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마음에 사는 아이 >
* * *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발견된 이후, 여러 달이 지났다.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다. 추운 지방에서는 벌써 눈이 내렸다고 들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공작의 후계자는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의국에서 지어주는 약이 효과 있는지 아직까지 크게 나빠졌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황제는 며칠에 한 번은 반드시 그 아이를 방문했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와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여럿 되었다.
황태자 로베르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조금이라도 빨리, 손 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되기 전에 스스로 말해야 한다.’
남에게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되면 후환을 우려한 아버지에게 죽는다. 아버지는 뒤에 불씨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면 시종장이, 아니면 또 다른 아버지의 추종자가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명을 내리지 않아도 입속의 혀처럼 움직이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아버지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해도, 혹은 죽일 생각이 없다 해도, 황제의 앞날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생명을 주저 없이 버린다.
그런 사람, 자신에게는 단 한 명 죽은 노예밖에 없었다.
로베르토는 문득 자신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시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그를 곁에서 보살핀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죽은 노예만큼은 아니라도 이 사람은 자신의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최소한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니다, 라고.
하지만 로베르토에게 매번 의국의 약을 건넨 사람은 이 시종이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며 약을 건넸다.
‘황궁의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시종은 황태자가 모든 걸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지만 담담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칼로 벤다 한들 꿈쩍도 하지 않을 거다.
황제를 위해 황태자의 몸에 약을 넣는 것 정도가 무어 대단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로베르토는 시종에게서 고개를 외면했다.
처음 위화감을 느낀 것은 황태자비가 어느 날 문득 말을 꺼냈을 때였다.
어째서 아이 소식이 없을까요.
슬프게 눈꺼풀을 내리며 말하는 황태자비의 말에 로베르토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별다른 위기감은 없었다.
로베르토에게는 아직 공식적인 후궁이 없다.
황태자비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네 번 아이를 낳아서, 살아남은 것은 딸 둘 뿐이었다. 딱 한 번 남아를 낳았지만 죽어서 태어났다.
황제가 아직 건재하고 그 후계자인 로베르토는 성인이다.
로베르토에게 생식 기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굳이 후사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서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보고, 그래도 황태자비가 황손을 낳지 못하면 첩비를 몇 명 들이자고 여러 해 전부터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서른 가까운 나이의 황태자가 후궁 한 명 두지 않는 것은 조금 드문 일이지만,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첩을 들이면 훗날 말썽이 생길 우려가 있다. 크게 이상한 일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발견된 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과 비슷한 시기에 머리 아픈 것이 멈췄다. 의국에서 보내는 약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입에 넣을 때 살짝 풍기는 미묘한 냄새.
색도 무게도 모양도 똑같은데 냄새만 약간 달랐다.
먼저 먹었던 약은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났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먹은 약도 비슷했지만 시큼함이 조금 덜했다.
그제야 두통이 시작된 것이 자신의 노예가 죽은 뒤부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뜻이다.
함부로 황태자의 몸에 이상을 초래할 약을 먹일 리 없으니 분명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황태자는 결함이다. 쓸모없다. 첩비를 몇 명 들여서 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불임이 치료될 가능성이 있다면 죽는다.
어머니 황후는 다른 아들에게 황태자 자리가 갈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
아버지 마음에 들어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일지, 아니면 금색 아이일지.
어쩌면 아버지는 그 아이들의 행방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로베르토가 의국의 약을 먹을 때부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 도착하였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걷다가 황제의 집무실을 지나칠 뻔했던 모양이다.
벽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와, 가끔 숨이 하얗게 공기 중에 퍼졌다.
로베르토는 숨을 약간 고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문이 열렸다.
로베르토가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아버지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온 것을 모르는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면회를 신청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그 때문인지 항상 집무실을 메우고 있던 관리들이 없다. 모두 자리를 피한 모양이다.
말을 걸어야 할까 망설이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급한 안건이니. 금방 끝난다.”
“예, 아버님.”
로베르토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멍하니 서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은 오랜만이다.
다른 때라면 바짝 긴장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버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조금 평온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시 펜을 움직이던 아버지가 머리를 들었다.
저절로 허리가 쭉 펴졌다. 몸이 긴장한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아버지가 일어났다.
“그쪽에 앉거라.”
“···.”
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아버지가 먼저 털썩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덥수룩한 수염 위에서 아버지의 눈이 예리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
손에서 땀이 약간 났다.
“할 얘기가 있다고?”
“예, 아버님.”
로베르토는 맞은편에 앉아 살며시 옆으로 내린 손에 힘을 주었다.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는 약간 숙였다.
로베르토는 바짝 마른 목구멍에 힘을 넣어 말을 꺼냈다.
“···저는···저에게는 황태자의 막중한 임무가 너무 무거운 듯합니다···.”
