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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63화 (63/201)

< 금색 노예의 일 >

* * *

황제의 우울한 시선이 레이놀드를 향했다.

“그 아이는 어떤가?”

황제가 묻는 것은 와토린구의 가짜 후계자 노먼의 일이다.

조금 전 레이놀드는 의국의 파블로한테서 세세한 상태를 듣고 왔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아주 오래 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몇 년 정도는 어찌 할 수 있겠지만···. 눈의 상처가 너무 오래 되었다고 하더군요.”

노먼이 너무 일찍 죽으면 그만큼 루디에게 눈이 쏠린다.

루디는 요즘 시동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집무실에서 간단한 일을 하고 있다.

큰 것은 아니다.

황제의 옆에 서서 잉크병이나 펜을 바꾸거나 음료 시중을 드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었다.

보리스의 충고 때문에 여느 시동에게 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로 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집중되어 있다.

어린 시동이 황제의 신변을 시중드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루디가 너무 어리고, 또 금색 노예이기 때문이다.

엔리코를 많이 닮았다는 점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앞으로 몇 년, 루디를 시동으로 데리고 다니면 이상한 억측을 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노먼은 그런 루디의 위장을 위해서라도 가급적 오래 살아야 한다.

“생명을 최대한 연장시키기 위해서 몸의 기운을 많이 빼앗는 부분은 기능하지 않도록 약을 조절하는 상태라고 합니다. 파블로가 말해준 덕분에 알았는데,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것도 의외로 몸의 기운을 많이 빼앗는다 하더군요. 그래서 아이는 가급적 부담이 안 가는 죽이나 음료 형태로 영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레이놀드는 아이의 작은 몸을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성장하는 것에도 기운을 많이 빼앗긴답니다. 그래서 더 크지 않도록 제어하고 있어요. 뭐, 이것저것 할 수 있는 한은 모두 손을 대고 있답니다.”

오로지 아이의 생명을 유지 시키는 데에만 집중한다.

레이놀드는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파블로는 일에 철저하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아이에게는 워낙 동정적이라···만날 때마다 불평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예전에 죽었을 것이다.

황제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지낼 수 있게 봐줘. 아파 보니 알겠더구나. 어린아이에게 신체의 고통은 힘들 거야.”

“물론입니다. 그 점은 최대한 신경 쓰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에게 일부러 잔인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레이놀드는 평상시처럼 약이 든 와인을 황제 앞에 내놓았다.

그걸 한 모금 홀짝 마시고, 황제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와의 면회 때문에 집무실을 잠시 비웠던 관리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이놀드도 평상시처럼 업무로 돌아갔다.

* * *

와토린구 공작의 가짜 후계자가 나타난 게 봄이었는데 벌써 계절은 겨울로 넘어왔다.

그 사이 여전히 보리스의 훈련은 새벽마다 받고 있지만 생활 형태는 많이 바뀌었다.

새벽 훈련은 시간이 다소 짧아지고, 오전에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노는 것은 아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일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일다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루디는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시종 옷을 펄럭이며 부지런히 복도를 걸었다.

이 시대에는 아동복이 존재하지 않아서, 아이는 성인의 옷을 크기만 줄인 상태로 입는다.

특히 루디의 옷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하나 이상의 보석이 붙어있었다. 금색 노예이기 때문에 황제의 권위를 은근히 나타내는 용도라고 들었다.

그  외의 장식도 많고, 원단도 쓸데없이 많이 들어간 옷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옷에 달린 장식부터 입고 벗을 때마다 묶고 푸는 끈까지, 아이의 손으로는 뭐하나 쉽게 마무리 되지 않는다.

결국 옷을 입고 벗는 데에는 항상 레빈의 도움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은 보리스에게서 훈련을 받은 직후에 황궁으로 향한다. 시종들이 사용하는 방에서 간단하게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루디는 황제의 집무실로, 레빈은 무기 사용에 일가견이 있다는 시종에게로 간다.

가련한 외모와 달리, 레빈의 장점은 머리보다는 몸을 사용하는 일에 있었다.

무기를 다루고 상대를 압박해 순식간에 제압하는 데에 뛰어나다.

