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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61화 (61/201)

< 허무한 까마귀 >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루디도, 레빈도 말이 없다.

다 토해냈기 때문에 속은 텅 비었는데 뭔가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보리스도 이날은 특히 음식을 권하지 않았다.

도르륵 굴러가는 마차의 진동이 엉덩이에 닿을 때마다 몸이 흔들리고, 지하 감옥에서 울부짖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내가 사는 곳은 이런 세상이었다.

루디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하늘은 티 하나 없이 천연스러운데 인간이 사는 세상은 이렇게나 왜곡되어 있다.

문득 눈이 보이지 않는 가짜 후계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제가 말을 걸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가짜라도, 정치 조각으로 사용되는 거라도, 그 아이에게 평화로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택에 도착하고 마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레빈이 말을 걸었다.

“루디님!”

핼쑥한 얼굴을 한 채 레빈이 억지로 웃는다.

“괜찮아요. 이런 건 금방 지나가 버리거든요. 한 달만 있으면 다 잊어버려요.”

뭐야, 그거.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레빈은 나름대로 루디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바보 같은 말이다.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 그걸 제대로 기억하라고 굳이 보리스가 보여준 건데.

혹시라도 진짜 레빈이 모두 잊어버릴까 걱정되어, 루디는 마차에 내린 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레빈, 잊어버리면 안 돼요. 지난번 대사 일처럼 모았다 한꺼번에 터뜨리지 말고 하나씩 기억했다가 차근차근 보복해야죠.”

레빈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아, 그건 제가 잘못한 거죠. 다음에는 절대로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요. 보리스 님한테도 정말 많이 혼났고. 루디님 말대로 하나씩 보복할게요. 응, 정말 그렇죠.”

레빈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동안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레빈이 마차에서 몸을 돌리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는지 몸을 구부리고 입을 막는다.

마부가 깜짝 놀라 급히 마차를 멈추었다.

레빈에게는 비극도 금방 희극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마차에서 내려 물을 약간 토해내고, 레빈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루디는 몸을 돌렸다.

막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까악, 까악, 새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까마귀 두 마리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

뭔가 좀 이상하다.

새라는 것이 사람한테 달려드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쩐지 저 까마귀는 루디를 목표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의 몸이 경직되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어 다른 한 마리도 뭔가 소리를 지르려는 듯 부리를 크게 벌리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새는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직파직, 하얀 불꽃이 허공에서 동그란 원을 그리며 튀었다.

불새가 까마귀를 죽인 모양이다.

재빨리 밖을 확인했지만, 마차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루디의 행동이 약간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루디의 눈앞으로 불새가 날아왔는지, 하얀 공간에서 파직 파직 불꽃이 튀었다.

마치, 내가 그런 것도 몰랐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알았어, 미안해.”

루디가 작게 말하자, 탁, 탁, 작게 불꽃이 튄다.

루디는 까마귀가 떨어진 자리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바닥에 축 늘어져 누운 까마귀는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새 같다.

한데 어째서 사람을 향해 덤벼든 걸까.

설마 이 세계의 새한테는 지구와 달리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종류도 있는 걸까.

아니면 갑자기 새가 미쳐버렸거나, 새로 저주 같은 걸 보내는 방법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법이 있는데 뭔들 없을까.

보이지 않는 뭔가가 루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기운이 어깨에서 느껴진다.

“뭔가 이상한 거였니?”

루디가 묻자, 포로롱 포로롱 공기가 진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해오는 느낌으로는 불새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단지 일반적인 새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불새가 반응했겠지.

뭔가 개운치 않다. 헝클어진 기분을 가지고, 루디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로 나디아 비마마가 나와 있었다.

무릎에 옷감이 있는 것을 보면 오늘은 볕이 좋아 밖에서 자수를 하는 모양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긴 황금 머리카락이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하고 있었다던데, 요즈음의 그녀는 항상 느슨한 차림이다.

황제도, 시녀도,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일 거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유모와 나디아 마마 뿐이었고, 지금은 마리와 어린아이 둘이 추가되었을 뿐이니까.