“···.”
아버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려움에 심장이 바짝바짝 조였다.
“···아버님, 저를 폐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황족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황족에서 내려 신하가 될 생각이냐?”
“···용서해주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
그냥 황태자에서 물러나 평범한 황자가 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누군가 다른 자가 황태자로 섰을 때 다시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예 황족이 아니게 되면 된다.
폐적하여 따로 공작이든 백작이든 맥이 끊긴 가문을 이어도 좋고, 다른 가문에 양자 형식으로 들어가도 된다. 그것도 안 된다면 평민으로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로베르토는 그저 황위 계승권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싶었다. 끝을 알고 있는데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이 몇 마디의 대화로 그의 마음을 모두 알았을 것이다.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무서워졌다.
이걸 바라던 것이 아니었나.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그의 완전한 죽음인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방해였을까. 어쩌면 오히려 이런 말을 꺼낸 것으로 아버지의 분노를 건드린 게 아닌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고 절망할 무렵에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황후는 네 생각을 알고 있느냐?”
“···아니요. 어머님은 아직.”
“그래, 황후에게는 아무 말 말라.”
“예.”
“···.”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온전히 받아 들여준 것일까. 이제 안심하고 남은 생을 살아도 되나.
이대로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 일어나 나가봐야 하는 건지조차도 모르겠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아버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 이야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다.”
“···예?”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로베르토, 소문을 듣고 그러는 것 같다만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아이는 몇 년 오지 않다가도 불쑥 태어나는 것이다.”
“···.”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자, 약간 피곤한 듯 아버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시간을 좀 두고 보자꾸나.”
“···.”
“너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다. 황후의 의향도 있을 것이고 황태자비의 처지도 있다. 네 몸 하나 움직이는 것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많으니 조급하게 생각 말아라.”
“···알겠습니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 당장이라도 폐적될 줄 알았는데, 아니 최소한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고한 것으로 폐태자에 대한 언급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근래에 카니아 주변이 시끄럽다, 심상치 않으니 잘 지켜봐야 한다고 몇 마디 한 뒤 물러가라는 허락을 내렸다.
조용히 일어나 몇 걸음 걷는데,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가 조용히 그를 보고 말했다.
“로베르토, 그 마음 변치 마라.”
“···.”
아, 그렇구나.
로베르토는 그 한 마디로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젠가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를 후계로 세울 작정이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닐 뿐.
로베르토는 고개를 약간 내렸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목이 약간 막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는데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로베르토, 나는 아들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내가 첫 번째로 얻은 자식이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거지. 나는 아직도 네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있구나.”
다정할 때의 아버지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시 몸을 돌려 걷는데 눈물 때문에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그를 보았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외면하고 복도를 걸었다.
시종이 조용히 뒤를 따라온다.
‘아버지.’
저토록 다정한 말을 하고, 아버지는 자신이 방해가 되면 망설임 없이 목을 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영원히 아버지처럼 되지 못할 테지.’
단순한 마력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후계자는 아마 당신을 똑같이 닮은 사람일 거다.
로베르토 자신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모습이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아이···.
문득 자신의 노예를 향해 망설임 없이 덤벼들던 금색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황태자가 나간 뒤, 시종장 레이놀드는 집무실 안쪽에 붙어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에 딸려 있는 문 뒤의 공간은 황제의 휴게실이다. 침대와 편안한 소파, 작은 욕실 등이 붙어있어서 일하다 피곤할 때 사용하고 있었다.
황제는 어느새 집무실 책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태자께서 생각을 잘 하셨습니다.”
레이놀드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본래부터 그다지 미련한 아이는 아니었지. 하지만 성정이 너무 약해.”
“···.”
“성격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 거다.”
“그랬으면 일이 좀 어려워졌겠지요.”
“글쎄.”
“마음이 아프십니까?”
레이놀드가 묻자, 황제가 펜을 놓고 두꺼운 배 위로 팔짱을 끼었다.
“모르겠어.”
“···.”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 쓸쓸한 처지가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아픈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저 아이는 그렇게 해서 살 수 있겠지.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다.”
레이놀드는 그게 어쩌면 단순한 황제의 바람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황태자는 성격이 유약한 편이라, 아버지는 물론 황후에게까지 기를 펴지 못했다. 황후의 행동에 따라서는 본심이 아니라도 질질 끌려갈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아마 성격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거다.
누가 좋아서 제 자식을 내치고 싶을까.
가끔 레이놀드는 이 뚱뚱한 권력자가 너무 불쌍해졌다. 사사로운 정 하나도 제 손으로 감춰줄 수 없는 권력자라니, 그게 정말로 권력이라 할 수 있는가.
황제는 머리를 가볍게 저어 잡생각을 내쫓고 고개를 들었다.
< 아버지의 마음에 사는 아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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