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지나면 겨울은 코앞, 이곳을 나가야 한다 >
* * *
거대한 오징어에 몸이 친친 감겼다. 꼼짝할 수 없다. 오징어의 말랑말랑한 다리가 얼굴로 기어와 입을 막았다.
숨을 쉴 수 없다.
루디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읍읍, 신음소리를 흘리다 번쩍 눈을 떴다.
아직도 캄캄한 밤이었다.
내 코가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사방은 어두웠다.
루디는 가만히 몸을 굳힌 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두웠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은 감각을 잃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종종 기억조차 애매해졌다.
아직도 꿈속인지, 지금이 악몽을 꾸고 깨어나 지구의 집에 있는 건지, 아니면 노예상에게 잡혀가 창살 안에 있는 건지, 잠시 동안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느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서 있는 곳을 잃어 버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침착하게···침착하게···.’
루디는 마음을 진정시키다, 자신이 어째서 잠에서 깨어났는지 깨달았다.
뭔가에 얼굴이 눌려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부드럽다.
보들보들 말랑말랑한 살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아···.’
그 보드라운 것이 사람의 살갗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정체를 알았다.
리리샤 공주다.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은 요즘 들어 부쩍 통통해진 공주의 뱃살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작은 뭔가가 그의 얼굴 가장자리에 늘어져 있었다.
‘이건 발이구나.’
공주가 뒹굴뒹굴 굴러다니다 루디의 얼굴에 올라탄 것 같다.
공주는 잠버릇이 고약하다.
꽁꽁 묶여서 옴짝달싹 못하고 자던 때가 억울한 건지, 잠이 들 때는 똑바로인데 몇 시간 지나면 거꾸로 누워있거나 데굴데굴 굴러서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리리샤 공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내려주자 이번에는 작은 손이 철썩 올라와 루디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깨버린 걸까 생각했지만, 공주는 동작을 멈추고 파아···파아···입을 벌리고 숨소리를 냈다.
허공에서 하얀 불꽃이 파르르 일더니 깃털이 날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의 얼굴 쪽으로 내려왔다.
모습을 감춘 불새다.
반딧불이가 깜박이는 것처럼 희미하게 불새가 있는 곳이 밝아졌다.
루디는 공주의 몸을 내리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조용히 일어나 창으로 가 커튼을 조금 젖혔다. 어둠 속으로 옅은 빛이 스며 들어왔다.
불새가 조용히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어깨가 따스하다.
밤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반짝거리고 휘영청 밝은 달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직 깨어날 때는 멀었다. 그래도 다시 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루디는 조용히 커튼을 닫고 몸을 돌렸다. 음식 창고 쪽으로 나가자, 염소가 그를 보고 매애애, 울면서 다가왔다.
끈으로 묶어두지 않아도 염소는 이제 도망가지 않는다.
닭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자신들에게 맛있는 걸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덕분이다.
루디는 불새가 밝히는 옅은 불빛 아래서, 염소에게 별식으로 사용하는 옥수수 사료를 조금 주었다.
노예인 마리가 평민들 사이에서 요즘 기르기 시작한 거라고 알려준 옥수수 줄기다.
옥수수는 아직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기 때문에 근래 들어 많이 기르고 있다고 한다.
얘기를 듣자마자 부라도프에게 부탁해 옥수수를 들여왔다. 작년에 처음 재배를 시작했는데 특별히 손대지 않아도 잘 컸다.
다만 벌레가 많다.
처음에는 그게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다른 곳의 벌레가 모조리 옥수수에게 가는 모양이었다.
다른 작물에 벌레 피해가 적어서 오히려 득이 되었다.
수확 시기에 줄기를 말려서 염소 사료로 사용하고 있다.
루디의 눈에는 이거나 저거나 다 똑같은 풀인것 같은데, 이상하게 염소가 좋아한다.
여러 번 염소 먹이 통에 옥수수 사료를 옮긴 뒤, 닭을 위해서는 잡곡을 약간 바닥에 뿌렸다.
날개를 퍼덕이며 닭이 몰려와 연신 머리를 바닥에 내려 땅을 콕콕 찍었다.
여자들만 있는 이 저택에서 루디가 해야 할 일은 나날이 늘고 있다.
마리가 장작을 패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렇다.