그의 본가가 가난한 시골 귀족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닭을 쫓아다니고 산으로 들로 사냥하러 쫓아다닌 덕분에 머리 대신 몸이 발전한 거라고, 레빈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빈에게 새로 배정된 일은,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위 시종이다.

호위병이 참석할 수 없는 자리에 동석해서 황제와 황족을 지키는 게 임무라고 들었다.

하지만 단순히 무술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기본적인 시종의 일은 모두 익혀야 한다.

그것도 황족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는 자리인지라  다른 시종보다 더 공부해야 하는 모양이다. 매일 죽겠다고 풀이 죽어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황궁의 복도를 타박타박 걸어가자, 황제의 집무실이 보였다.

루디가 가까이 가자 무표정한 얼굴의 시종이 문을 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루디는 얼굴을 잔뜩 쳐들고 해쭉 웃었다.

만날 때마다 미친 척하고 시종이나 관리들에게 실실거리며 웃었더니, 요즘에는 그들이 먼저 루디를 보면 아는 척을 한다.

뭐, 어쨌든 좋은 일이다.

친해진 덕분에, 관리나 시종들은 일부러 뭔가 맛있는 걸 가져와 루디의 책상에 살짝 놓고 가기도 한다. 주로 달콤한 간식거리다.

그것들은 모두 모아 저택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것이 모자라는 저택에서 관리와 시종들이 주는 음식은 공주에게도, 유모나 마리에게도 상당한 인기였다.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걸 하나도 못 얻어 가는 날에는 실망들이 대단하다. 특히 공주는 눈물까지 뚝뚝 떨어뜨리며 울곤 했다.

“···.”

오늘도 열심히 애교를 팔아 맛있는 것을 얻어가자!

기합을 넣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는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상시와 같다. 황제도, 관리들도 모두 바빴다.

루디는 다른 때처럼 황제의 책상으로 다가가 잉크와 펜, 종이들의 배치와 잔량을 살폈다.

그의 일은 황제가 일하는 동안 아주 잠깐의 불편도 없게 물건을 챙기는 것이다.

잉크가 반 이하로 줄어들면 재빨리 잉크병을 교체해 새걸 손닿는 곳에 놓고, 펜촉의 감각이 이상해진 것은 없는지 때때로 확인한다.

황제가 편지를 봉인할 때 사용할 왁스를 불에 녹이거나 간식거리를 부지런히 교환하는 것도 루디의 일이었다.

지금 당장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그가 오기 전에 다른 시종이 정리해 놓은 티가 났다.

루디는 집무실 한쪽에 있는 책장으로 가서 작은 사다리에 올라섰다.

사다리는 본래 없었는데 어느 날 불쑥 생겼다. 키 작은 루디를 위해 갖다 놓은 것이다.

그 외에도 자세히 보면 루디를 위한 용품이 모르는 사이 조금씩 늘어나 있곤 했다.

손에 잡기 편한 작은 컵, 작은 무릎 덮개, 작은 쿠션, 아이를 위한 달콤한 음료와 과자···.

어린아이를 일하게 하는 블랙나라치고는 복지가 제법 괜찮은 편이다.

루디는 두껍게 제본된 책 중에서 가장 얇은 걸로 하나를 잡았다.

조금 낑낑거리자, 벽에 붙어 서 있던 시종이 다가와 꺼내주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시종이 싱긋 웃는다.

시종은 루디가 사다리에서 내릴 때까지 책을 들고 있다 건네주더니, 발소리를 내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가 섰다.

루디도 책을 들고 양탄자가 깔린 바닥을 걸어갔다. 종종걸음으로 공간을 가로질러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루디가 왔다 갔다 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동안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워낙에 바쁘기 때문이다.

루디가 다시 도착한 곳은 황제의 옆이었다.

황제의 책상 옆에는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곳이 루디의 자리였다.

할 일이 없을 때에는 미리 받은 책을 보거나 책장에서 스스로 골라와 읽는다.

때로는 보리스가 숙제로 내준 문제를 풀었다. 간단한 산수부터 정치 사회에 관한 주관식 문제까지 상당히 광범위하다.

보리스가 다음 날 제대로 책을 봤는지, 숙제는 이해하고 쓴 건지 꼼꼼하게 확인하기 때문에 얼렁뚱땅 해서는 안 된다.

