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60화 (60/201)

<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

* * *

다른 시종들은 모두 제 볼일을 보러 떠나고, 루디는 레빈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뜻밖에 거기에는 보리스가 와 있었다.

보리스가 히죽 웃더니, 손짓해 루디를 불러 앉혔다.

방 안에는 보리스와 루디, 레빈 뿐이다.

시종 한 명이 남아있었지만 루디가 오자 보리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레빈에게는 방금의 접견에 대해서 대강 이야기했다.”

레빈의 얼굴이 시무룩하더니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보리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두 사람에게 질문을 해볼까. 오늘 접견했던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는 사람들에게 노먼이라는 가명으로 소개 되었지. 그건 어째서였을까?”

보리스의 시선이 먼저 레빈을 향했다.

레빈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더니 자신 없는 듯 대답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알리고 싶지 않다면 그냥 숨기면 되었을 테지. 루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가 가짜라는 사실을 황제가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하면 대답은 간단하다.

루디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중에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발뺌하기 위해서요.”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괜찮은 대답이구나. 그렇지만 조금 모자라. 루디, 너의 말은 그 아이가 가짜라는 걸 전제로 삼고 있지. 하지만 만일 진짜라면 어떨까?”

“···.”

그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걸까.

아이가 가짜라고 황제와 시종, 그리고 보리스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일 텐데.

루디가 대답하지 않자, 보리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만 해. 질문을 바꿔보자꾸나. 그 아이가 진짜건 가짜건 상관없이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라고 소개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보리스의 시선이 다시 레빈을 향한다. 레빈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걸어올 것 같아요. 저라면 분명히 그 아이를 원했을 테니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지. 사람들은 뭔가를 절실하게 원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기도 하지. 누구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후를 염려한다면 이 세상에 전쟁은 없을지 모른다.”

보리스가  이번에는 루디를 보았다.

루디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전쟁은 주저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가장 먼저 코레아 왕조 쪽에서 아이의 혈연이니 보호하고 싶다고 뭔가 걸어오지 않을까요?”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루디 네가 말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쪽에서 그 아이가 그저 노먼이라는 신분 불명의 아이라고 해 놓으면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해올 수 없지. 그리고 또?”

보리스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단순히 가짜이고 진짜라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문제를 꼬고 또 꼬아 물어본다.

노예와 시종이 이런 국제적인 정세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직업일까?

그런 생각이 묻어 나왔는지, 보리스가 손가락으로 루디와 레빈의 이마를 딱, 튕겼다.

“우선 루디, 너는 이러한 문제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금색 노예는 은색과는 다른 거야. 금색 노예는 비빈을 수십, 수백 명 만들 수 있는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단 몇 명밖에 만들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루디는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눈물 맺힌 눈으로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금색 노예인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게 왜인지 알겠느냐? 나 역시 처음 금색이 되었을 때부터 계속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야.”

보리스가 몸을 굽혀 루디의 눈을 보았다.

“금색 노예는 황제 옆에 머물면서 단순한 호위 역할도 하지만, 때로는 정치적인 면을 고려해서 스스로 황제를 돕기도 하는 존재다.”

보리스의 말에 의하면, 정치와 무술 뿐 아니라 문학, 음악 같은 예술을 비롯해서 여자들의 술수를 막는 방법까지 모두 익혀야 한단다.

아니, 그건 노예가 아닌데요.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자, 옆에서 레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 녀석, 전에도 말했지. 네가 더 급하다고.”

보리스가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레빈의 이마를 튕겼다.

“너는 외모가 뛰어나지. 그 때문에 벌어질 일이 앞으로도 한두 가지가 아닐 거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면 그야말로 네 삶은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몰라. 이것저것 배울 수 있을 때 배워두지 않으면 큰 코 다친다.”

보리스의 잔소리에 레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레빈은 의외로 몸을 움직이는 쪽이 더 잘 어울린다.

보리스와 레빈의 모습을 보던 루디의 머릿속에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보리스는 처음 두 사람의 공부를 맡았을 때 황태자와 시종장도 자신이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때는 둘 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했었지.’

예전에 보리스가 맡아서 가르쳤던 황제와 시종장, 그리고 지금의 루디와 레빈.

왠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설마···.’

루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잠깐이지만 미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 같다.

‘아니겠지. 내가 미쳤나 봐.’

루디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만에 하나 자신이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들켰다고 해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을 것이다.

보리스의 잔소리같은 교육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은근슬쩍, 이야기는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에서 제국 내 귀족들의 알력과 관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얼추 보리스와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루디는 계속 궁금하던 사실을 물었다.

“근데, 보리스님! 황제 폐하는 후계자가 가짜라는 걸 아시는 거죠?”

“그래, 잘 알아챘구나.”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굳이 가짜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나요?”

“몇 가지 이유가 있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진짜가 이미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은 아무도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를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정말 그뿐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보리스가 하는 말이 모두 정말인 걸까. 그 역시 뭔가 의도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루디와 레빈의 눈을 속일 가능성이 있다.

이미 레빈의 일로 보리스가 나름대로의 의도를 숨긴다는 걸 루디는 배웠다.