루디를 보고 나디아그라가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어도, 이십 대 중반인 그녀는 여전히 소녀 같다.

나디아 비가 자수를 하다 멈추고 루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코!”

오늘은 루디를 리코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루디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나디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머니한테 그런 예는 할 필요 없어요.”

나디아그라가 방긋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유모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앞으로 기울이고 비마마 옆에서 바느질을 하다 빙그레 웃었다.

“마마께서 네 셔츠의 자수를 다 끝내셨단다.”

나디아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그머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을 살짝 찌푸리고 말한다.

“아무리 유모라 해도 리코한테 그런 말투는 못 써요. 이 아이는 황제 폐하의 아이니까. 폐하께서 보시면 불경이 될 거야.”

유모가 약간 슬픈 표정이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예, 죄송합니다, 마마. 나이가 들다 보니.”

“괜찮아. 하지만 조심해줘요. 황후께서 아시면 큰일이니까. 유모가 또 끌려가면···.”

예전 일이 생각났는지 나디아그라의 눈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아이고, 마마!”

유모가 당황해서 나디아그라의 눈을 닦는다.

루디는 두 사람을 놔두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리리샤 공주는 유모 때문에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루디가 종종 데리고 나오게 된 이후로, 공주는 가끔 밖에서 놀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햇빛이 좋으니 나와 있을 법도 한데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보면 숨어있는 모양이다.

나디아그라가 깨어 있을 때는 리리샤 공주가 어디엔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키 높은 잡풀 사이로 리리샤 공주의 동그란 엉덩이가 보였다. 타조처럼 얼굴을 풀 사이에 숨기고 엉덩이는 바깥에 내밀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오래 밖에 계셨네요. 이제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마마.”

“···응.”

나디아그라는 어느새 루디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녀의 머릿속은 어느새 유모가 황후에게 끌려가 매를 맞았던 무렵으로 돌아가 있었다. 연신 유모에게 허리는 괜찮으냐, 의국에 약은 요청했느냐고 묻는다.

유모는 눈물이 글썽이는 나디아그라에게 그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유모가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 루디는 살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잡풀에 머리를 박고 있는 공주의 뒤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공주님! 뭐하세요?”

리리샤가 깜짝 놀라 머리를 들더니 작은 손가락을 입에 삐뚜름히 댔다.

“싯! 어마마 화내.”

“괜찮아요. 비마마는 이제 들어가셨어요. 저기 봐요.”

리리샤 공주가 루디의 몸을 잡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디아그라가 유모와 바느질감을 챙겨 저택으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리리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 보면 리리샤 공주는 그야말로 나디아 비마마를 빼닮았다.

어릴 때는 조금 못생겼나 싶었는데,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를 닮아간다. 다 크면 화려한 미인이 될 것 같다.

‘정말···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어가는 걸 보는 것 같네.’

왠지 감개무량이다.

리리샤 공주가 루디의 몸에 머리를 박으며 꽉 끌어안았다.

“루! 마법!”

이마를 쭉 내민다.

톡 튀어나온 하얀 이마에 살짝 키스하자, 리리샤가 다시 그의 몸에 얼굴을 비벼댔다.

“이마가 다 까지겠어요, 공주님.”

심하게 비비는 공주의 등을 토닥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하는 행동이 꼭 강아지와 고양이를 합쳐놓은 것 같다.

조금 전까지 심하게 헝클어져 있던 마음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 * *

“조심하세요, 노먼님. 밑에 돌이 있습니다.”

노먼의 손을 잡고 있던 시종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담겼다. 노먼은 시종의 손에 의지해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꽃향기가 사방에서 풍긴다.

“이쪽으로···. 바로 뒤에 의자가 있습니다.”

시종이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가 하라는 대로 몸을 내리자 폭신한 의자에 몸이 가라앉았다. 곧바로 따뜻한 이불이 무릎에 덮였다.

날은 따뜻하지만 그의 몸에는 자주 오한이 서린다. 그것을 잘 아는 시종이 무릎에 덮은 작은 이불을 꼭꼭 여몄다.

손에 따뜻한 잔이 쥐어졌다.

