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짜 후계자 >
* * *
와토란구 공작의 후계자라는 귀족 아이는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어딘가 도시에 들릴 때마다 그곳의 의사가 아이의 마차에 들락날락거렸다.
아스란은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대강 닦았다.
동료 몇 명은 근처 우거진 풀 사이에 들어가 볼일이 한창이다.
아스란도 사람이 뜸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 들어가 앉아 바지를 벗는데 귀족 아이를 발견해 고발한 남자가 근처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도 방금 식사를 마친 모양이다. 불안한 모습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남자 뒤에 병사 한 명이 바짝 붙어 있었다.
허긴, 돈준다고 해서 고발했더니 먼 곳까지 끌려오지를 않나, 똥 싸는 데까지 병사가 붙어올 정도로 감시 받지 않나, 불안하기도 하겠다.
귀족 아이는 디코콰리아가 카니아 왕국에 패한 뒤 계속 타국을 떠돌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붙어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모두 죽었는지, 아니면 버리고 도망갔는지 혼자만 남은 걸 발견했다고 들었다.
아이를 발견한 남자가 현상금 소문을 듣고 국경에 있는 제국의 병사에게 고발했다고 한다.
보통이라면 아이만 제국으로 데려갈 텐데, 왜인지 고발자까지 함께 이송하게 되었다.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스란 같은 말단 병사로서는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그런 것 따위야 나랑은 상관없는데.’
아스란은 볼일을 마치고 수풀에서 나오면서 근처 나무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보았다.
디코콰리아에서 이웃 나라로 가는 동안에도 까마귀가 보이더니, 지금은 제국에서도 보인다.
이쪽에는 시체가 없으니 기괴함은 조금 덜하지만 오직 움직이는 사람만 쳐다보는 까마귀가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분 나쁘다.
까마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키가 작은 사람이 있으면 훌쩍 그 근처로 날아갔다.
그리고 더 이상 꺾어지지 않을 만큼 고개를 기울인다. 눈을 깜박이면서 조금이라도 자세히 확인하려는 듯 동그란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거다.
때로는 아이, 때로는 허리가 굽은 노인, 또 때로는 보통보다 많이 작은 사람.
마치 까마귀가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얼굴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인지.’
아스란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까마귀가 마녀의 심부름꾼이라는 소문이 떠돌아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솔직히 마녀가 정말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다들 마녀는 무섭다, 마녀는 저주를 내린다고 말하지만 그의 주변에서 실제로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저 무성하게 소문만 떠돌았다.
‘그딴 게 정말 있는지 누가 알겠어.’
이가 근질근질하다.
아스란은 식사 후에는 항상 물고 있는 식물 줄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할머니가 만든 짧은 나무줄기는 이 닦는 대용으로 항상 휴대하고 있다.
할 알이 없어 심심할 때도 입에 넣고 씹으면 약간 달콤한 물이 나오면서 이빨 안에 낀 찌꺼기를 청소해준다.
‘뭐, 그래 봐야 나이 들면 다 썩어 빠져버리지만.’
씹어 물렁해진 나무줄기를 바닥에 뱉어 버리고 새로운 줄기를 입에 넣었다.
어느새 그들의 부대는 제국의 수도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 * *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수도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느리다.
본래라면 아침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이의 상태가 조금 나빠졌다고 한다.
레이놀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서두르다 아이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후계자는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처음 진단했던 의사는 마차 여행은 커녕 며칠 살지도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걸 살려내 여기까지 끌고 오게 했으니, 제국과 작은 나라의 의사라는 실력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파블로의 약은 정말 대단하다.
호송 책임자가 보낸 서신에 따르면 약을 먹인 처음 이틀은 갑자기 잠만 자는 것처럼 보이더니, 제국에 도착할 무렵에는 조금이라면 마차에서 내려 걸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서신을 보낼 무렵에는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파블로가 말한 대로였다.
