 루디가 집무실에 있을 때 황후가 몇 번 온 적이 있는데, 둘 사이는 매우 온화해보였다.
그 덕분에 나디아 마마를 향한 괴롭힘도 잠시 주춤했다.
세탁물도 조금 자주 배달이 오게 되었고, 저택으로 오는 음식이나 비품도 다소 양이 많아졌다.
놀랍게도 새해가 조금 지난 뒤에는 몇 년 동안 마석 교환조차 해주지 않았던, 불 마도구를 한 개 더 보내왔다.
루디가 없을 때 마도구를 가진 시녀가 왔다고 들었다. 유모가 시녀를 맞이했는데 그냥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오랫동안 마석 없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장작으로 불을 때우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라고 했다던가.
유모로서는 그동안 억울했던 감정을 속시원하게 한 번 내뱉은 것 같지만 바보 같은 짓이다.
일곱 살이 된 루디는 이제 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유모는 왜인지 루디가 엔리코 황자 대신 이곳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며칠 뒤, 괴롭힘으로 물에 젖은 장작이 산처럼 도착했다.
황궁에서 사용하는 난방 마도구는 루디가 만든 것과 달리 불길이 그리 크지 않다. 작은 마도구 하나만 들고 다니니 편리하기는 하지만, 저택을 덥히려면 장작을 보조로 사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겨울이 되기 전에 장작을 준비해도 두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추가로 보충해야 한다. 후궁의 대부분이 그렇다.
한겨울에만 장작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건물 벽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기 때문에 가을부터 초봄까지 계속 장작을 때워야 했다.
불 마도구를 못 쓰면 한여름에도 목욕물을 데우거나 음식하는데 종종 사용하게 된다. 정말로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유모는 볼살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냈지만, 자업자득이다. 시녀가 마도구를 내밀 때 조용히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의 응대가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보복을 받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을 텐데.
황후가 매번 지시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괴롭히는 시녀들은 자기 주인의 기분에 따라 정도를 조절하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방문이 없어 황후의 기분이 나빴더라면 장작을 적시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다. 훨씬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이런 사람들을 남기고 저택을 떠날 수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연이어 나왔다. 정말 걱정이다.
루디는 머리를 털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끙끙거려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나가는 걸 피할 수 없다면 대비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루디는 작년 가을부터 차근차근 이 저택에서 나갈 준비를 해왔다.
가장 고민한 것은 마석에 마력을 보충하는 문제였다. 자신이 없으면 저택에서는 난방도, 물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근처에는 우물도 없으니, 황후의 시녀들이 물 가져다 주는 일을 방해하면 정말 비참한 삶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도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간신히 마력 보충의 방법을 찾아냈다.
마생물의 몸에 자신의 마력을 넘치도록 붓는다. 그리고 마생물로 하여금 루디가 지목한 마석이나 같은 마생물에게 마력을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마생물이 가질 수 있는 마력이 아주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면 여러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
대신이랄까. 루디와 저택의 거리가 멀어져도 크게 상관없었다.
실체가 없는 마생물의 이동은 상당히 빨라서 순식간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을 옮겼다.
훗날 루디가 저택에 접근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도 충분히 제 할 일을 해낼 것이다.
언제 이 저택을 떠나게 되어도 이 저택에 사는 여자들의 생활은 다시 예전의 비참한 꼴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최악은 피했다.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해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게다가 황제의 집무실에서 일하면서 이제야 겨우 이 세상과 황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금 감을 잡은 것 같다.
황궁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 세상이 너무 낯설었다.
실제로 눈앞에서 사람이 퍽퍽 죽어나가고 노예가 사회 저변에 버젓이 존재한다.
사람이 개 돼지 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세상에 뚝 떨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쩔쩔매며, 언제 정체가 들통나나 매 시간 매 초가 불안했다.
심지어 황궁 제일의 권력자라는 황제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어린애한테 칼을 쥐어주고 사람을 죽여라 말하는 미친놈이다.
