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59화 (59/201)

< 가짜와 진짜 >

* * *

아직 어린 모습을 약간 남긴 시종이 들어와 황제가 곧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방에 있던 시종들은 모두 복도로 나가 죽 늘어섰다.

지난번에는 가장 끄트머리였지만, 오늘의 루디는 앞쪽이다. 황제의 가장 근처에서 시중을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뚱뚱한 몸을 화려한 옷으로 감싼 황제가 시종장과 여러 명의 문관을 거느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의 옆에는 파리한 얼굴을 한 황태자가 있었다.

악당처럼 존재감 있는 황제 옆에 서면, 황태자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종이인형처럼 보인다.

평상시에도 그런 편인데, 오늘은 더욱 심한 것 같다. 황태자의 표정이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곳곳에 서 있는 호위병이나 문을 여는 시종들은 황제가 근처로 와도 석상처럼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디와 함께 있던 시종들은 황제가 가까이 오자 머리를 조금 숙였다.

루디도 고개를 약간 내렸다.

시종 노릇이라는 게 그리 만만치 않아서 외워야 할 것이 많다.

고개를 내릴 때와 내려서는 안 되는 때는 물론이요, 때에 따라서 머리를 기울이는 각도도 모두 다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번에는 머리를 내려야 하는 경우였다.

루디의 시선이 바닥으로 항하고 약간 뒤, 황제의 발이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옆에 있던 시종이 살짝 그의 팔을 건드린다.

루디는 짧은 다리를 놀려 황제와 문관의 뒤를 따랐다.

접견실의 육중한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오늘의 접견은 비공식적인 거라고 하는데, 왜인지 입구는 물론이요 다른 쪽의 문도 활짝 열려 있다.

접견실 밖으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종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제국의 귀족이나 다른 나라의 대사들이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거라고 했다.

오늘의 접견은 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므로 행동에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약간의 실수 정도는 괜찮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루디는 살짝 눈동자만 굴려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귀족들의 모습은 대부분 남을 폄하하거나 깔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잘난 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꼭 굶주린 늑대들 같다. 아직 와토린구의 후계자라는 아이는 오지도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서 눈들이 벌게져 있었다.

루디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시종 한 명이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어깨를 건드렸다.

분명히 그의 등 뒤에 서 있는데 어떻게 알았던 걸까. 시종 노릇을 하려면 뒤통수로 표정을 알아내는 초능력을 익혀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는 마법이려나.

루디는 시선을 똑바로 했다.

황제가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황태자는 바로 옆자리였다.

루디의 자리는 황제의 오른쪽이다. 미리 들은 대로 황제의 의자 팔걸이 옆에 조용히 섰다.

루디의 반대편에 선 시종이 입구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접견실 입구에 석상처럼 서 있던 시종이 먼 거리에서도 그것을 알아보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타국에서 제국으로의 망명을 원하는 노먼은 들어오라!”

어째서일까. 와토린구 공작의 이름이 아니다.

루디는 가만히 문 너머 공간에 시선을 주었다.

성은 다소 좁은 복도로 이어진 공간도 있지만, 때로는 복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공간이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 공간을 나누는 문을 닫으면 방이 되고, 다시 문을 활짝 개방하면 복도나 큰 홀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였다.

이 접견실은 그런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방 중 하나다.

노먼이라고 불린, 와토린구의 가짜 후계자가 걸어올 공간 쪽으로는 각국의 대사와 제국 귀족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너른 복도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제일 앞에 작은 아이가 서고, 그 뒤를 여러 명의 시종과 호위 무관이 따랐다.

아이 바로 옆에는 시종 한 명이 손을 잡은 채 길을 이끌어주고 있었다.

아이는 다소 어설픈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맙소사!’

루디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안쪽에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 눈에 길게 칼로 베인 듯한 상처가 있었다.

눈 한 쪽은 움푹 꺼졌고, 화농했는지 상처 주변이 지저분했다. 피고름이 눈 밑에 조금 맺혀 있다.

얼굴이 하얗고 사랑스럽다 보니 더욱 상처가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를 한 아이는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몸을 휘감았지만, 노예 시절 만났던 사람들처럼 빼빼 말라 있었다. 너무 몸이 말라 옷이 무거워 보일 정도였다.

시종이 아이 몸을 거의 지탱하듯이 돕고 있지만 힘에 겨운 것 같다.

걸을 때마다 붉은 입술이 열에 들뜬 것처럼 약간 벌어져, 가끔씩 색색 숨을 쉬었다.

하지만 멀찍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런 아이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다.”

“정말 와토린구의 후계자인가.”

“코레아 왕조까지 손에 넣다니···.”

“서둘러 본국에 알려야만···.”

사람들의 주목 속에서, 아이는 오랜 시간을 들여 복도를 걸어왔다.

아이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올 무렵,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리한 얼굴로 아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는 거구의 몸을 조용히 움직여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 앞에 도착하기 전, 황제는 일부러 약간 발소리를 냈다.

예전에 맹인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걸까. 안하무인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을 한다.

아이를 부축한 시종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먼 님, 황제 폐하께서 앞에 계십니다.”

노먼이라 불린 검은 머리의 아이가 약간 당황한 듯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다리가 약간 옆으로 나가고, 손이 원을 그리며 밑으로 내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발이 움직였다.

본래는 모자를 들고 하는 동작이지만 아이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어쩌면 검은 머리를 사람들에게 더욱 드러내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가슴에 한 손을 대고, 허리를 약간 굽힌 채 잠시 동작을 멈췄다.