덧셈, 뺄셈을 공부할 때는 어디까지 아는 척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서 상당히 힘들었다.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가서 조금 편하다.

이제는 곱셈이야.

“···.”

루디는 자신의 자리에 앉기 전, 황제의 책상 전면에 놓인 길쭉한 단 위에 올라섰다.

루디가 책상 위의 물건을 잘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둔 단이다.

아이한테 시키기 위해서 이런 걸 마련하는 것보다는 시종이 일하는 게 훨씬 간편할 텐데, 이상한 사람들이다.

황제가 작성하던 서류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옆에 봉투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인장을 누를 서류인 것 같다.

루디는 왁스 녹일 때 사용하는 초에 불을 켜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 스푼처럼 생긴 멜팅 스푼을 올렸다.

작은 왁스 알갱이를 스푼에 넣어 잠시 기다리자 살살 녹기 시작했다.

마침 종이 위를 달리던 황제의 펜도 멈췄다.

봉투에 서류를 넣기를 기다려 스푼을 내밀자, 황제가 그 밑에 봉투를 두었다.

“···.”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스푼을 기울여 적당한 양의 왁스를 떨어뜨린다. 눅진한 왁스가 봉투의 경계선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황제는 조용히 그 위에 자신의 반지 인장을 눌렀다.

‘하아···.’

할 때마다 조금씩 긴장하게 된다.

처음에 할 때는 실패를 몇 번 했다. 꼭 왁스가 너무 많이 부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흐르는 거다.

미리 연습을 하고 실전에 들어갔는데도 몸이 어리다보니 조절이 어려웠다.

그래도 황제가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광폭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인내심이 있었어.

지금은 실수하는 일이 없다.

황제가 봉인한 봉투를 옆에 놓는 것을 보고, 루디는 다시 단을 내려왔다.

자신의 책상에 막 앉아 책을 펼쳤을 때,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외교쪽 일을 하는 관리가 들어왔다.

평상시보다 걸음이 약간 빠르고 왠지 서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제가 묻자, 관리는 두툼한 편지를 시종에게 건네며 말했다.

“디코콰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시종이 편지를 은쟁반에 담아 책상에 내려놓자, 황제는 관리에게 계속 말하라고 눈짓한 뒤 조용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관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살아남은 디코콰리아의 귀족 몇 명이 들고 일어난 모양입니다. 디코콰리아 외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지금쯤은 카니아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거로 추정됩니다.”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제가 물었다.

“다른 나라의 동향은?”

“소식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며칠 전까지는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원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되었느냐?”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 거기까지 소식이 닿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이라도 상관없으니 새로운 소식이 오면 곧바로 알려라.”

“예, 폐하.”

관리는 인사를 하고 곧바로 집무실을 나갔다.

루디는 가만히 책상 위를 노려보았다.

‘디코콰리아에서 반란이···.’

그 나라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보리스는 자세한 이야기는 피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디코콰리아는 현재 제대로 경작도 하지 못할 만큼 남자가 모자라다고 들었다. 남자도, 여자도 젊은 사람은 상당수가 노예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남자가 없으니 경작을 제대로 못하고, 경작을 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

남녀가 모두 모자라기 때문에 태어나는 아이의 수도 급감하여, 앞으로 인구가 늘어날 희망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사람이 죽어도 매장을 못해, 전염병이 도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카니아 왕국에서 통치하기 힘들 정도라고 하니 그 처참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슬슬 다른 나라에서 노리는 시기가 된 건지도 모른다.

본래부터 디코콰리아와의 전쟁 때문에 카니아도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제국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벌써 다른 나라가 넘보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제국 때문에 다른 나라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제국과 카니아 왕국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제국은 카니아를 도우면서 큰 대가 없이 노예만을 받기로 했지만, 진짜 바란 것은 마력소유의 귀족 노예였던 것 같다.

하지만  카니아에서 보내온 노예의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그나마도 1차, 2차 등의 납기일에 보내기로 한 숫자를 다 채우지 못한 데다, 젊고 건강한 노예의 수도 모자랐다고 한다.

제국과 카니아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손가락 빨고 구경만 하던 나라에서 움직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 금색 노예의 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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