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변해가는 상황 >
* * *
공식적인 업무가 모두 끝난 밤, 사방은 조용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몇 가지 남은 서류를 확인하고, 내일 새벽 지시를 내려야 하는 건 정리해 한쪽 구석에 두었다.
그렇게 쌓아둔 서류는 밤새 시종장이 다시 정리하고 구분해, 각 관리에게 내리는 개별 서류로 작성해둘 것이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다른 때는 시종장이 함께하지만, 근래에는 새해 연회 준비와 디코콰리아의 반란 때문에 평소보다 그의 일이 많아졌다.
그 때문에 오늘의 동행은 다른 시종이다.
이 사람도 젊을 때부터 한결같이 그를 옆에서 지탱해준 자였다.
어느새 늙어버린 시종의 모습을 보고, 황제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나도 다 늙는구나.”
황제의 말에 시종이 웃는다.
“세월에 장사 있습니까. 모두 시간 앞에는 힘없이 굴복하게 되지요.”
“그렇지.”
한때 건강하던 몸도 한 군데 두 군데 망가지니 시간의 무서움을 알겠다.
황제는 조용히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띄엄띄엄 밝혀진 등을 지나쳐 황후의 처소로 향한다.
늦은 밤인데도 움직이는 시종이 많았다.
어느새 12월로 접어든 터라, 황궁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새해 연회 준비로 한창이다.
건물 곳곳을 쓸고 닦고, 늘어진 커튼이나 차양, 양탄자를 보수하거나 새로 단다.
매년 하는 일이지만, 매년 해야 할 곳이 생긴다고 시종장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오늘 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매일 지치지도 않고 하룻밤에 여러 번 여자와 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매일 여자와 몸을 맞대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하지만 그런 걸 눈치 채게 할 수도 없어, 근래에는 파블로의 정력증강제에 자주 신세를 지고 있었다.
오늘처럼 황후와 시간을 보낼 때에는 마음이 더욱 예민해졌다. 황후의 뒤에는 다른 나라와 제국 귀족 여럿이 눈을 밝히고 있어, 조금의 틈도 보일 수 없다.
걷는 걸음걸이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여자와 농밀한 밤을 지내는 것도 몸이 정상일 때나 즐겁다. 피곤한 몸에 약으로 정력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는 고문에 가까웠다.
황제는 무거워지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허리에 힘을 넣었다.
황제의 하루는 매분 매초가 모두 의미 있다.
모두가 우러러 보는 높은 자리, 더할 수 없는 명예, 각국 각지에서 뽑아온 미녀, 최상의 것들을 누리는 화려함,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지만 이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황제는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개인을 내놓는다.
잠자는 시간조차 허투루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숙면을 취하는 것은 내일 나라를 위해 일할 몸을 쉬게 하는 방편이다.
황후나 후궁과의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후손을 낳고, 마력 소유의 숫자를 늘이는 것은 황제의 의무다. 황제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이제 와서 황후가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든 황후와의 잠자리는 그 뒤에 잇는 자들의 눈을 속이는 하나의 방편. 언젠가 귀하게 될 아이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언젠가 그를 원망하게 될지도···.
황제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 자신만의 것이 없다.
그런 황제에게 자신만의 것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존재가 금색의 노예였다.
금색 노예 역시 대부분은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는데 도움되는 존재를 고르지만, 다른 것과 달리 그걸 고르는 기준은 오직 한 가지였다.
황제가 원하는 자.
그것이 금색 노예로서의 유일한 조건이다.
황제가 바라기만 한다면 돼지이든, 개 고양이든, 금색 노예가 될 수 있다.
루디, 그 아이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아니, 아직 어려서 모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의미하는 게, 황제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지를 뜻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실제로 황제가 되었을 때다.
자신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마음으로 느낀 것은 황제가 된 이후였다.
언젠가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아이는 자신을 황제로 만든 사람을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옆에서 가르치고 토대를 만든 뒤에 자리를 물려줄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을 테지만, 아마 그렇지 못할 거다.
‘나는 그 아이를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 내던진 채 죽게 될 테지.’
할 수 있는 건 한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면 숨죽여 있던 자들조차 들고 일어나 새로운 황제를 물어뜯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가르칠 시간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어린 황제는 우습게 여겨진다.
루디의 외모가 너무 뛰어난 것도 단점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나약하게 여겨진다.
나이도 어린 데다 화려한 외모.
어떤 사람에게도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황제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면 사람들의 언행이 가벼워지고, 그런 분위기가 널리 퍼지면 국가 전체에 이상한 기류가 생기기 쉽다.
“···.”
황제는 무뚝뚝한 얼굴이 되어 앞을 노려보았다.
자신은 외모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득을 보았다. 큼직큼직, 얼굴의 구성 자체가 큰 데다, 그는 거구에 근육질이다.
보리스의 교육 탓에 행동도 난폭했다.
그러한 점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끌어내,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야 그의 앞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뿐 아니다.
전대 황제인 아버지는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충분히 국내와 국외를 눌러 안정시키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 자리를 이을 때 혼란이 일어날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루디는 다르다.
혈연으로 이어진 황족조차 아니었다. 훗날 그 아이는 공주의 남편 자격으로 황제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제 아무리 마력이 많고,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분명해진다 해도 반대하는 자가 많을 것은 뻔했다.
그걸 모두 억누르는 것은 쉽지 않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 아이의 앞날은 거칠 것이다. 당연히 나라도 혼란스러워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마력소유는 귀중한 것, 더구나 그 엄청난 마력을 가진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 다른 나라에서 눈치채기 전에,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잡아야 한다.