그 상태에서 무리하면 죽는다고 신신당부했으므로, 호송 책임자의 판단은 매우 옳았다.
레이놀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황후의 초대를 받고 그녀의 처소 쪽에 가 있었다.
황후가 사는 곳은 후궁이 아니다.
황궁의 건물은 정 중앙에 있는 황제의 침실을 기준으로 하여 엎어진’ㄷ’자 형태를 하고 있다.
황후의 침실과 여러 공간은 그 건물의 왼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후궁에 가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황후의 침실은 걸어서도 이동이 가능하다.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시종 한 명이 마주온다. 황제의 옆에 붙였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시종이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마마와 함께 후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황후와 보내는 시간은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바쁜 일상 중에 간신히 짜낸 시간이다. 그 이상을 소비하면 취침 시간을 깎아야 한다.
‘황후가 그대로 보내기 싫어했나 보군.’
누구보다 황제가 빠듯하게 일상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면서 욕심이다. 레이놀드는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후원으로 향한다.
황후의 처소가 있는 건물 뒤쪽으로 빠져 잘 가꿔진 나무와 꽃을 지나쳤다.
봄이 막 시작되는 시기라 꽃 향기가 강하다.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자 황제와 황후를 모시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인사에 답하며 시선을 안쪽으로 보내니,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화목한 모습으로 붉은 노을이 은은하게 쏟아지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
레이놀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두 사람을 보았다.
황제의 눈썹이 부드럽다.
황후를 바라보는 시선은 연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어쩌면 폐하는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이 세상 누구보다도 황제를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어쩌면 레이놀드도 그를 잘 모르는 건지 모른다.
황제의 삶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누구보다 풍요롭지만, 동시에 그 어떤 이보다 가진 것이 빈약한 사람 역시 황제였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황제에게 개인적인 시간은 일체 없다. 몇 년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개인의 소망과 국익이 충돌하면 국가를 위해 원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없다. 누구나 그게 황제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으로의 황제는 억울하고 서러운데 아무에게도 그걸 말할 수 없다.
그런 일상을 잠시나마 바꾼 게 보리스였다.
보리스는 한정된 상황에서라고는 해도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제 맘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 시절이 황제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보리스를 좋아하는 건 아마 그래서일거다.
‘만일 황제께서 황후를 사랑한다면···.’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고,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타인이 접근하지 못할 뭔가가 있었다.
지금까지 황제는 여러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때로는 황태자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려왔다.
하지만 황후 와의 사이에 금이 갈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다. 항상 교묘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단순한 마음의 변심이 아니라, 황제는 명확하게 정치적으로 그녀를 배제하고 있다.
그 사실을 황후가 알아차리는 순간, 둘 사이의 화목함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황후는 황제의 행동을 배신이라 볼 것이다.
레이놀드는 차마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고 잠시 서서 기다렸다.
지금의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황제다.
그런 시간을 예정보다 조금 더 황후에게 주는 것은, 오랫동안 동맹 관계에 있던 배우자에게 고하는 마지막 사랑의 말일지도 모르겠다.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시종이 등을 가지고 황제와 황후를 모셨다.
광대한 후원을 다 돌지 못하고 되돌아오면서,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황후를 에스코트 하는 황제의 손은 한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놀드가 도착한 것은 이미 알았을 텐데,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온 뒤에야 황제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종장이 도착했구려.”
황제의 말에 황후가 입을 열었다.
“소첩이 무례하게 폐하의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을 무리하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사랑하는 황후와의 시간은 항상 내게 힘을 주지. 그대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콤한 말을 내뱉는 황제의 눈동자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아까 레이놀드가 보았던 부드러운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그는 레이놀드가 익히 알고 있는 여느 때의 황제였다.
*
황후와 시간을 보낸 탓에 황제는 다른 때보다 만찬 시간을 짧게 가졌다.
그렇게 해도 그 이후의 저녁 집무에는 평상시보다 30분 이상의 시간이 더 걸렸다.
