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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55화 (55/201)

< 최악의 통치자 >

* * *

마도구 시연회 날 레빈에게 맞은 눈두덩이는 하룻밤이 지나자 보기 흉하게 부어올랐다.

캄캄한 새벽, 훈련 받으러 갔더니 레빈의 눈이 말 그대로 계란만큼 커졌다.

“루, 루디님! 죄송합니다. 제가 대체 무슨 짓을···.”

맞아서 아픈 건 자신인데, 울상이 되어 허리를 굽히는 레빈이 더욱 불쌍해 보였다.

“괜찮아요. 보기에는 심한 것 같아도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고.”

“죄, 죄송해요.”

얼굴만 마주치면 머리를 숙인다.

보리스는 루디의 멍든 얼굴을 보자 쿡쿡거리고 웃었다.

“남자다워졌구나.”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가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루디는 살짝 옆으로 피했지만 금세 다시 머리를 잡혔다.

머리카락이 더욱 엉망이 되었다.

“···.”

보리스의 이런 면 때문에 마음의 경계가 조금 무너졌던 건지도 모른다.

평상시에는 악랄할 정도로 사람을 굴리면서 가끔 보여주는 행동이 마치 아버지나 삼촌 같았다.

그런 게 그리워질 나이도 아닌데, 아니, 물론 몸은 여섯 살이지만, 어쨌든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정신이 몸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간단하게 하자꾸나.”

보리스가 선심 쓰듯이 이야기했지만, 그 직후의 훈련은 시간이 조금 짧았을 뿐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쫓아오는 무기를 피해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른다. 겨우 십여 분 남짓 그렇게 구르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어쩐지 그저께보다 난이도가 올라간 것 같다.

헐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고 벌렁 눕자, 레빈도 휘청휘청 걸어 와 근처에 쓰러졌다.

보리스가 두 사람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둘 다 글은 읽고 쓸 줄 아는 것 같고, 황궁과 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오늘부터는 그런 부분도 조금씩 공부해 나가자.”

“어, 그런 것도 배워야 하나요?”

레빈이 묻자, 보리스가 손가락으로 툭 그의 이마를 건드렸다.

“넌 이미 늦었어. 설마 너는 시종이 문이나 열고 사람들 옆에 서서 그릇이나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지만.”

“이 녀석아, 너처럼 계속 멍하니 있다 보면 누군가의 역모에 얽혀 순식간에 사형장에 끌려가고 말 거다. 가르쳐 줄 때 잘 배워둬. 루디보다는 특히 네가 잘 들어둬야 할 거다.”

“···네.”

레빈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어제 일로 그는 굉장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루디, 너는 디코콰리아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의 생활은 어느 정도나 기억하고 있느냐?”

“그때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

루디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보리스의 질문에 무슨 뜻이 있는 건가 싶어 경계심이 일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별다른 뜻이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디코콰리아의 상황 같은 것도 하나도 모르겠구나. 뭐, 너처럼 어린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냐마는.”

보리스가 루디와 레빈 앞에 작은 가방을 놓았다. 아직 뭔가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달콤한 과일이 들어 있었다.

둘이 그걸 하나씩 들자,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오늘은 디코콰리아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 나라는 굉장히 독특하고 복잡한 상황에 놓였던 곳이지. 기초적인 설명을 하기에도 딱 좋구나.”

루디 역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바깥 세상과 떨어져 사는 후궁에서는 정보 얻기가 너무 어렵다. 루디는 아직도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디코콰리아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두 개의 왕조가 존재하지. 지금의 왕조는 나중에 나라를 이은 왕조다. 본래 나라를 일으킨 왕조는 와토린구 공작가의 핏줄이야.”

레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도 있나요?”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여러 대 전, 왕이 어린 공주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면서 그 약혼자의 집안이 국서로 통치하다 그대로 왕을 이었어. 공주는 죽을 때까지 후손을 낳지 못했다. 뭐, 당시에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차차 얘기하고, 그래서 디코콰리아에서 와토린구 공작가의 위치는 매우 애매하단다.”

루디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정이 그렇다면 디코콰리아의 왕으로서는 와토린구가 눈엣가시겠다.