황제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황후의 거처였다.
미리 기별이 간 덕분에 시간을 맞춘 것일까.
황후의 나라에서 함께 온 시녀 여러 명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모두 허리를 낮추고 머리를 숙였다.
그녀들 중에 몇 명 어린 여성이 있었다.
황후 젊을 때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
자신의 외모가 더 이상 남자에게 매력적이지 않게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황후가 모국에서 어린 여자를 몇 명 불러온 건지도 모르겠다.
황제가 그녀들에게 사랑을 부으면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건가.
‘기막히면서도 애처로운 것.’
십대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사이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워졌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 역시 늙었다. 이제 웬만한 여자에게는 몸이 동하지도 않았다.
“···.”
안으로 들어가자 조명이 조금 어둡게 조성되어 있었다.
황후가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맞이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옆으로 내리고 있었다.
옅은 화장과 어두운 조명으로 속이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과 목에는 늙어 처진 살이 약간 보였다.
그게 조금 귀여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황제는 팔을 뻗어 황후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파블로의 약 덕분에 황제의 몸은 이미 만전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황후가 몸을 비틀며 부끄러워했다.
서로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올랐다.
서로의 숨이 조금씩 높아지고 몸을 더듬는 손길이 깊은 곳까지 이른다. 두 사람은 어느새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농밀한 시간이 끝나고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을 때, 황후가 부끄러운 듯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말했다.
“폐하, 근래 몸이 조금 마르신 듯합니다. 편찮은 곳은 없으신지요.”
“···.”
황제는 몸을 옆으로 뉘여 황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황후 때문이 아닐까.”
황제는 나이든 아내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 두터운 손을 그 몸에 올렸다.
한 번 더.
부드러운 몸을 황제의 손이 더듬고, 두 사람의 몸이 다시 한 번 어우러졌다.
달콤한 땀방울을 흘리며 황후의 교성이 다시 방안을 떠돌았다.
잠시 눈을 붙인 뒤, 아직 하늘이 캄캄한 시간에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황제는 집무 시간이 되기 전,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어느새 방에는 시종장이 들어와 있었다. 일을 마치고 온 모양이다. 하루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어도 될 텐데, 피곤한 성격이다.
시종장이 아무 말없이 옷 입는 것을 도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황후의 처소를 나왔다. 황후는 피곤했는지 두 사람이 나올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 * *
황제의 표정이 좋지 않다.
시종장 레이놀드는 조용히 황제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황제의 침실에 거의 왔을 때,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마른 것을 황후도 알아차렸다.”
“···.”
“그렇게 이것저것 먹어가며 몸이 마르지 않도록 신경 썼는데···이제는 감추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같아.”
침실로 들어간 황제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약간 웃는다.
“파블로의 약은 정말 대단하더군. 황후의 의심을 몸으로 막았다. 하하.”
그리고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루디 그 아이는 공주와 나디아에게 정이 얼마나 있는 것 같던가?”
“보리스의 말로는 상당하답니다.”
“이 삼 년 정도 떨어져 있어도 변치 않을까?”
“괜찮을 겁니다. 워낙 공주가 그 아이를 많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루디도 상당히 귀여워하는 것 같더군요. 걱정을 하면 했지 마음이 변해 냉정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이놀드, 마음을 정했다. 이 년, 길면 삼 년 정도, 루디를 데리고 디코콰리아에 가 있어야겠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황제는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전쟁이 벌어질 거야. 하지만 시기가 나빠. 당장이라면 또 몰라도, 몇 년 후라면 난 눈에 띄게 마를 거다. 누구나 내가 병중이라는 걸 알아챌 거야. 그러다 내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해봐라. 혼란에 빠지고 말 거야.”
“···.”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조금 빨리 그 아이를 후계자로 정해야겠어.”
“가능하겠습니까? 보리스의 말대로라면 그 아이는···.”
“그래서 디코콰리아로 가려는 거다. 그 아이에게 모국과 자신의 영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면, 정에 약한 그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 생각하겠지요.”
“그래. 똑똑한 아이니까 그냥은 못 돕는다는 것도 알 거야. 보리스의 교육은 상당히 잘 되어 있다고 하니.”
황제가 머리를 뒤로 넘겨 의자에 대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순서가 중요해. 먼저 황제가 되라고 다그친 뒤에 디코콰리아를 보여주면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먼저 그 나라 실정을 보여서 애처로운 마음을 갖게 한 뒤에 황제가 될 가능성을 보이면 자신이 스스로 원하게 될 거야.”
황제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레이, 노예 일로 카니아를 압박하라고 외교부 쪽에 전해. 와토린구 공작령을 제국에 몇 년 임대하게 만들어라. 내가 그곳에 직접 가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카니아를 넘보는 걸 멈추겠지. 제국을 건드릴 담력이 있는 나라는 아직 없다.”
레이놀드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아무리 못해도 내년 하반기에는 거기에 가 있어야 해.”
황제가 피곤한 듯 말하고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울 시간은 안 된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옷차림을 정돈해야 한다.
레이놀드는 조금이라도 황제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쿠션을 황제의 옆에 기대고, 도톰한 무릎 덮개를 몸에 덮었다.
황제의 눈 밑이 피곤 때문에 움푹 꺼져 있다.
레이놀드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았다.
황제는 점점 스스로의 목숨을 깎아가고 있다.
황혼은 이제 머지않아 황제에게 찾아올 것이다. 한발 한발 그 날을 향해 걷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해 마음이 아팠다.
< 격변해가는 상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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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1/12 루디가 공주의 남편 자격으로 공동 황제....이 부분의 공동 황제를 그냥 황제로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