생각에 잠긴 루디의 얼굴을 보리스가 가만히 쳐다본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루디, 네가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닌 거 같구나. 너는 설마하니 그 아이의 처지를 폐하가 일부러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폐하가 가짜를 만들어 사용하는 거라고?”

“···.”

딱히 그 생각을 지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루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모든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라고.

“뭐,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은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거야. 그걸 이용하자고 생각하신 건 물론 폐하시지만.”

보리스가 마침 잘 되었다며 루디와 레빈을 데리고 건물을 나왔다.

마차를 타고, 황궁의 화려한 건물을 여러 개 지나 외곽에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겉으로 볼 때 평범한 황궁 건물의 하나로 보였다. 단지 다른 건물보다 조금 오래되어 보였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벽을 따라 빙 돌아 뒤편으로 향하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나왔다.

“따라 오너라.”

보리스가 두 사람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올라온다.

바람 때문에 벽에 걸린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시커먼 그림자가 커다랗게 검은 춤을 추었다.

깊숙이 내려갈수록 귀신 울음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아직 낮인데 창도 없는 돌 계단 밑은 시커멓다. 어디까지 가야 바닥이 나오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꽤 많이 내려왔다 생각할 즈음, 어디선가 남자의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레빈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보, 보리스 님! 저는 궁금하지 않은데···.저, 저는 그냥 올라가면 안 될까요?”

보리스가 기막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유령 코딱지 파먹는 소리를 하는 거냐. 시종으로 일하다 보면 앞으로는 이런 일도 보게 될 거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니까 잔소리 말고 따라 와.”

레빈이 울상을 하고 내려간다.

루디는 내려가다 문득 뒤를 보았다. 멀리에서 하얀 불꽃이 파직파직 일어났다. 불새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낸 불빛이다.

‘다행이다. 따라오고 있구나.’

불새가 등 뒤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귀신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귀신이 두려운 건 사람의 본능이다. 겁쟁이라서가 아니야.

아까부터 몸 주변에 뭔가가 스멀스멀 닿는 것 같은 느낌은 그냥 느낌일 것이다.

절대로 귀신이 아니다.

“···.”

앞서 가는 레빈과의 거리가 약간 벌어졌다.

루디는 서둘러 타박타박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단이 드디어 바닥에 이어졌다.

루디와 레빈은 어둠 속에서 길게 이어진 길과 양 옆에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 감옥을 쳐다 보았다.

“이곳은 한때 죄수를 가두고 고문하던 지하감옥이다. 내전이 있을 때마다 반역자와 정적을 가두어 두는 곳이기도 하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보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길게 이어진 지하 감옥의 창살 어딘가에서 남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레빈의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따라 오너라.”

“···.”

“···.”

보리스가 하라면 어쩔 수 없다. 하라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비어 있는 창살 감옥을 여러 개 지나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얼굴에 가죽으로 가면을 만들어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손에 빨래집게가 달린 것처럼 생긴 커다란 쇠 집게를 들고 있었다.

보리스를 보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보리스가 턱짓을 해 두 사람을 불렀다.

루디는 레빈과 함께 창살 앞에 섰다. 침을 꿀꺽 삼키고 창살 안에 시선을 주었다.

창살 너머 어두운 감옥 안에는 한 남자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허리와 팔다리가 가죽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쪽을 향해 앉은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레빈이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어렴풋한 횃불 아래, 남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쩌면 벌린 게 아니라 벌어진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로 벌렸다고 보기에는 너무 턱이 내려와 있다.

너덜너덜 살점이 떨어져 있다. 손톱만한 뭔가로 잡아 뜯은 것 같다.

남자의 벌어진 입안에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뽑힌 것 같다. 손가락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불명확한 발음으로, 누군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자신이 한 일을 되풀이해 고백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황제 폐하를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공범자는 없습니다···정말이에요···.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남자가 울면서 되풀이해 말한다.

아이처럼 우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지하를 올라왔을 때, 레빈은 바닥에 자신이 먹은 걸 모두 토해 놓았다.

루디는 토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커다랗게 벌어진 남자의 입이 여전히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보리스가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이 세상은 잔혹한 곳이다. 형제 간에도 칼을 쑤셔 박고 어제의 동맹이 오늘은 적이 된다. 너희가 죽이지 않으면 내일 그 사람이 네 딸, 네 아내, 네 어머니를 범하고 죽인다.”

더 이상 토할 것이 없는 레빈이 헛구역질을 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잔인하다.

루디는 눈을 꼭 감았다.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면 당한다. 너그럽게 용서하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등 뒤에 칼이 꽂힌다. 한 명이 덤비면 그 뒤에 있는 열 명이 덩달아 덤비게 된다. 그게 사람이야.”

보리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처음 너에게 덤빈 한 명을 해치우지 못하면 그 뒤에 백 명, 천 명이 덤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루디는 눈을 뜨고 보리스를 올려다 보았다.

감정 없는 보리스의 눈이 루디와 레빈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문득,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나무에 까마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까마귀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

하지만 뒤늦게 구역질이 몰려왔다.

루디는 허리를 구부리고 오늘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 놓았다.

<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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