처음 전생의 기억을 찾았을 때 경비대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에디에루 페레 세루히 마치 와토린구. 디코콰리아 왕국의 가장 고귀한 가문 와토린구 공작가의 후계자이십니다.]

그때는 고귀한 핏줄 운운하는 게 코레아 왕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헛짚었던 모양이다.

보리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와토린구 공작가는 왕가에 반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왕가는 계속해서 뭔가 이유를 들어 핍박을 계속했다고 한다.

카니아 왕국과 국경에서 자잘한 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큰 다툼은 없었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작의 영지가 윤택한 것도, 공작이 코레아 왕조의 공주와 혼인한 것도 질시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코레아 왕조 문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제아무리 마석이 많아도 마도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 세상에서 마도구에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코레아 왕조 뿐이었다.

단 한 명의 코레아 왕조를 소유함으로써 그 가문은 누구보다 뛰어난 무기를 갖게 된다.

안 그래도 초조하던 왕가로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그 아이를 왕가 안으로 데려오려고 공작을 압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공작가로서도 코레아 왕조의 아이를 남의 가문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유일한 적자, 후계자다. 혼인을 해도 타가로 내보내는 게 아니라 들여오는 쪽이었다.

당시 공작은 카니아보다 오히려 왕가의 암살을 더 우려했다고 한다.

루디는 자신의 탄생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졌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면 내가 먹었던 마녀의 마법 구슬은 왕가 때문에 준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설마 내가 공작가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겠지.’

보리스가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자,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너희가 와토린구 공작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느냐?”

“···.”

“···.”

루디와 레빈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왕국 내부에서는 왕가가 가문을 잡으려 하고, 게다가 당주는 암살 위험에 처한 거야. 그리고 갓난아기인 후계자는 납치당할지도 모르는 거지. 그뿐이 아니야. 외부에서는 카니아 왕국이 계속 전쟁을 걸어오지. 와토린구는 카니아와 가깝기 때문에 가장 먼저 피해를 받는 곳 중 하나다.”

보리스의 시선이 레빈을 향했다.

“레빈, 너라면 어쩔 테냐?”

레빈이 과일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어···저라면···그냥 왕가의 공주님이랑 아들을 혼인시킨 뒤에 두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왕가에 보낼···.”

“안 돼. 왕은 그렇게까지 길게 기다릴 생각이 없다. 게다가 나중에 태어난 자식이 코레아 왕조의 문장을 가질지, 마력 소유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오히려 갖지 못할 확률이 더 크지. 문장은 핏줄을 통해 이어지지만 드물게 나타나는 거니까.”

보리스가 이번에는 루디를 보았다.

“너라면 어쩌겠니?”

“···.”

글쎄,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 가면 이제 더 이상은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사방팔방이 적인데 루디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 이미 마력소유자는 많이 죽은 상태였다.

공작가에서는 공작과 경비 대장 두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고 하니 돈도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루디가 대답을 못하자, 보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 상황까지 가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왕이랑 싸우기에는 힘도 모자라지만, 막상 동조자를 얻는다 해도 옆에는 카니아 왕국이 노리고 있지. 싸울 수도 없는데 가만있어도 서서히 힘이 빠지기만 하는 거야. 그야말로 거미줄에 친친 감긴 꼴이지. 그대로 몇 년만 지났으면 주변국에서 침략해 결국 카니아도 디코콰리아도 망했을 거다.”

보리스가 루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처지라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생기게 마련이지. 가장 최선인 방법을 찾아도 반드시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니까.”

이번에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보리스가 말했다.

“명심해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기 전에 탈출구를 마련해야 한다. 항상 이중 삼중으로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해.”

보리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는 두 사람에게 숙제로 남겨두지. 계속 생각해봐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었을까. 계속 궁리해봐.”

레빈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그, 와토린구 공작은 어떻게 했나요?”

보리스가 씨익 웃었다.

“모른다. 그 사람이 무슨 수를 썼는지, 어떤 방법을 마련했는지 지금 알 방법은 없어. 공작은 겉으로 볼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면서 보리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사람이 뭔가 했으니까 후계자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거겠지.”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고 하셨잖아요.”