“꿀차입니다.”

시종의 따뜻한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시종이 잔을 쥔 그의 손등에 커다란 손을 덮었다.

자신의 힘은 거의 들이지 않은 상태로 따뜻한 잔이 움직이고, 한 모금씩 꿀차를 마신다.

몸이 작아 어리게 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올해 여덟 살이었다.

본래 살던 곳에서 도망칠 때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커다란 남자가 칼을 내리치는 것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눈에 들어왔던 칼이 이 세상에서 노먼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그날 이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노먼을 안고 도망친 사람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님이었다.

성에서 살 때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는 항상 함께 있었다.

형님은 본래 살고 있던 나라와 가문의 이름은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잊어버리라고 했다.

형님이 너무 무섭게 말했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는 한 번도 나라와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모른다.

형님은 약을 사오겠다며 낯선 남자의 집에 그를 맡기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매일 바뀌고 이상한 맛이 나는 액체를 먹게 되었다.

그때 항상 그의 옆에 있으며 다정하게 대해 준 남자가 바로 지금 옆에 있는 시종이다.

이 시종이 옆에 있게 된 뒤로 아픈 것이 많이 사라졌다.

때로 많이 아플 때에는 시종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해준다. 무서울 건 없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면 된다고 말한다.

노먼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따뜻한 햇살이 이마와 뺨을 향해 쏟아졌다.

더 이상은 배고프지 않다. 추운 곳에서 잘 필요도 없고, 눈을 파고드는 고통에 잠 못 드는 밤도 없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시종은 매우 쓴 액체를 마시게 하고, 아픔은 사라질 것이다.

시종이 하라는 대로 가끔 이렇게 밖으로 나와 햇빛을 받고, 황제 폐하가 오면 인사를 한다.

그러면 매일 이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쉴 수 있다. 시종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곳은 형님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힘들어도 잠시만 참아주세요.”

“···.”

시종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아팠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시종은 노먼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 앞에서 그래도 되는 걸까 걱정했지만, 시종이 그렇게 말하면 괜찮을 거다.

노먼이 일어나 기다리자, 몇 번이나 들어 익숙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앉아 있으라.”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에 놓였다.

황제의 손이다.

이곳에서 그를 만지는 것은 시종이 아니면 황제뿐이었다.

황제 폐하는 며칠에 한 번은 그를 찾아왔다. 와서 몇 가지 말을 하고 떠나간다.

그리고 가끔은 누군가가 몰래 들어오는 것 같다. 노먼을 에디에루 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은 금세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시종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노먼은 멍하니 있다가 시종이 자신을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 폐하는 가셨습니다. 오늘은 상태가 좀 좋은 것 같지만, 역시 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

눈에서 뭔가가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종이 천으로 살짝 눌러서 닦아준다.

하지만 아프지 않다.

“뭐가 재미있으신가요?”

“···.”

자기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시종의 물음에, 이번에는 입술을 약간 움직여 웃었다.

가끔 자신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우는지 웃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이전에 형님이 그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종이 일어나려고 하기에 손을 허우적거려 그를 잡았다.

아무도 없으면 무섭다.

“괜찮습니다. 잠시 연고를 가지러 가는 것뿐이에요.”

시종이 말하고 옆을 떠나고 잠시 뒤에 돌아왔다. 아프지 않도록 조심해서, 시종이 눈가에 약을 발랐다.

그 뒤로 노먼이 잠이 들 때까지, 시종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이 들기 직전, 노먼은 문득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알고 있어···에디에루는 와토린구 공작님의 도련님이야.’

도망나와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형님이 딱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나쁜 나라에서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를 찾고 있다고.

그때 형님이 그랬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에디에루 님은 좋은 대접을 받을 거다. 그분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니까. 우리는 잡히면 죽을 거야.]

형님은 아마 붙잡혔을 거야.

알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건 분명···.

“울지 마세요, 노먼님. 괜찮습니다.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시종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한 무섭지 않다.

···괜찮습니다···여기에 있으면 안전해요···괜찮습니다···안전해요···.

그 말을 되풀이 해 들으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 허무한 까마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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