요즘 들어 장작으로 오는 나무가 자르지 않은 채 통째로 도착한다든가, 밀가루 푸대 안에 개구리가 들어있다든가 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 때문에 마리가 장작 패기에 나섰다.
부라도프가 신경을 덜 쓰게 되면서 다시 괴롭힘이 시작된 거라고 유모가 분개하고 있었다.
마리가 없으면 이곳 사람들은 당장 굶어 죽을 판이다.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노예인 마리의 위치가 가장 하단이지만, 오랫동안 외로이 살아서인지 아니면 마리 덕분에 먹고 산다는 사실 때문인지 유모는 그녀를 평범한 평민으로 대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하단이지만, 귀족이 노예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요즘에는 공주님을 돌보는 일에 마리가 필수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와 유모의 사이는 더욱 좋아졌다.
비마마는 마이웨이, 누가 와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이 저택은 평화롭다.
다른 가축의 먹이를 챙긴 뒤, 빨래가 들어있는 통으로 가서 물 마도구의 세탁 기능을 돌려놓는다. 마리가 세탁부에 보내려고 한 세탁물을 몰래 빼돌려 놓은 것이다.
그가 마법식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기 때문에 마리는 여전히 세탁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본래 빨래는 후궁의 세탁부 하녀가 모아서 세탁한 뒤 가져다 놓는 게 원칙이다.
물론 이곳에 그런 원칙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마리가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너무 큰 빨래는 드물게 하녀가 왔을 때 세탁부에 보내지만, 그 세탁물이 제대로 돌아오는지는 운에 맡겨야 했다. 어떤 때는 한 달 뒤에 돌아오고, 어떤 때는 아예 행방불명이 된다.
그래서 가끔 루디는 하녀가 세탁물을 가져가는 날 들키지 않게 중요한 빨래는 통에 숨겨둔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세탁해놓았다.
세탁물이 젖은 채 돌아오거나 구겨진 상태로 이곳에 방치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시기만 잘 맞추면 들키지 않는다.
다른 일을 조금 하고 돌아오니 세탁이 모두 끝나 있었다.
루디는 불마도구를 넣어 건조한 뒤 세탁물을 다른 통에 하나씩 옮겨두었다.
그렇게 하면 마리는 세탁물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알아서 치운다. “왜 이런데 방치하는 거야!”라고 화를 내면서.
그 일을 떠올리고, 루디는 약간 웃었다.
저택 안에서는 싸구려 노예 목걸이로 만든 전등과 난방을 사용하지만, 마도구에 익숙하지 않은 마리는 노예 목걸이로 만든 마도구가 무엇이 이상한지 잘 모른다.
유모는 그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시종장의 음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있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언제 이 비밀이 들통날까 굉장히 불안했었다.
혹시 들통 나 카니아 왕국으로 되돌려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눈으로 보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걸 조금 알기 때문에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와토린구와 코레아 혈통이라는 건 문장이 없으니 들키지 않을 테고, 마력 소유 라는 게 들통 나면 기껏해야 황족이나 귀족의 아이 낳는 기계로 전락할 뿐이다.
행복은 바랄 수 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운명은 사라진 셈이다.
도망치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어린아이인 채로 세상에 나갈 수는 없다. 아무리 마력이 있어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열서너 살 정도는 되어야겠지.’
이 나라의 성인은 열 다섯 살을 기준으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현대의 성인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
어린 나이에 상인이나 장인의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다 겨우 한몫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컸다. 그 뒤로도 혼자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한참 더 걸린다.
루디는 어깨를 움찔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인맥, 혈맥이다.
농부의 자식이 상인이나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인맥을 더듬고 더듬어서 그 밑에 제자로 들어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거기에서 제일 먼저 탈락한다. 인맥과 핏줄 자체가 권력인 셈이다.
그런 사회이다 보니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루디가 혼자 세상에 나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마력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도적이 되지 않는 이상, 뭐라도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이런 아이의 몸으로는 그런 방법을 마련할 도리가 없었다.
낯선 아이에게 일자리를 줄 사람은 없다.
기껏해야 농부의 집에 들어가 소 돼지 밥이나 주는 농노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장인의 집에서 뒤치닥거리하는 하인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인의 제자? 어림도 없지.
돈 주고 일을 맡길 사람? 당연히 없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나는 일 할 수 있음”이라고 어필해봐야 어린아이다.