황제의 피곤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일을 모두 끝내고 침실로 돌아가자, 레이놀드는 다른 시종을 모두 내보냈다.
방 안에 둘만 남은 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수도 근처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올리자,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계자가 가짜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처음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문장관을 급파해 배꼽 위의 문장이 진짜인지를 확인했다.
문장은 정교하게 만든 가짜였다.
그냥 지워지는 잉크도 아니고, 문신으로 새긴 것이다.
나중에 보낸 조사관에 의하면 이국이나 바이킹의 기술을 이용한 것 같다고 했다.
머리는 검은색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염색이었다. 피부에 가까운 쪽은 군데군데 진한 갈색이었다고 한다.
눈은 숨길 수 없었을 테지만,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상처로 인해 확인이 불가능했다. 아이의 두 눈은 칼로 베어져 있었다.
아이는 생명이 아직 붙어 있는 게 용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와토린구의 후계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몇몇 왕국에서 아이를 빼앗기 위해 첩보 부대를 보낸 정황도 드러났다. 카니아 왕국에서도 그 아이를 빼돌리기 위해 그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자도 분명 있었겠지만,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유혹이다.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그 아이에게 쏠렸다.
그 아이가 와토린구 공작가의 후계자라고 누구나 확신한다면, 훗날 루디가 눈에 띄어도 코레아의 문장을 탐내는 사람은 없어진다.
그걸 활용하자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 아이를 황궁에서 명실상부한 공작가의 후계자로 소개해 루디의 존재를 감추기로 결정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황제가 머리를 들었다.
“레이놀드, 내일 루디를 시동으로 참석시켜라.”
황제의 말에, 시종장 레이놀드의 눈썹이 약간 움찔했다.
“폐하, 그래도 되겠습니까? 보리스는 그 아이를 몰아쳐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지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금색 노예로의 일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겠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황제가 눈썹을 약간 눕혔다.
“보리스는 발견된 후계자가 가짜라는 걸 그 아이도 아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내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다.”
“···.”
“레이, 보리스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야. 와토린구 공작은 코레아 공주와 혼인한 뒤 여자들과의 관계를 끊었지. 비슷한 나이의 사생아가 있었을 확률은 거의 없어.”
황제는 어두운 얼굴로 손에 깍지를 끼었다. 턱을 그 위에 괴고 물끄러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 루디가 정말로 와토린구의 후계자인지 아닌지에 따라 앞으로의 대처도 달라진다. 내가 계속 지켜볼 수는 없으니, 손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거야.”
“알겠습니다.”
레이놀드는 고개를 약간 내렸다.
“그날 폐하의 음료 담당으로 참석시키지요. 그러면 바로 옆에 있을 테니 관찰하기에도 편하실 겁니다.”
“그래.”
황제가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을 보고, 레이놀드는 술이 들어있는 진열장에서 목이 긴 병을 하나 꺼냈다.
“약을 좀 드시겠습니까?”
“아, 좀 먹는 게 좋겠네.”
“···.”
아까부터 황제의 호흡이 괴로워 보였다.
역시,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레이놀드는 약이 든 병을 기울여 숟가락 하나 만큼의 분량을 작은 잔에 따랐다.
이것은 평상시에 매일 먹는 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가끔 많이 괴로울 때만 먹는다.
옆에는 달콤한 과일물을 두었다.
황제는 약을 한숨에 들이켠 뒤 옆에 놓인 과일물을 입에 머금었다.
상당히 썼던지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잠시 뒤 히죽 웃으면서, 황제가 중얼거렸다.
“이 약을 먹으면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먹기 싫다고 떼를 쓰고 싶어지는구나.”
“저한테는 떼쓰셔도 됩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레이놀드, 너한테 떼를 쓸 정도면 그냥 죽는 게 낫지.”
“···.”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정말 그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황제 폐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레이놀드는 히죽 웃고 어깨를 으쓱했다.
< 가짜 후계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