우아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행동에는 귀족의 예절이 배어 있었다.

디코콰리아 출신이라면 어릴 때 타국으로 건너가 떠돌았을 테니, 누군지 몰라도 아이에게 따로 귀족의 몸가짐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특하구나. 먼 길 수고했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가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사소한 행동에서 약간 어설펐다.

황제가 손을 약간 앞으로 내밀자, 시종이 아이의 손을 건네주었다.

“노먼, 지금부터는 아무 걱정도 할 것 없다. 너에게 최고의 의사를 붙여주마. 너는 그저 마음 편히 이곳에서 쉬면 될 것이다.”

황제가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접견실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접견실 가운데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노먼을 위해 준비한 듯 보이는 작은 의자도 있다.

시종 한 명이 음료와 약간의 다과가 든 쟁반을 들고 그쪽으로 향했다.

루디도 짧은 다리를 놀려 황제의 곁으로 갔다.

그는 오늘 접견실에 머무는 동안 계속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한다. 아무 말 없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미리 듣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노먼을 의자에 안내해 앉히고, 자신은 그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문 모양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당황한 듯 웅성거렸다.

황태자는 여전히 석상처럼 앉아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놀란 것 같았다.

황제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아이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노먼이 긴장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대답했다.

시종이 자연스럽게 쟁반을 내밀어 아이와 황제 앞에 음료와 간식거리를 놓았다.

간식은 아이를 염두에 둔 것인지 하나하나가 매우 작았다. 손에 묻지 않는 과자류였다.

루디는 미리 들었던 대로, 황제의 시선이 움직이자 재빨리 컵을 들어 그 손 가까이로 가져갔다.

황제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아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힘든 일은 없었는지, 뭔가 바라는 것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다.

아이는 약간 긴장한 것 같지만 큰 무리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루디는 황제가 아이에게 공작가에 대해 묻거나 그쪽을 연상케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아이가 경험한 일에 대해서만 물었을 뿐이다.

어쩌면 아이는 자신이 공작가의 후계자로 이 자리에 왔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이가 뭔가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 근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

아이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접견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황태자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는 옆에 서 있는 루디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작았다.

“···.”

일부러 아이 귀에 속삭이는 황제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황제는 일부러 의미 있어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황제도, 시종들도, 모두 이 아이가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구나. 알면서 이용하는 거야.’

어쩌면, 황태자만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번 황제에게 자신의 노예를 살해당한 그라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전혀 모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루디는 꼿꼿이 선 채 몇 번인가 황제의 손에서 잔을 받고, 다시 되돌렸다.

시종이 여러 번 아이 입에 과자를 넣어주거나 음료를 먹였다.

그때마다 황제가 의미있게 히죽 웃으며 뭔가 묻는다. 맛이 있느냐, 혹시 이런 걸 먹어 본 적이 있었느냐, 그런 말들이었다.

아이는 그때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꼬박꼬박 질문에 대답했다.

황제도 가끔 아이 말에 그럴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찍이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와토린구 공작가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누가 감히 황제가 듣고 있는 말이 고작해야 너무 맛이 있는 과자다, 라거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이라는 대답이라고 생각할까.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중, 아이의 시중을 들던 시종이 황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루디가 살짝 시선을 옮기자, 아이의 이마가 보였다. 아주 조금이지만 얼굴에 칠해진 백분이 땀 때문에 얼룩져 있었다.

황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피곤한 모양이구나.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 이제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황제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황제의 방향을 향해 절을 한 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시종이 옆에서 도왔다.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몸을 돌리던 황제의 시선이 잠시 루디의 얼굴에 머물렀다.

고개를 약간 내리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나디아는 잘 있느냐.”

“예, 폐하. 항상 폐하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래. 나도 종종 그녀가 그립구나.”

왠지 조금 쓸쓸한 목소리였다.

황제는 루디에게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황태자가 백짓장 같은 얼굴로 일어나 황제의 뒤를 따르다 문득 아이를 보았다.

노먼은 어느새 시종에게 안겨 있었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이의 머리가 시종의 어깨에 떨어졌다.

아이를 어르는 것이 익숙한 듯 시종이 한 팔로 아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등을 조금 두드렸다.

루디는 약간 멈칫했다.

잠깐이지만 아이를 보는 황태자의 눈동자에 살의가 스며 있었다.

어째서?

황태자가 저 아이를 적대시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눈빛은 금세 사라지고, 황태자는 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조용히 복도로 나가버렸다.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시종은 아이를 안고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아이의 움직임을 따라 방향을 꺾는다.

몇몇은 조금이라도 아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가다 호위 무관에게 제지를 당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과 타국의 대사들은 허둥지둥 건물을 떠나갔다. 모두 본국이나 자신의 영지 등에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 모양이다.

누구나 저 아이가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게 아이에게 행복이 될지, 불행한 일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전의 그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속이는 행위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의 현실을 안다.

아이의 몰골을 보면 분명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이 뒤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이라면 아이는 따뜻한 건물에서 좋은 음식과 약을 먹으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의료 사정을 생각하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의외로 싱겁게 죽어버린다. 아이의 상처는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더욱···.’

루디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당장 눈앞에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은 짐승과 다름없어진다.

인간의 존엄, 자존심, 행복 추구 같은 건 굶주림과 추위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겪어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루디는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무슨 생각이지?’

황제는 저 아이가 가짜라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한데 왜 이렇게 진짜인 척 사람들을 속이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로 하여금 저 아이가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가짜와 진짜 > 끝

(5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