뭔가 일을 주겠다고 나선다면, 그건 인신매매범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똘똘한 녀석을 어딘가 변태에게 팔아넘길 작정이겠지.
‘하아.’
루디는 한숨을 쉬고 허리를 폈다.
생각해보면 노예상에서 이상한 곳으로 팔리지 않고 황궁으로 온 건, 정말 운이 좋았구나.
그 노예상에게는 절을 해도 모자랄 것 같다.
나중에 또 싸구려 노예 목걸이를 사게 되면 값은 후하게 쳐주자.
이제 슬슬 나갈 시간이 되었다. 루디는 젖은 수건으로 몸을 대강 닦았다.
오늘은 훈련장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황제에게 가야 한다. 레빈은 보리스와 함께 훈련장에 남는다. 공작의 후계자를 만나는 자리에는 루디만 불렸다.
지난 번은 그저 장식품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니, 사실상 이번이 금색 노예로서 하는 첫 번째 일이다.
황제 폐하의 음료수 담당이라고 한다.
어제 오후에 이 일을 전하러 온 부라도프에게서 어떤 일을 하는지 대강 들었다.
실제로 일 다운 일은 다른 시종이 모두 한다.
루디가 하는 일은 간단하게 말하면 음료수를 들고 있는, 살아있는 컵걸이였다.
황제가 뭔가 마시다가 컵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그걸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먹으려고 하면 손에 들기 편한 위치에 컵을 대주면 된다.
매번 그런 일을 하는 시동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린 나이에 일하러 들어온 시종 중에서 일을 가장 잘하는 아이가 가끔 그 일을 맡는다.
보통은 그런 아이가 나중에 황제 전용의 시종이 된다고 하니, 일종의 특진이었다.
약간의 보상 겸 칭찬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웃고 넘어가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들었다.
부라도프는 금색 노예로 적응하기 위한 첫 단계라고 말하며, 앞으로도 종종 그런 식으로 황제의 시중을 들게 될 거라고 했다.
‘하아.’
열심히 하자.
모처럼 안전한 거처를 찾았다. 이걸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더 나쁜 처지가 될 가능성이 훨씬 많았다.
“···.”
황제한테도 잘하자.
여기 온 덕분에 바깥에 있었으면 할 수 없었던 준비를 할 수 있는 거다.
마잉크를 손에 넣은 덕분에 마생물을 만들고, 마도구를 다루는 법도 연구할 수 있었다.
보리스라는 스승을 만나 무기 다루는 법도 배웠다.
이 정도면 나중에 용병 같은 거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황궁에 있으면 돈도 나온다.
황궁에서 나디아 마마에게 나오는 돈은 현물로 받아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다.
일부는 저택 후원 바닥 곳곳에 묻어두고, 일부는 언젠가 이곳을 나가게 될 마리를 위해 준비해두었다.
또 일부는 자신에게 쓰기 위해 저택에서 약간 먼 곳에 묻었다. 7살이 되어 이곳을 나가더라도 뭔가 이유를 붙여 캐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직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노예상과의 면회도 신청해두었다.
노예 목걸이를 사려는 목적 외에도, 노예상을 통해 마리와 자신을 위해 바깥에 있을 곳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돈을 조금씩 바깥으로 빼돌려야 한다. 아직 자신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도, 돈을 옮길 방편도 없지만 언젠가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문득 저택을 돌아보고, 루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차곡차곡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지만···.
7살이 되면 루디는 이곳을 나가야 한다. 멀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봄이 지나면 겨울은 코앞일 것이다.
나중에 그가 이곳을 나오면 이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리와는 연락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그녀를 위해 외부에 집과 돈을 마련해도, 그것을 누릴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건 아닐까?
공주는? 비마마는? 유모는?
‘사실 공주와 비마마가 가장 걱정이구나.’
황제와 황후의 마음 하나로 처지가 뒤바뀌는 그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루디는 머리를 털어 생각을 비웠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는데, 마리가 눈을 비비며 내려왔다.
“이제 가시는 거예요?”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루디님.”
“마리도 오늘 수고해요.”
“네.”
마리가 머리를 끈으로 묶으면서 웃는다.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자, 레빈이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루디가 올라타자 작은 마차가 도르륵 도르륵 작은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 봄이 지나면 겨울은 코앞, 이곳을 나가야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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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