어린 자신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고꾸라져 죽을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녀도 딸려있었다.
가느다란 실 위에서 올라서서 물구나무 한 채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황제의 집무실에서 일을 해보니 어쩐지 맥이 빠졌다. 여기도 지구의 직장 생활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줄타기에서 떨어지면 곧바로 악어밥이 되는 세상이기는 해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동료와 관계를 쌓으면서 윗사람의 눈치를 잘 살피면 되는 익숙한 사회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거라면 해나갈 수 있겠다고 안도했다.
심지어 어리기 때문에 일은 쉽고, 거의 모든 집무실 사람이 호의적으로 그를 대했다. 지구보다 오히려 쉬운 게 아닐까 싶다. 지구에서의 삶이 이제야 겨우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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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신청해 놓았던 노예상의 면회는 새해가 지나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도 여전히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라도프가 잊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다. 물어보는 게 좋을까 생각할 즈음에 황제께서 불허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황후의 눈에 띄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루디는 가지고 있는 싸구려 마석 목걸이를 모두 사용해 저택 곳곳에 난방과 CCTV를 설치했다.
자신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마생물을 이용해 처리해야 한다. CCTV는 그런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마력을 옮기기 위해 마생물을 만드는 일도 계속 병행했다. 마생물을 만드는 일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마생물의 몸이 크거나 봉황처럼 본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설정이 거대하면 사용하는 마력도 커진다.
그래서 저택에 두는 마생물은 모두 몸집이 작고 보잘것 없는 걸로 선택했다.
다람쥐, 참새, 앵무새, 무당벌레, 생쥐···.
저택 안과 밖을 작고 큰 마생물로 채운다.
같은 황궁이나 도시 정도의 거리라면, 그들은 순식간에 루디와 이 저택 사이를 오갈 것이다.
마생물의 일부는 마석에 마력을을 옮기는 용도로, 일부는 그저 루디에게서 마력을 받아 이 저택 사람을 지키는 용도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래, 됐어.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지킬 수 있다.’
혹여 그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황궁 사람의 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마력소유, 그것도 마생물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망설임이 왜 없었을까.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는 공주의 얼굴이 눈앞에서 깜박깜박,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은 뭔가를 한 번 책임지게 되면 결국 끝까지 가게 되는 것 같다. 아이에게 정이 붙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은 한 번 저 세상으로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다소 무리를 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결정 내렸다.
이 저택에 있는 여자들을 지킨다.
한 밤중의 개인 시간에는 최대한 틈나는 대로 마생물을 하나씩 불러 말을 걸거나 마음을 보내며 지냈다.
마생물을 만들면 교감을 나누는 일도 중요하다.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시기에 써먹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루디는 벌레 한 마리까지도 모두 손바닥 위에 올린 채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의 주변은 작은 빛을 뿌리는 마생물로 북적북적, 나중에는 대체 몇 마리를 만들어 냈는지조차 헷갈리게 되었다.
황제의 집무실과 저택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봄이 왔다.
그 사이 디코콰리아의 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다. 이웃의 어떤 나라에서 돈을 약간 댔지만 지원은 그것뿐이었다고 한다.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귀족이 악정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라, 디코콰리아 국민의 반응도 그저 그랬던 모양이다.
제대로 된 병사도 구심점도 없는 반란군은 여기저기서 연기만 피우다 점차 사그라들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즈음, 반란군의 수뇌는 모두 목이 잘려 성문에 머리가 걸렸다.
집무실에서만 잠깐 황제의 시중을 들던 것이, 여름이 깊어지면서부터는 황제가 다른 곳으로 향할 때도 가끔씩 붙어 가게 되었다.
달이 지날 때마다 이제 떠나라고 하는 걸까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좀처럼 나가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혹시 이대로 저택에 몇 년 더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루디에게 명령이 내려왔다.
금색 노예 루디는 후궁을 나와 황제의 침소 옆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었다.
< 7살의 어느 가을 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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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루디 7살, 리리샤 공주 5살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