레빈의 말에 보리스가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얏!”

레빈이 이마를 잡고 울상을 지었다. 퍽, 소리가 난 걸 보면 꽤나 아플 것 같다.

“너는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발견되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나타난 거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냐.”

“···.”

보리스가 레빈에게 어제의 일에 대해 몇 마디 한다.

상황을 생각해보려 하지 않고 감정에 몸을 맡기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느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목숨이 두 개 있어도 모자라다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레빈이 더욱 풀이 죽어 머리가 점점 내려갔다.

“···.”

루디는 지금까지 공작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에게는 전혀 남이나 다름없다.

얼굴도 도망치다 스치듯 본 것뿐이고, 말 한 번 나눠본 적이 없다.

공작에 대한 기억도 거의 한두 장면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무슨 영화나 다큐멘터리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리리샤 공주나 나디아그라 비가 지금의 그에게는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방법을 마련해두고 있었지.’

경비 대장도, 자신을 키워준 유모도, 모두 그를 위해서 희생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복수할 생각은 커녕,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는 자신은 너무 매정한 걸까.

루디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레빈이 이마를 문지르다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근데 이번 전쟁에서 제국은 뭘 얻었나요? 여기로 오기 전에 들은 소문으로는 노예 외에는 얻은 게 없···.”

말을 하다 말고 레빈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루디도 디코콰리아의 노예였다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다.

레빈이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루디님, 죄송해요.”

“괜찮아요.”

자신이 디코콰리아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없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본 세상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모두 괴롭다.

나디아 마마의 처소에 있는 여자들과 레빈이 그렇듯이, 잘은 모르지만 황제와 보리스에게도 이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리스가 힐끔 루디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제국은 그 전쟁에 그다지 큰 일을 하지 않았다. 디코콰리아와 카니아는 누가 더 위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전력이 비슷했지. 이쪽에서 한 사람의 힘이 강하면 반대편은 숫자로 밀어붙이는 식이었어. 제국은 소수의 군대를 보내서 그 균형을 깨뜨린 것뿐이다.”

보리스의 조용한 목소리가 루디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 두 나라는 그대로 놔뒀어도 몇 년 안에 무너졌을 거다. 국민에게 가장 최악인 통치자는 포악한 사람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사람도 아니야. 적의 군마가 내 나라를 짓밟게 하는 군주야말로 국민에게 가장 나쁜 통치자다.”

“···.”

그런 의미로 따지면 영민이 떠받든다는 와토린구 공작도 최선이 아닌, 최악의 영주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인간의 가치는 저쪽 지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장 위에 선 사람의 가치도, 가장 저변을 이루는 인간의 가치도 마찬가지.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면 선악의 기준조차도 달라진다.

*

다른 때보다 일찍 저택으로 돌아가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리샤 공주가 루디를 보자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제는 펑펑 우느라 리리샤 공주가 루디의 얼굴을 제대 보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는 약간 붉었던 눈두덩이가 오늘은 시퍼렇게 변했다.

그게 굉장히 이상하고 낯설었던 모양이다.

리리샤 공주는 다른 때와 달리 루디에게 달려들지 않고 서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만히 서서 루디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공주님?”

루디가 부르자, 리리샤 공주가 가슴을 들썩거리며 히이, 히이, 이상한 숨소리를 내더니 울기 시작했다.

“루···어구···어구···버에···버에···.”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몇 번 반복하는 걸 들어보니, 루디의 얼굴이 벌레에 먹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얼굴의 퍼런 부분이 벌레처럼 보였던 걸까.

아이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공주님, 이건 벌레가 아니에요. 멍이라고, 어딘가에 부딪치면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자, 리리샤 공주가 달려들어 루디의 눈두덩이를 때렸다.

아프다.

“···버에···버에···나아···나아···!”

벌레 나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벌레가 얼굴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공주님.”

“루우···.”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공주의 작은 손에 얻어맞아야 했다.

어디에 벌레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눈꺼풀을 뒤집으려고 해서 죽는 줄 알았다.

< 최악의 통치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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